YN
2,500년 전, 히포크라테스는 선서를 읊었다. 외람된 처방과 동료 의사를 향한 음해가 성행하던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충분한 의료를 행하겠노라 결심했다. 지난날 다짐한 혁명은 전쟁과 기근 등 죽음이 난무하는 시대를 경험하며 단단해졌고, 오늘날 의사들은 그 의지를 이어받아 제네바 선언¹을 낭독한다.
3조, 나는 의술을 양심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베풀겠다.
4조, 나는 환자의 건강을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하겠다.
9조, 나는 생명이 시작된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을 최대한 존중하겠다.²
의료는 베풀어져야 한다. 환자는 배려받아야 한다. 생명은 존중받아야 한다. 제네바 선언에 의하면 인간은 마땅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아니, 받아야 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선서가 유효한지 묻는다면 우리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의료의 윤리적 지침을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이건 자본 아래에서 힘을 잃는 숱한 선언들에 대한 진혼가(鎭魂歌)다.
#. 현실에 놓였다
사람은 아프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생로병사를 겪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아프고, 병원에서 각기 다른 치료를 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쉬이 병원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자본을 이유로 병원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이다.
- 건강한 사람들
A는 한참을 고민했다. 직장 동료들 사이에선 영양제 추천이 한창이었다. A는 영양제를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건강을 위한다지만, 한 통이 삼만 원을 웃돌았다. A의 형편에 건강 보조 식품은 사치였다. 콜레스테롤 수치 개선에 좋다며 오메가3를 권하는 동료의 이야기에 멋쩍게 웃었다. 굳이 영양제를 챙겨 먹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늘 당장 아프지 않은 걸로 족했다.
우리는 건강 중심 사회에서 살고 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에 따르면 건강 중심 사회란 “모든 사람이 건강하다는 걸 전제로, 건강한 시민만을 표준의 몸으로 삼아 사회를 직조하는 것”을 뜻한다.³ ‘건강한 몸’을 표준으로 보기에 ‘건강하지 못한 몸’은 끊임없이 소외되고, '건강하지 못한 몸'은 곧 자기관리에 실패했다는 증표가 된다. 건강 중심 사회가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건강이 자기관리의 영역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자기관리는 단순히 자신을 보살피고 가꾸는 일을 넘어 '노력'으로 '더 나은 상태'를 성취할 수 있는 일로 통용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관리 담론 안에서 관리와 통제를 통해 이상적인 모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프지 않도록 관리하는 동안 헬스케어와 메디케어의 성행과 함께 자본주의 사회는 굴러가고, 건강은 개인의 노력으로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상태로 환원된다. 하지만 건강 관리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행할 수 없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건강 관리 열풍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발표한 ‘2020년 식품산업 생산 실적’에 따르면, 건강기능식품 산업은 2019년(1조 9,464억 원) 대비 2020년(2조 2,642억 원) 16.3% 성장했다. 밀가루를 원료로 쓰지 않는 글루텐 프리 식품이나 설탕 함유량이 적은 저당 식품의 매출 또한 상승세다. 건강 관리는 더 이상 기성 세대만의 담론이 아니다. 20·30대를 포함한 전 세대가 건강 관리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건강식품에 대한 관심도는 더욱 높아졌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몸에 좋다는 영양제를 추천하며 복용한다. 어린이용 홍삼의 종류는 나날이 늘어나고, 유튜브엔 건강식 요리법이 끊이지 않고 올라온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적·경제적 지출은 당연히 개인의 몫이다. 신선한 유기농 채소를 챙겨 먹고, 시간을 써서 운동하는 것처럼 건강 관리에는 재화가 필요하다. 건강한 식단도, 주 2회 운동도 돈과 시간이 없다면 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재화를 소비해서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재화가 부족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건강 관리 담론에서 소외된다.
생계를 유지하기도 빠듯한 벌이에 건강 관리 비용이 끼어들 여력은 없다. 특히 물가가 천정부지로 솟는 지점에서 저소득층은 건강한 식단을 챙겨 먹기 어렵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소득이 적어질수록 신선식품⁴의 소비량 또한 줄어들었다. 소득 하위 25% 가구와 소득 상위 25% 가구의 신선식품 소비량을 분석한 결과, 하위 가구의 우유와 과일 소비량은 각각 상위 가구 대비 65%, 74%에 그쳤다. 육류와 어패류의 소비량 또한 86%, 79%에 불과했다. 소득 하위 가구의 식탁에 영양소를 얻을 수 있는 식품군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저소득층 청소년이 건강한 식단을 챙겨 먹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자 국가는 해결 방안으로 아동 급식 지원금⁵ 제도를 내놓았다. 2022년 7월 기준, 서울특별시는 2차 추경안을 발표하면서 결식아동 급식단가를 7,000원에서 8,000원으로 인상하기로 했다. 하지만 급격한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여전히 적은 금액이다. 지원금을 사용할 수 있는 음식점 또한 소수다. 서울특별시의 자치구 및 업종별 아동 급식카드 가맹점 현황을 보면 전체 12,455개 가맹점 중 일반 식당은 2,988개에 불과했다.⁶ 이런 상황 속에서 아이들의 선택지는 결국 인스턴트 식품이 가득한 편의점뿐이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강득구 의원실이 전국 지자체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사용된 아동 급식 카드의 총 352만 6,038건의 49.5%에 해당하는 174만 4,142건이 편의점에서 사용됐다. 이는 해당 아동 급식카드를 보유한 아동 중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하지만 우리 몸의 필수 영양소는 인스턴트 식품만으론 채워질 수 없다. 저렴한 가격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영양 불균형은 심각해진다.
- 건강해야만 하는 사람들
B는 손목을 주물렀다. 잔업을 급하게 마무리하다가 삔 듯했다. 며칠 전에는 다른 작업장에서 일하던 동료가 다쳤다. 기계에 손가락이 끼었다나. 생경한 소식은 아니었다. B가 일해 온 6년간, 안전사고는 빈번했다. 하지만 하청 노동자의 사고는 잠깐 화제가 되었다가도 이렇다 할 조치 없이 사그라들 뿐이었다. 사고가 났던 동료들은 대부분 퇴사했다. 정확히는 퇴사를 당했다. 어찌 됐건 B는 내일도 일을 해야 했다. 병원에 갈 시간은 없었기에 시큰거리는 손목에 파스를 붙였다.
사람은 건강해야‘만’ 한다. 건강 관리 담론 아래, 아픈 몸은 노동시장에서의 소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건강한 몸’은 노동할 기회를 얻는다. 반면 노동을 하다가도 ‘건강하지 못한 몸’은 노동 시장에서 배제된다. 본디 상병으로 노동을 지속할 수 없을 때엔 휴직이나 병가 제도 등의 보장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노동자에게 동등한 선택지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노동자들은 직업군에 따라 차별적으로 휴직의 기회를 얻었다. 정규직 노동자에게는 휴직 혹은 재택근무라는 선택지가 주어졌으나, 비정규직 노동자는 휴직의 기회에서 배제됐다. 이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실직이 대부분이었다. ‘아픈 노동자들’은 종사상 지위에 따라 노동시장에서 더욱 불안정한 위치로 밀리거나 실직을 경험했다.⁷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플 때 제대로 쉴 수조차 없다. 사회는 아프면 쉬라고 말하지만, 이들에게 ‘아플 때 쉴 권리’는 먼 나라 이야기다. ‘국제직업환경건강 아카이브’에서 진행한 설문조사 분석 결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병결 빈도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최대 43%가량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하지 못한 만큼 임금이 적어질까, 취업줄이 달린 관리자 눈 밖에 날까, 걱정하며 아파도 앓는 소리 한 번 낼 수 없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할수록 건강과 멀어진다.
노동 환경과 강도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기도 한다. 하청업체에 소속되어 일하는 현장 일용 노동자(이하 하청 노동자)만 해도 그렇다. 이들은 위험한 작업 환경과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만큼 건강과 안전이 최우선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근로자라면 응당 보장받아야 할 산재보험조차 제대로 적용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산재 보험⁸이란 근로자를 산업재해에서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험제도다. 산업재해는 크게 업무상 사고, 업무상 질병, 출퇴근 재해로 구분된다.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도, 출퇴근 중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어도 산업재해에 속한다. 업무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라고 인정되면 산업재해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일용직 노동자들은 산재 보험 가입이 힘들거나, 노둥 중 일어난 사고가 산업재해로 인정되지 않아 보장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업재해 위험직종 실태조사’에서 산업재해를 경험한 위험 직종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산업재해 처리를 받지 못한 최소 비율은 약 80%에 임박했다.⁹ 특히, 하청업체는 원청업체¹⁰와 재계약이 어렵다는 이유로 산업재해 발생을 은폐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 개인이 신청을 주저하는 경우도 많았다. 산업재해 처리 기록이 남게 되면, 다음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산재 처리를 포기하고 공상 처리¹¹를 받아도 회사로부터 퇴사를 권유받는 건 당연한 분위기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일하기 위해 ‘건강’을 요구받지만, 노동으로 잃은 ‘건강’에 대해서는 침묵을 강요 받는다. 모든 근로자는 보호받으며 안전하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건강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 건강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
C는 며칠 전 이사를 결심했다. 관절염 치료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병원에 방문해야 했지만, 지역 내에 이용할 수 있는 의료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시골이라 대중교통 이용도 힘들었다. 아픈 무릎으로 장시간 버스며 지하철을 이용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사히 이사 갈 수 있을지, 오랜 고향을 이렇게 떠나야만 하는지. C는 벌써부터 걱정에 눈앞이 캄캄하다.
대한민국의 인프라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있다. 대부분의 의료 인프라도 마찬가지다. 우측의 '2020년도 국토모니터링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시군구 응급의료시설 접근성¹²은 서울특별시가 2.94km로 가장 높았다. 하지만 강원도나 경상북도는 응급의료시설까지의 도로 이동 거리가 20km 이상이었다. 대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신속한 치료가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의료 시설이 부족한 지역일수록 공공 의료 시설의 중요도가 높아진다.
공공 의료 시설은 건강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 등을 민간병원보다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며, 외래 진료비 또한 민간병원보다 25%가량 낮다. 응급 상황이나 집단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평소 이용이 적은 응급의료센터나 감염병 격리병상을 필수적으로 설치하는 등 지역의 건강 컨트롤 타워 역할 또한 수행한다. 거주지 주변에 다양한 의료 시설이 없는 이들은 공공 의료 시설로 향한다. 하지만 2013년, 전 경상남도지사는 적자를 이유로 공공 의료 시설인 진주 의료원을 폐쇄했다. 이런 공공 의료 시설의 부재는 특수 상황에서 두드러진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2020년 3~4월 기준 공공 병원의 진료 실적이 민간 병원보다 3배 이상 높았다.¹³ 진주 의료원 또한 신종플루 사태 때 1만 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한 바 있다. 하지만 진주 의료원이 폐쇄되면서 경남은 코로나19 음압 병실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경남에는 국가 지정 음압 병실이 4개뿐이었고, 민간 병원 5곳의 음압 병실을 합해도 총 36개에 불과했다. 병실 부족으로 인해 진주의 확진 환자들은 마산 의료원까지 이동해야 했다. 결국 ‘적자’를 이유로 공공 병원을 폐쇄한다는 건, 의료 서비스에서 나아가 의료를 제공받는 환자보다 ‘자본’이 중요하다는 걸 의미한다.
의료 시설이 존재해도 이동 자체에 제약이 있는 사람들은 병원에 가기 쉽지 않다. 장애인과 노인은 경제적 이유 또는 의료 기관 접근성 문제로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곤 한다. 보건의료 관련 논문에 의하면, 2018년 기준 장애인의 미충족 의료 경험률은 15.14%였던 것에 비해 비장애인은 10.53%로 격차가 존재했다.¹⁴ 비장애인을 고령층과 근로 연령층으로 나눴을 때에도 각각 약 13%와 10%의 차이가 있었다.
그 예로, 2011년 장애인실태조사 응답자 중 지체 장애와 뇌병변 장애를 가진 성인¹⁵ 1,829명의 20.9%는 미충족 의료¹⁶의 경험이 있었는데, 그중 9.2%는 교통의 불편, 20.9%는 시간적 제약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동을 도와줄 사람의 부재 외에도 장애인 편의 시설의 부족 및 교통수단의 불편 등으로 인해 미충족 의료 경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¹⁷ 비슷한 문제는 고령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공 교통수단의 긴 대기시간과 복잡함, 운행 시간의 제한 등으로 병원 인근에 거주하더라도 방문은 쉽지 않다. 특히 비수도권에 거주하는 경우, 불편한 이동과 더불어 지역 간 격차라는 어려움이 동시에 발생한다. 이 경우 가족이나 이웃 주민의 도움 없이는 직접 병원에 가기 어려워 병이 악화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복지 부족과 의료 시설의 편향으로 인해 누군가는 지금도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
#. 빈틈에 놓였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대한민국은 건강 보험 제도가 잘 구축된 나라라고 말하지만, 국민 건강 보험과 의료 복지제도에도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 국민 건강 보험
국민 건강 보험은 정기적으로 보험료를 내는 국민들에게 필요시 보험 급여를 제공하여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사회보장제도다. 질병과 부상으로 발생한 고액의 진료비가 개인에게 과도한 부담이 되는 것을 방지해준다. 이는 국민 상호 간의 사회적 연대를 기반으로 하기에 모든 국민에겐 보험 가입 및 보험료 납부 의무가 주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직장 가입자 혹은 지역 가입자로 나뉘어 건강 보험에 가입하게 된다. 건강 보험 가입은 곧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균등한 의료 서비스를 보장 받을 권리를 의미한다.
탄생 취지에 맞게, 건강 보험은 의료비 부담을 현저히 줄여준다. 동지역 일반 환자의 외래 진료 기준, 종합 병원의 경우 본인 부담률 50%, 일반 병원의 경우 본인 부담률이 40%이다.¹⁸ 이는 진료비의 절반을 웃도는 금액을 국민 건강 보험에서 부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아가 1세 이상 6세 미만의 아동은 일반 환자 진료비 부담률의 70%만 부담한다. 이처럼 특정 기준에 따라 부담률은 더 낮아지기도 한다. 최근 코로나19 확진자 치료 비용에도 건강 보험이 적용됐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공개한 공단부담금을 살펴보면, 2022년 기준 지난 2년간 코로나19 확진자 치료에 투입된 비용 중 85.6%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부담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국민 건강 보험을 전보다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¹⁸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완벽한 제도는 없는 법이다.
- 개편된 건강 보험의 부담
정부는 2022년 9월부터 건강보험료(이하 건보료) 부과 기준을 재산에서 소득 중심으로 바꾸었다. 경제력이 높은 이들에게 더 많은 보험료를 부과하기 위한 취지였다. 소득보험료와 재산보험료를 내는 지역가입자와 월 소득에 따라 보험료가 책정되는 직장가입자 간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한 나름의 과제를 수행한 셈이다. 소득보험료를 매길 때 적용하던 등급제²⁰를 정률제²¹로 변경하는 등의 개편²²을 통해 지역가입자 859만 가구 중 561만 가구의 월평균 보험료가 15만 원에서 11만 4,000원으로 인하될 예정이다.
문제는 이번 건강 보험 개편으로 저소득층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는 점이다. 경제력에 따라 보험료를 부과하려는 취지와 달리 한 달에 28만 원 이하를 버는 저소득자의 기존 보험료는 월 4,000원 오른다. 지역가입자의 최저보험료를 기존 1만 4,650원에서 월평균 4,084원 인상하고, 최저 보험료 납부 대상자를 연 소득 100만 원 이하에서 336만 원 이하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저소득 242만 가구는 직장가입자 최저보험료와 같은 1만 9,500원을 내야 한다. 게다가 피부양자²³ 인정 기준을 연 소득 3,400만 원 이하에서 2,000만 원 이하로 낮추면서 본래 피부양자였던 저소득층이 자격을 잃고 가입자로 전환되게 된 점도 문제다. 제도 개편의 부담은 결국 저소득층이 지게 된 셈이다.
- 의료급여 제도
물론 저소득층의 의료비 부담 완화를 위한 제도는 존재한다. 의료급여 제도가 그 예다. 의료급여 제도는 저소득 국민의 의료 문제를 국가가 보장하는 공공부조 제도로, 개인의 질병이나 부상에 대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단 표에는 의료급여 수급권자²⁴에 따른 본인 부담액이 제시되어 있다. 1종 수급권자의 외래진료 금액은 1,000원에서 2,000원 사이다. 비교적 부담 없는 가격에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의료급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기초생활수급자의 부양의무자 기준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적상 부양의무자가 존재하는 사람은 부양의무자와 연락이 닿지 않거나 실질적으로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의료급여를 받지 못한다. 연락이 끊기거나 도움을 받지 못해도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의료급여를 받지 못하는 저소득층은 73만 명에 달한다. 의료급여 비수급 저소득층 가구의 38%는 부담스러운 병원비로 인해 치료를 포기했다. 이는 의료급여 수급 가구(17.4%), 일반 가구(4.6%)보다 현저히 높은 수치다. 이에 2021년 정부는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재난적 의료비 지원 대상을 확대했으나, 1인당 지원 한도 금액이라는 상한선이 존재하거나 환자 또는 대리인이 직접 건보공단 지사를 방문해 신청해야 한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결국 의료급여 비수급 저소득 가구는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있어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이다.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고 이들을 의료급여 수급자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지만 정작 그 기준은 ‘완화’에 그쳤다.²⁵ 더불어 개선 방안은 2023년이 되어서야 마련될 예정이다. 우리복지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의료급여의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지 않는다면 빈곤층을 양산하는 구조로 갈 수밖에 없는데도 재정 부담, 사회적 수용성을 놓고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8년 기준 의료급여를 받지 않는 저소득층은 생계급여를 받지 않는 저소득층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그러나 국가는 몇 년간 개선 방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질병은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데도 진전은 느리다.
#. 의료 민영화
자본에 의해 치료 여부가 갈리는 세상이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빈틈에 놓인 사람들이 여기, 살고 있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실정인데도 대한민국에 '의료 민영화'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의료 민영화란 ‘의료체계에 대한 자본의 개입과 영리 추구를 제도적으로 허용하는 것’²⁶을 뜻한다. 대한민국의 현행 의료법상 공공 병원을 제외한 모든 병원은 비영리 병원이다. 대한민국은 병원의 90%가 민간 병원이지만²⁷ 의료로 벌어들인 돈은 오직 의료를 위해서만 써야 한다는 비영리 원칙과 건강 보험 의무 가입, 건강 보험 당연지정제(이하 건보 당연지정제)를 통해 공공성을 유지하고 있다. 건보 당연지정제는 '국민건강보험법에 근거하여 모든 의료 기관은 국민 건강 보험 가입 환자를 의무적으로 치료하고, 국가가 정한 건강 보험 수가²⁸를 받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를 통해 건강 보험에 의한 적절한 진료비 및 의료 서비스 필수 제공이 보장되고 있다. 물론 병원의 종류가 공공 병원과 비영리 병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영리 병원이 존재한다. 영리병원이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병원으로, 기업이나 민간 투자자의 자본으로 세워진 병원을 말한다. 대한민국의 영리 병원은 2002년 경제자유구역법 제정을 통해 경제자유구역에 한해 외국인 전용으로 설립할 수 있다. 이후 2006년에 제주특별법을 제정하여 제주도에는 내국인 진료를 할 수 있는 영리 병원 설립이 가능해졌다.²⁹
그러나 영리 병원은 건보 당연지정제가 적용되기 어려운 병원이다. 따라서 비싼 진료비를 감당할 가능성이 크다. 급여가 높은 영리 병원으로 의료 인력이 쏠리면서 의료 서비스 양극화가 발생할 수도 있다. 더 좋은 의료 서비스를 누리고자 고소득층이 영리 병원만을 이용한다면, 굳이 건강 보험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건보 당연지정제의 문제를 떠나 건강 보험에 가입하는 것조차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건강 보험을 이용하지 않으니 가입할 의무가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면 헌법재판소에 위헌 신청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건강 보험 의무 가입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을 시, 고소득층은 건강 보험에 가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곧 건강 보험 재정의 축소로 이어진다. 건강 보험이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 적용 폭이 점점 좁아지고, 질적 서비스 또한 점점 저하된다면 결국 중산층도 건강 보험에서 이탈하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영리 병원의 설립은 최종적으로 건강 보험 체계가 흔들리게 됨을 의미한다. 의료 민영화의 문제는 훨씬 더 많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돈’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마땅한 의료 서비스를 누리며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법령³⁰으로 규정되어 있는 명백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의료에 가닿지 못하고, 개인의 건강이 돈으로 결정되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우리의 삶과 건강, 나아가 행복마저 돈으로 판가름 날지도 모르는 시대가 머지않았다면. 서론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21세기 대한민국, 여전히 선서는 유효한가?
¹ 1948년 제네바의 세계의사회 총회에서 채택된 선언으로, 의사로서 명심해야 할 것을 서약의 형식으로 표현한 선언이다.
² 제네바 선언에서 일부 발췌
³ 강한님, 「[연결자들] 건강중심사회에서 질병권을 말하다」, 『참여와혁신』, 2021.07.23.
⁴ 신선한 상태로 유통되는 채소나 과일, 생선 따위의 식품으로 본 교지에선 우유와 과일을 지칭한다.
⁵ 각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결식아동 급식지원 사업의 일환. 만 18세 미만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일반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카드를 지원한다.
⁶ 황문권, 「[지금 의회는] 아동급식카드 가맹점을 서울시 모든 음식점으로 확대해야」, 『서울시정일보』, 2020.11.12.
⁷ 김기태·이승윤(2017), 아픈 노동자는 왜 가난해지는가? - 아픈 노동자의 빈곤화과정과 소득보장제의 경험. 한국사회정책, 24(4), 113-150.
⁸ 국가가 사업주로부터 소정의 보험료를 징수하여 사업주 대신 산재근로자에게 보상을 해주는 사회 보험 제도
⁹ 산재보험으로 치료비를 충당한 가장 높은 비율은 건설플랜트 업종의 20.3%이다. 그 외 조선업은 7.2%, 철강업은 7.9%의 비율을 차지했다.
¹⁰ 하청업체에 업무를 청부하고 자금을 대는 회사
¹¹ 근로자가 업무 수행 중 부상을 입었음을 이유로 회사에서 민법상 손해배상을 하고 합의하는 것. 개인과 회사간의 합의이기에 산재 처리와는 차이가 있다.
¹² 해당 보고서에선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응급의료시설까지의 도로 이동거리를 칭한다.
¹³ 황예랑, 「‘착한 적자’ 짐, 나라가 덜어주고 공공병원·인력, 과감히 늘려야」, 『한겨레』, 2020.06.28.
¹⁴ 김수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보건의료 및 건강수준 격차와 시사점." 보건복지포럼 (2021): 49-61.
¹⁵ 2011년도 장애인실태조사에 참여한 만 20-64세
¹⁶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
¹⁷ 전보영·권순만. "장애인의 보건의료 접근성 저해 요인: 경제적 부담, 교통 불편, 시간적 제약으로 인한 미충족의료를 중심으로." 社會 保障 硏究 31.3 (2015): 145-171.
¹⁸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건강보험 본인부담기준 안내」
¹⁹ 국민건강보험공단 조사 결과 성인 2,000명의 92.1%는 국민건강보험에 긍정적인 인식을 지녔다고 답했다.
²⁰ 가입자의 소득 금액을 합쳐 97등급으로 나눈 후 ‘소득등급별 점수표’에 근거하여 보험료를 계산하는 방식
²¹ 가입자의 소득을 일정 비율(2022년 기준 6.99%)로 계산하는 방식
²² 등급제는 등급마다 소득 대비 보험료율이 상이한데다, 저소득 구간일수록 소득 대비 부과 점수가 높다는 문제가 있었다.
²³ 직장 가입자의 가족으로 납부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어 건강보험료를 내지 않으나 혜택은 받는 사람을 칭한다.
²⁴ 특정 기준 하에 의료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람, 주로 기초생활수급권자가 이에 속한다.
²⁵ 보건복지부의 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
²⁶ 박지영. (2020). 역사적 관점으로 본 자본주의와 건강, 그리고 한국의 의료민영화. 역사비평, 284-309.
²⁷ 민중의 소리, 「[사설] 컨테이너 병상보다 민간병원의 참여를」, 『민중의소리』, 2020.12.14.
²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 후 환자와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받는 돈
²⁹ 김지환, 「국내 1호 제주 영리병원 ‘논란’ 재점화」, 『경향신문』, 2022.04.17.
³⁰ 보건의료기본법은 보건의료의 형평과 효율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여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기본 이념으로 한다. 모든 국민은 보건의료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참고문헌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건강보험 본인부담기준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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