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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안데르센의 <The Little Mermaid>를 인용,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노을이 붉게 굽이치는 파도 사이로 ‘그것’이 머리를 불쑥 내민다. 바다의 물기를 잔뜩 머금은 눈빛은 한동안 육지의 인간들에게 머무른다. 바람으로 숨을 쉬고 두 다리로 땅을 걷는 인간들. 이들은 꼿꼿이 서서 대지를 제 것인 양 마음껏 누빈다. 인간은 모래사장에 남은 파도의 흔적을 기준 삼아 땅과 바다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땅 아래에 있는 바다와 지느러미가 달린 ‘그것’. 땅의 인간들은 ‘그것’을 인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상반신과 물고기의 하반신을 가진 반인반수, 육지에서 환영받지 못해 끝끝내 물속에 남고 만 것, 그들은 바로 인어다. 과거 서구 사회 사람들은 인어에게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그들을 잡종 혹은 괴물이라 불렀다.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은 인어는 인간들에게 불완전한 존재였다. 그들의 꼬리와 지느러미는 환영받지 못했다. 육지와 바다를 가르는 경계선은 분명했다. 인어(人魚), 인간도 물고기도 되지 못한 존재는 영혼조차 부여받지 못한 채 바다 어딘가를 부유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도 땅에 오르지 못한 인어가 있다.
<인어, 영혼을 원하다>
“영혼이 없는 우리 인어는 잘려나가도 해초처럼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반면 인간에게는 영원토록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이 있어서 육체가 먼지로 변한 후에도 다시 살 수 있지. 인간의 영혼은 투명하고 순수한 대기를 뚫고 저 멀리 반짝이는 별까지 올라가. 인간의 영혼은 우리가 절대로 볼 수 없는 미지의 영광스러운 곳까지 올라간단다.”
인어는 땅의 인간을 사랑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인어는 비늘과 지느러미가 달린 괴물과 다름없었다. 영혼을 갖지 못한 인어의 육신은 죽음과 함께 물거품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그렇게 땅의 인간을 사랑한 인어는 불멸의 영혼을 갈망하게 된다.
- 떠난 영혼, 남겨진 몸
안데르센이 쓴 서양 고전 동화 <The Little Mermaid>에서 인어는 영혼이 부재한 불완전한 존재다. 반면 인간은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전부 갖춘 가장 완벽한 존재로 묘사된다. 죽으면 재가 되어 사라질 육체에 반해 영혼은 순수하고 불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육체만을 지닌 인어가 인간의 영혼을 갈망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갈망은 비단 안데르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다”라고 말했던 플라톤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 고대 서양 사람들에게 몸은 영혼이 잠시 머물다 가는 그릇과 같았다. 영혼만이 이데아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었으며, 물질적인 몸은 영원성을 띤 영혼보다 하위의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는 몸과 영혼이 둘로 나뉘는 이분법적 사고의 출발이 된다.
영혼에 대한 관념은 근대에 이르러 정신과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는 서양 근대 철학자인 데카르트가 남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어구에서 잘 드러난다. ‘나(자아)는 생각(이성)한다. 고로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심신이원론¹은 서구 사상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성이 있는 자만이 온전한 자아를 획득한 존재이자 인간이라는 사고는 근대의 합리주의²에 기반한 계몽주의³로 이어진다. 이러한 이분법적 인식론은 현재에도 전 사회적인 사고체계로 작동하고 있다. 더불어 데카르트가 “동물은 영혼 없는 기계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몸/정신을 나누어 이성을 우위에 두고자 하는 욕망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유효하다.
‘정신’과 ‘몸’을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정신을 떼어낸 몸을 한낱 단백질 덩어리로만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익히 알 수 있듯, 우리는 몸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세상을 통해 내 몸을 자각하며, 수많은 몸이 어우러져 세상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우리의 몸은 다양한 맥락과 환경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몸을 구성하는 입체성과 역사성은 종종 무시된다. ‘인간의 이성’을 최상의 가치로 두는 사고는 과연 어떤 식으로 몸을 단순하게 만들고 있을까?
- 완벽한 몸을 위하여
이성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불러일으킨 결과는 영화 <겟아웃>(2017)에서 엿볼 수 있다. 영화의 백인 등장인물은 흑인의 신체를 숙주 삼아 자신의 뇌를 이식하고 지배하려 한다. 이는 이성의 근간으로 비유되는 백인의 뇌를 뛰어나다고 인식되는 흑인의 신체에 이식함으로써 ‘완벽한 인간’을 만들겠다는 해당 인물의 욕망을 보여준다. 작중에서 흑인의 신체를 고평가하는 것이 언뜻 보면 차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육체가 이성보다 하위의 것으로 치부되는 현상을 떠올려본다면, 흑인을 육체적 존재로만 간주하는 사고가 매우 차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겟아웃>에서 뇌 이식 수술을 거친 흑인들은 백인의 뇌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백인과 같은 존재로 대우받는다. 흑인의 모습이더라도 백인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은 백인과 더 가까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피부색이 인종차별의 주요 근거임에도 불구하고, 백인의 뇌를 가진 흑인의 몸은 ‘흑인이 아닌 몸’이 된다. 이러한 모순은 대상의 본질적인 특성이 결코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성’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위계를 나누어 타자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우열’의 기준을 만들어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타자들은 이성(정신)이 존재하지 않는 육체적 존재로 살아간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다고 얘기되는 여성, 성적 규범에서 벗어난 퀴어, 비정상적인 몸과 정신으로 규정되는 장애인, 영혼 없는 기계로 취급받는 동물 등, 이성이 ‘부재’한 몸은 타고 나기를 ‘열등한 것’이 되어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
<인어, 지느러미를 잃다>
“아름다운 인어! 너는 땅의 인간을 사랑하고 불멸의 영혼을 얻고자 하지. 인어의 꼬리를 없애고 인간처럼 두 다리를 얻고 싶다면, 내일 해가 뜨기 전 네가 땅을 헤엄쳐 갈 수 있도록 물약을 만들어 주마. 너는 두 다리를 얻게 될 테지만 감미로운 목소리를 잃어버릴 것이고 한 걸음 뗄 때마다 날카로운 칼날 위를 걷는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야.”
인어가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영혼과 인간의 다리를 얻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인어는 제 몸을 바꾸고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다리를 얻어야 했다. 과연 인어가 원한 것은 진정 ‘인간의 몸’이 되는 것이었을까?
- 몸인 것과 몸이 아닌 것
신체발부 수지부모,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임을 뜻하는 말로, 우리 조상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에는 이런 유교 사상이 희미해졌다고는 하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신체만이 진정한 몸이며 그 몸을 온전히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해 보인다. 여린 살과 그 아래 붉은 피가 흐르는 우리 몸은 정말 나고 자란 그대로의 육체로만 살아갈까? 그 어떤 것도 바뀌지 않는 순수하고 온전한 몸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몸은 기술의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몸의 기능을 보조하는 기술 또한 생겨났다. 그 예로 우리는 시력이 떨어져도 안경, 렌즈, 라식 수술 등 외부의 개입을 통해 시력을 보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일상생활에서 렌즈가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안경이 종종 ‘제2의 눈’으로 불리는 것처럼, 눈에 덧씌워진 인공물은 신체 일부로 인식되기도 한다. 본래의 신체 요소가 아닌 외부 물질이 기존의 신체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외에도 심장의 기능을 돕는 인공심장판막이나 관절에 박은 철심, 코에 들어간 보형물 등 인공물은 사회의 맥락에 따라 신체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사회가 어떤 인공물을 ‘정상적인 몸’의 모습으로 인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본래의 신체가 신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 6개의 손가락을 갖고 태어난 사람의 경우, 그의 6번째 손가락은 기능적으로나 건강상으로나 어떠한 문제가 없더라도 ‘다지증’이라는 병명이 붙는다. 사회가 6번째 손가락을 정상적인 신체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치료’를 명목으로 한 ‘신체 교정’이 이루어지고, 또 하나의 6번째 손가락이 제거된다. 이렇게 사회는 다시 한번 다섯 개의 손가락만으로 존재하려 한다.
신체를 규범에 맞추려는 시도는 각각의 몸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면서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한다. 그 예로 사회적으로 구분되는 여성·남성의 신체와는 다른 몸을 가진 ‘간성’이 있다. 간성은 선천적으로 성선(난소, 정선)이나 성염색체, 성호르몬, 성기 가운데 하나 또는 다수가 ‘일반적으로’ 여성·남성으로 구분되는 특질과 다르게 태어난 사람을 일컫는다. 대부분의 간성은 출생 이후 성별을 지정하는 과정에서 성기 성형수술을 받게 된다. 특정 성별로 보이기 위해 신체의 일부를 변형시키는 수술은 매우 위험하고 부작용도 크다. 하지만 ‘규범적인 몸’이 되기 위해 당사자의 동의 없이 보호자의 의사로만 감행된다. 이와 같은 임의적인 수술을 받은 간성은 많은 경우 수술의 부작용과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⁴
안경을 몸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시대와 간성의 몸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사회가 존재하는 것처럼, 시대와 환경 그리고 공간에 따라 몸은 다르게 정의된다. 이처럼 ‘몸인 것’과 ‘몸이 아닌 것’을 나누는 인식은 절대적이지 않다. 사회의 정상 범주로 들어간 몸만이 ‘몸’이 되어 그 외에는 비정상적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된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규범 안에서 우리의 몸은 읽히고 해석된다.
<인어, 땅에 오르다>
“지느러미가 사라진 인어는 땅에 올라 사랑하는 인간의 곁을 지켰다. 둘은 달콤한 향이 나는 숲을 거닐고, 구름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울퉁불퉁한 산을 걸을 때면 인어는 칼날 위를 오르는 고통을 느꼈다. 모두가 잠든 밤이 되어서야 인어는 차가운 바닷물에 발갛게 부어오른 발을 담글 수 있었다. 살랑대는 바닷바람을 느끼며 깊은 바다 아래의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렸다.”
다리를 얻은 인어는 그제야 땅에 오를 수 있었다. 인어는 두 다리로 사랑하는 인간의 곁을 지켰고, 울퉁불퉁한 숲을 거닐었다. 하지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의 다리는 그를 아프게 했다. 지느러미가 없는 발로는 깊은 바다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러 갈 수도 없었다. 인어의 몸만으로 땅을 살아내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 몸과 공간
모든 몸은 공간에 자리한다. 몸과 몸은 행동하고 연결되며 공간과 함께 그 존재를 드러낸다. 그리고 몸을 담은 공간은 곧 ‘장소’가 된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마다 그들 사이에는 세계가 출현하며, 모든 인간사가 일어나는 곳은 바로 이러한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 가운데”라고 말했다.⁵ 장소의 사전적 의미가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임을 떠올려봤을 때, 그가 이야기하는 공간이 곧 ‘장소’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간은 단순한 물리학적 세계가 아닌 사회문화적인 몸의 장소로 작동한다.
장소의 필수 조건이 ‘몸들’이라면, 공간은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모든 인간사(몸의 역사)가 공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로 소득 수준을 유추할 수 있는 아파트 단지, 특정 세대의 공감대와 문화를 공유하는 홍대,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시위 무대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공간에 속한다는 것은 공간 속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그 공간에서 배제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어떤 몸이 공간에서 배제되고, 어떤 방식으로 차별당할까?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공간은 어떤 ‘장소’가 되어야 할까?
- 정치적인 공간
영화 <설국열차>(2013)에서 등장하는 열차는 빙하기가 도래한 지구에서 마지막 인류를 태우고 달리는 이동수단이자 하나의 세계로 묘사된다. 열차 각각의 칸은 계급에 따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열차 상층부는 지도자와 상류층이 점거하고 있으며 하층부로 내려갈수록 사회적 계층 또한 낮아진다. 그중 가장 낮은 계급의 인간은 꼬리 칸 외의 열차 공간을 허락받지 못한다. 한정된 공간에서 감금·관리되는 방식은 그들의 계급을 끊임없이 각인시킴으로써 저항 의지를 무력화하는 하나의 장치로 이용된다. 이렇게 <설국열차>에서는 물리적인 폭력과 억압으로 공간을 관리했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는 자본과 효율의 논리로 공간을 관리한다.
대중교통은 복잡한 도시 공간에서 이동의 자유를 넓혀주었다. 교통수단의 유무가 활동 반경을 결정하는 조건으로 작용하면서 교통 접근성의 중요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교통, 문화, 교육 등 각종 인프라가 생겨나며 '역세권'이 형성되었고, 이는 곧 해당 지역의 '값'을 결정하는 주요한 지표가 되었다. 실제로 서울시 25개 자치구 가운데, 자본이 가장 많이 밀집된 강남구, 송파구, 서초구가 전철역 보유 5순위에 들어가는 것만 보아도 자본에 따른 교통 불균형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국민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대중’교통이 자본과 결부하면서 하나의 특권이 되어버린 것이다. 돈이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 자유는 다시 자본의 기회로 돌아간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상대적으로 자본이 부족한 사람들은 교통으로 인해 교육, 의료, 고용, 여가 등의 영역에서 더욱더 멀어진다. 가난하고 아프고 취약한 몸일수록 보호받는 것이 아닌, 고립되고 소외당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학자 르페브르는 “공간은 정치적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수도와 서열화된 공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 지배계급은 공간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간을 권력에 복종시켜 사회 전체를 기술적으로 지배한다.”⁶ 이는 곧 공간을 통해 몸을 관리·감독하면서 지배 관계를 견고히 하는 현대사회의 맥락과도 이어진다. 우리 사회가 하나의 커다란 설국열차와 다름없는 것이다.
- 배제의 공간
이제껏 말해왔듯 몸에게 공간은 필수적이다. 몸 없는 공간은 존재해도 공간 없는 몸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몸이 공간에서 추방된다면 어떻게 될까? 공간 없이 존재하는 몸은 어떤 것일까? 앞서 <몸과 공간> 부분에서 다뤘던 것처럼 공간은 곧 정체성과도 직결된다. 하지만 공간이 그 몸을 거부할 때, 몸은 ‘장소’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거세당하고 만다.
우리 사회의 공간은 ‘공’과 ‘사’로 구분된다. 몸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에 걸맞은 행동을 요구받으며, 공사를 오간다. 공적 공간에서는 ‘사회적 활동’을 하고, 사적 공간에서는 ‘사생활’이 이루어진다. 밥을 먹고, 드러누워 자고, 몸을 씻고, 휴식하는 등 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활동이다. 하지만 몸이 사적 공간을 허용받지 못하게 된다면, 몸이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은 공적 공간뿐이다. 그렇다고 공적 공간에서만 존재하는 몸이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적 공간의 부재는 곧 공적 공간의 추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공간도 허용받지 못한 몸은 공과 사 사이의 경계를 살아간다. 그 대표적인 몸으로 ‘홈리스(homeless)’가 있다.
홈리스는 사적 공간에서 거주할 수 없어 공원이나 길거리 같은 공적 공간을 살아간다. 그 생활의 과정에서 숙식, 위생, 생리적 활동 등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사적 행동은 공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공사가 명확한 사회에서 ‘사생활’을 공적 공간에서 드러내는 행위는 ‘금기’로 여겨지기 때문에, 홈리스의 ‘생존’은 공공장소의 ‘용도’와 어긋나게 된다. 그렇게 홈리스의 생활반경은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경범죄 처벌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국가가 지키고자 하는 공공 안전의 대상에는 ‘집 있는 몸’만 있을 뿐, ‘집 없는 몸’인 홈리스는 배제되어 있다. 결국 홈리스는 공권력에 의해 최소한의 생활기반조차 박탈당한 채 거리를 이리저리 배회한다.
공적 공간은 말 그대로 공공의 공간으로서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홈리스에게 공적 공간을 선택할 공공성은 인정되지 않으며, 이와 같은 불인정은 국가의 무관심과 시민 다수의 암묵적인 합의 속에서 이루어진다. 거주지가 없는 이들은 공적 공간에서 존재할 권리가 있는 국민의 자격에도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공간에서의 추방은 곧 국민 정체성 박탈로 이어진다. 그들의 몸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비실체적’인 몸이다.
홈리스에 대한 해결책으로 임시적인 숙박시설과 피상적인 정책이 제시되곤 한다. 또한 공공장소에서의 사적 행위 허용 여부를 두고서 소모적인 논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홈리스가 처한 근본적인 문제는 주거권과 성원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다. ‘집 없는 몸’을 만들고 그 몸을 공간에서 배제하는 사회구조이며, 공적 기능을 상실한 공공장소가 ‘모두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것’이 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물어야 한다. 진정한 공적 공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공적 공간을 통해 어떤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다음에 이어질 내용은 이러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인어, 헤엄치기를 원하다>
“인어는 자신의 두 다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엇일까? 인간, 물고기, 괴물, 잡종, 부재한 영혼. 인어는 그런 게 아니었다. 미끌거리고 차갑고 까끌까끌한 몸을 가진 존재, 인어는 그냥 그뿐이었다. 그래서 인어(人魚)는 인간과 물고기 사이의 모호한 존재로 불리기를 거부했다. 인어는 인간들이 경멸하던 반짝이는 비늘을 따 저 자신을 인어(鱗:비늘 인, 魚:물고기 어)로 부르기로 한다.”
- 몸의 공간 투쟁
공적 공간의 공공성이란 ‘모두의 것’을 의미한다. ‘모두의 것’이란 그 어떤 몸도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함께 ‘장소’를 누리는 것을 뜻한다. 장소에는 몸의 역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몸의 역사는 그저 몸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부터 자신을 뚜렷이 내보이며 몸 간의 평등한 소통과 교류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몸의 역사가 완성된다.
지난 7월 16일, 서울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비대면으로 즐겨야 했던 퀴어문화축제가 올해 드디어 대면으로 개최된 것이다. 퀴어문화축제는 자신들의 존재를 숨겨야 했던 퀴어들이 도시 한가운데서 당당히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공적 장소다. 비록 서울시의 차별적인 행정⁷으로 인해 축제는 단 하루에 그쳤지만, 퀴어들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다. 곳곳엔 퀴어의 상징이 연잇고 퀴어의 몸으로 행하는 실천들이 축제를 다채롭게 만든다. 도시 공간에 생긴 안전하고 자유로운 영토는 이상한 몸들로 가득하다.
퀴어문화축제에서 퀴어의 몸은 뚜렷하다. 몸들의 소통은 평등하고 즐겁다. 그저 존재만 하는 몸이 아니었다. 광장으로 나와 ‘이상한 몸’ 그 자체로서 몸의 역사를 써 내려 갔다.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장소는 진정 모두의 것이었다.
인어는 꼬리로 헤엄치고 물을 사랑하며 때로는 땅의 바람으로 숨을 쉰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인어는 땅에 물길을 터 헤엄치고, 휠체어를 타 움직이고, 광장에 꼬리를 드러내며 언제든 땅 위를 살아간다. 지극히 평범한 일이다. 인어는 다리가 아니라 자유로운 영토를 꿈꿨다. 인어, 인간 할 것 없이 갖가지의 몸이 뒤섞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헤엄치고자 한다면 헤엄치고, 걷고자 한다면 걷는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곳은 인어가 헤엄치는 땅이다.
¹ 정신과 물질의 세계는 전혀 다른 것으로 뚜렷하게 구분될 수 있는 다른 근원을 가진다고 여기는 사고방식 (남영, 『태양을 멈춘 사람들』, 궁리, 2016.)
² 인간의 이성만을 합리적 인식의 근원으로 삼는 사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문학비평용어사전』, 국학자료원, 2006.)
³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믿으며 이성의 힘으로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데 목적을 두었던 시대적 사조 (이응백 외 2인,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⁴ 최미랑, 「“여자도 남자가 아닌 성별도 존재합니다. 제가 바로 그 증거죠”」, 『경향신문』, 2017.10.26.
⁵ 정미라, 「`공적 영역`의 상실과 현대사회의 위기 -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중심으로」, 『철학논총』, 2015.
⁶ 유승호, 「후기 근대와 공간적 전환-‘사회적 공간’으로서의 공간」, 『사회와이론』, 2013.
⁷ 서울시는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가 제출한 서울광장 사용 신청 안건을 수정 가결했다. 서울시는 6일간의 행사 기간을 단 하루로 줄이고, 신체 과다 노출과 유해 음란물 판매 및 전시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광장 사용 신청을 받아들였다. 서울광장은 사용 신고만 하면 누구나 자유롭게 광장 이용을 보장받아야 하는 ‘신고제’로 운영된다. 지금까지 행사 개최 여부와 관련해 시민위에 올라간 단체는 퀴어문화축제뿐이며, 이는 명백한 차별적 행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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