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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맥교지편집위원회 Dec 26. 2022

[83호][청년] 탈(脫)가정

B.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한 번도 도망쳐본 적 없는 이가 뱉은 말처럼 어딘가 거슬린다. 

  밥을 지어 먹고 몸 뉘어 잠들던 곳에 ‘내’가 있었던가. 혼란스러웠다. 나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으므로 낙원(樂園)¹의 여부 따위 중요치 않았다. 도착한 곳이 낙원은 아닐지언정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찾은 것은 낙원이 아니라 ‘나’였다. 혼란이 잦아드니 이제야 선명하다. 맞아 이게 나였지, 생각하며 숨을 고른다. 숨이 트이니 차츰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혼돈을 벗어나 얻은 것은 ‘나’뿐이었기에 생(生)을 위해 다시 고군분투해야 했다. 나를 찾아 뛰쳐나왔으나, 막상 허허벌판에 놓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게 주어진 것 하나 없었으므로 스스로 찾아내야만 했다. 그 혼돈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또다시 달릴 준비를 한다. 무작정 부닥쳐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탈출(脫出); 어떤 상황이나 구속 따위에서 빠져나옴

  사람은 살면서 많은 도망을 경험한다. 우리는 종종 도망의 주체 혹은 객체가 되어 무언가로부터 벗어난다. ‘도망’이 주로 ‘무언가에 쫓기는’ 상황을 설명하는 데 쓰여서인지 단어 자체의 어감이 긍정적이지는 않다. 비슷한 단어에는 ‘탈출’이 있다. 탈출은 ‘어떤 상황이나 구속 따위에서 빠져나옴’을 뜻한다. 도망과 마찬가지로 탈출 또한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주휴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아르바이트로부터, 열심히 준비한 시험으로부터 탈출하곤 한다. 숨통을 옥죄던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을 흔히 탈출이라 부르는 셈이다. 적고 나니 이 글의 주인공에게는 ‘도망’보다는 ‘탈출’이 적절할 듯싶다. 이 글은 가정으로부터 탈출한 청년들의 이야기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원가족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이들을 '탈가정 청년'이라 부른다. 포털 사이트에서 “탈가정 청년”의 정의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해당 용어는 학술적인 개념이나 정책 용어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탈가정 청년은 지난 2020년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청년자립TF가 처음 의제화한 개념이다. “(가정폭력, 가정불화, 성폭력, 아웃팅, 파산 등으로 인한) 탈가정 경험이 있거나 이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청년 혹은 탈가정을 희망하는 청년”을 의미한다.² 여기에서 ‘단절’은 주거의 분리뿐만 아니라 경제적 지원은 물론 관계 자체를 차단하는 정서적 단절까지 포함한다. 탈가정은 원가족과 정서적·경제적으로도 단절된다는 점에서 ‘독립’과 구분된다. 단절의 여부는 사회가 보편적으로 바라보는 독립과 탈가정의 가장 큰 차이다. 


▲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청년자립TF


  탈가정 청년은 주변에서 보기 드문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청년자립TF가 지난 2020년 12월 온라인설문조사업체를 통해 만19~34살 성인 2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탈가정 경험이 있다’가 22.4%, ‘탈가정 경험은 없지만, 시도하거나 희망한 경험이 있다’가 23.5%로 나타났다. 탈가정을 경험했거나 시도 혹은 희망한 적이 있다는 응답을 합하면 45.9%로,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이는 해당 설문조사 응답자 두 명 중 한 명꼴로 탈가정을 희망한 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청년들이 가정과의 단절을 선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사회에서는 쉬이 탈가정 원인을 가정폭력으로 추측하지만, 상단 우측 사진 자료에서 알 수 있듯 그 원인은 신체적 폭력에 한정되지 않는다. 단순 빈곤뿐 아니라 금전 착취를 포함한 경제적 요인도 탈가정의 원인이 된다. 가정 내 다양한 억압을 이유로 탈가정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통금과 같은 생활 전반에 관한 통제, 본인의 성 정체성이나 종교적 관념 등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즉 탈가정은 삶에서의 자기 선택권을 되찾기 위한 일종의 투쟁인 셈이다.      


  자립(自立);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섬

  가정을 나와도 생을 쫓아야 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 탈가정 이후 청년들은 다양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청년자립TF/경제적·물리적·심리적 주거취약 청년가구 추산ⓒ이데일리


  다수의 탈가정 청년이 겪는 어려움은 정서적 영역으로 나타났다. 상단 좌측 사진 자료에서 ‘정신적으로 우울감, 불안 증세 등을 겪음’ 항목이 가장 많이 응답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경제적 영역이 뒤를 이었다. ‘소득과 자산 부족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함’과 더불어 ‘금전적 빚을 지거나, 신용불량 상태에 처함’ 항목 또한 많은 응답을 받았다.³ 한 탈가정 대학생은 “탈가정 직후인 2020학년도 1학기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학교를 휴학하고 일주일에 알바로 40시간을 보내고 있다. 원래는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는데, 지금은 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⁴ 저마다의 이유로 탈가정을 선택했지만 눈앞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살면서 보고자란 이상적인 독립과 탈가정 현실의 간극을 실감한다. 

  사회는 성인이 되어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을 나와 따로 거처를 마련하는 것을 ‘출가’ 혹은 ‘독립’이라 부른다. 독립한다고 해도 가족과의 연은 끊어지지 않는다. 그저 거주지가 나뉘었을 뿐 가족과 경제적·정서적 등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독립은 사회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말하는 자립이다. 이러한 형태의 독립은 다양한 방면으로 가족의 도움을 받는다. 그 예로 독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금전적 지원을 받거나 정서적 안정을 얻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상적인 독립은 마치 감독이 액션을 외치기 직전처럼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에서 시작하는 셈이다. 반면 탈가정의 경우, 가족과의 관계 자체가 단절되므로 독립 준비 과정에서 유의미한 도움을 받기 어렵다. 탈가정은 대개 긴박하게 이뤄진다. 독립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가정·가족과 단절을 결심한다.      


  최근 몇 년간 청년정책이 강조되어 다방면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년정책 대상은 사회가 그리는 보편적 가정에 속한 ‘표준’ 청년이다. 다시 말해 탈가정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정책의 사각지대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해당 예시는 ‘국가장학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가장학금은 가구원의 소득인정액⁵을 기준으로 학자금 지원구간을 구분한다. 나눠진 구간에 맞춰 장학금 금액이, 나아가 수혜 여부가 달라진다. 가족과 단절했음에도 가족 구성원의 소득 때문에 국가장학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생기는 것이다. 복지 사각지대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 청년은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알아봤던 경험을 떠올리며 “지난해 여름, 거주지 행정복지센터에 방문해 기초생활수급 신청이 가능한지 알아봤지만, 만 30살 미만은 단독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현재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원가정과 생계를 달리하는 만 30살 미만의 미혼 청년을 ‘보장가구’로 인정하지 않는다.⁶ 예외적으로 원가정에 대한 고려 없이 보장가구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주거를 달리하는 30세 미만 미혼’임과 동시에 ‘기준 중위소득 50% 이상의 소득활동’을 해야만 한다. 기타 가정폭력 등의 사유로 개별 가구 보장이 필요한 경우에도 개별 보장이 가능하나, 가정폭력 입건 또는 접근금지명령 이력 등의 증거가 요구된다.⁷ 무엇보다도 두 경우 모두 보장기관⁸이 수혜자가 원가정과 생계를 달리하는 것으로 판단해야만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혜가 가능하다. 이와 같은 제도적 사각지대는 탈가정 청년들이 공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탈가정 청년은 ‘청년’임과 동시에 '탈가정'이라는 상황에 놓인다. 때문에 청년 문제와 더불어 가정 문제라는 이중고를 겪기 쉽다. 그러나 현재 복지체계 대부분은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생애주기를 살아가는 청년을 전제한다. ‘청년’ 하나 붙인 허울뿐인 정책은 탈가정 청년들의 근본적인 어려움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정상가족에서 벗어난 이들은 복지 체계에서 쉽게 배제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초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복지제도의 존재 이유가 무색한 현실이다.      


  生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집을 나온 청년들은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탈가정 청년이 처음 의제화된 이후 지속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람들에게 호명되는 일이 적어 개념 또한 생소하게 다가올 뿐이다. ‘탈가정’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이들의 선택은 자립 혹은 가출로 치부된다. 이들의 삶은 마땅히 수식될 표현이 있음에도 불리지 못한 채 가정에서 벗어난다.     


  ‘완전한 단절이 이뤄져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⁹     


  위 문장은 한 청년의 탈가정 계기 중 일부다. 우리 사회가 바라 마지않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과 동떨어진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탈가정 청년이 증가하는 현상에 따라 관련 문제 연구와 지속적인 의제화가 필요하다. 다양한 생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 이와 같은 청년들이 속할 테두리가, 마땅히 보호받을 체계의 도입이 시급하다.     


  무한한 삶의 형태 중 비슷한 테두리를 지닌 생들이 모여 하나의 범주가 된다. 가족에서 나아가 가정과 단절한 삶의 형태가 청년을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상적인' 청년의 삶만 그릴 수는 없다. 사회가 그리는 이상적인 출가는 어떤 청년들만을 포용하는 것일까. 명명(命名)되었으나 호명(呼名)되지 않는다. 탈가정 청년들은 본인 삶의 형태를 무어라 정의할 수 있는 합의된 개념조차 없이 논의에서 빗겨난다. ‘표준’이 아닌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¹ 아무런 괴로움이나 고통 없이 안락한 곳

² 본 글에서는 탈가정을 원가족과의 단절과 더불어 법적 배우자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보았다.

³ 해당 설문조사는 복수 응답이 가능했고, 응답자 1명당 평균 2.63개의 항목을 선택했다.

⁴ 고병찬, 「‘탈가정 청년’ 아시나요…‘생존’ 위해 집 나왔지만 ‘독립’ 어려워」, 『한겨레』, 2022.04.05.  

⁵ 가구원의 소득·재산·금융자산·부채 등을 반영해 결정된다.

⁶ 고병찬, 「‘탈가정 청년’ 아시나요…‘생존’ 위해 집 나왔지만 ‘독립’ 어려워」, 『한겨레』, 2022.04.05.

⁷ 이 외에도 30세 미만의 미혼모·부인 경우, 30세 미만의 중증장애인으로 탈시설 또는 자립을 위해 부모와 주거를 분리하는 경우 원가정에 대한 고려 없이 기초생활수급 신청이 가능하다. 단, 본문과 마찬가지로 보장기관이 수혜자가 원가정과 생계를 달리하는 것으로 판단할 경우에 한한다.

⁸ 보건복지부장관, 국토교통부장관, 교육부장관,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 등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 따라 급여를 실시하는 사람을 말한다.

⁹ 고병찬·김다영, 「“탈가정을 결정하기까지 정말 고민이 많았죠”」, 『연세춘추』, 2021.06.01. 




참고문헌

고병찬, 「‘탈가정 청년’ 아시나요…‘생존’ 위해 집 나왔지만 ‘독립’ 어려워」, 『한겨레』, 2022.04.05. 

고병찬·김다영, 「“탈가정을 결정하기까지 정말 고민이 많았죠”」, 『연세춘추』, 2021.06.01. 

국가법령정보센터, 「2022년 기준 중위소득 및 생계·의료급여 선정기준과 최저보장수준」

국가법령정보센터, 「기초생활보장」

김선기, 「[숨&결] 탈가정 청년을 아십니까?」, 『한겨레』, 2021.01.27. 

김선기 외 4인, 「청년정책 사각지대 발굴을 위한 ‘탈가정 청년’ 실태조사」, 『2020 서울특별시 청년청 연구보고서』, 2021.01.

박종화, 「주거취약 청년가구 최대 181만가구」, 『이데일리』, 2022.06.22. 

보건복지부, 「2022년 국민기초생활보장 사업안내」, 2022.01 

보건복지부 기초생활보장과, 「2021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현황」, 2022.07.

보건복지부 혁신행정담당관, 「2021 보건복지부 성과관리 시행계획(수정)」, 2021.10.

서울특별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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