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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맥교지편집위원회 Jun 16. 2023

[84호][사회] SAVE! ME?

HB

 


 휴대전화 액정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내부 저장소의 남은 공간이 1% 이하입니다.” 마지못해 갤러리 앱으로 들어가 사진을 지운다. 지울 사진을 고르던 것도 잠시, 새록새록 솟아나는 추억에 잠긴다. 이 사진들을 어떻게 지울 수 있단 말인가. 클라우드 계정을 만들고 하드디스크로 파일을 백업해봐도 용량은 늘 부족하다. 사진을 지울 때가 아니고서야 갤러리에 들어오는 일은 없지만, 지우는 건 어렵다. 방치된 폴더에 빼곡히 저장된 사진들. 다른 폴더에서도 지우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지우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EBS 다큐멘터리 <다큐 시선 - 마음의 그늘, 저장강박>에서 디지털 저장 강박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EBS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사례 하나가 눈에 띈다.1) 40여 개의 하드디스크와 11개의 휴대전화. 이 중 6개의 휴대전화에는 여전히 통화 요금이 청구된다. 2천만 원어치의 하드디스크에는 120TB2) 에 달하는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다. 영상, 사진, 문서 등 파일의 수만 20만 개 이상이다. 다락방에는 구형 컴퓨터 부품과 케이블이 자리 잡고 있고, 구동조차 되지 않는 디스크들이 수두룩하게 쌓여있다. 다큐멘터리는 이를 ‘디지털 저장 강박’이라 소개한다.

 저장 강박은 ‘가치가 없거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버리기를 기피하고, 지속적으로 획득하는 강박적 사고 및 행위’3) 를 의미한다. 통상적으로 저장 강박은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저장행위를 뜻하지만, 최근에는 그 공간이 온라인까지 확대되었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불필요한 데이터를 지우지 못하고 새로운 데이터를 축적하는 디지털 저장 강박이 늘어났기 때문이다.4) 저장 강박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확장된 데에는 기술 발전의 영향이 크다. 저장 공간의 한계로 인해 데이터 삭제가 필수였던 과거와 달리, 저장 매체의 종류와 용량이 늘어나며 삭제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었다. 저장 공간을 늘리는 비용이 저렴해지자 삭제보다 용량 구매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증가했다.5) 데이터 저장을 위한 비용과 물리적 공간이 줄어들면서 기술 발전이 저장 강박을 부추기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SAVE, DATA!

 이른바 빅데이터의 시대. 현대 사회는 데이터 풍요의 시대를 넘어 데이터로 직조된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래알처럼 곳곳에 퍼진 데이터는 우리의 행적을 기록하며 일상생활을 지탱하고 있다.6) 문자로 전송되는 안전안내 서비스, 포털 한구석을 차지하는 미세먼지 수치와 교통상황 등 일상의 대부분은 데이터에 의존한다. 2022년 10월에 발생한 ‘카카오톡 먹통 사태’만 봐도 데이터와 일상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데이터의 영향력은 데이터 활용 능력이 21세기 필수 역량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2022년 12월에 데이터 유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세계 최초로 ‘데이터 거래사7) ’를 양성했고,8) 서울시는 빅데이터 분석기술을 교육하는 ‘빅데이터 클라우드 캠퍼스’를 구축했다.9)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역시 일반화되고 있다. 구매패턴 데이터, 추천 알고리즘 서비스 등을 통해 사용자별 맞춤 서비스가 제공되면서 사용자의 의사결정 범위는 축소되었다. 보고 읽고 구매하는 등의 의사결정이 데이터에 좌우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데이터 저장 강박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데이터가 삶의 기반이 되는 시대에서 데이터의 양은 권력의 정도와 비례한 것처럼 여겨진다.10) 디지털정보 관리업체 베리타스가 발표한 ‘데이터 적체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정보기기 사용자 10명 중 9명이 데이터를 삭제하지 못하고 쌓아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업에 종사하는 정보기기 사용자 중 88%는 “회사가 모든 데이터를 무조건 저장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응답했다. 그중 53%는 데이터를 쌓아두는 이유에 대해 “나중에 참조할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11) 다량의 데이터는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는 방파제인 셈이다. 데이터가 곧 생존과 경쟁의 열쇠가 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생존전략’으로서 저장을 택한다.

 눈치챘겠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어폐가 존재한다. 바로 저장 강박은 ‘불필요한’ 대상을 저장하는 행위로서, 그 저장행위가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구나 저장 강박은 일정한 분류 규칙이 없어 저장 대상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12) 즉 데이터가 미래를 대비해주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대상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거나, 기억하더라도 다시 꺼내 보지 않는다면(혹은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가 저장하는 이유는 뭘까? 왜 우리는 불필요한 데이터를 삭제하지 못하고 자꾸만 새로운 데이터를 축적하는 걸까?


 SAVE, ME!

 저장의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유의 의미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다.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은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의 의미를 설명한다. 소유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 사물과 관계한 것이다. 소유적 실존 양식에서의 인간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13) 예컨대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라는 진술은 주체인 ‘나’와 객체인 ‘무엇’ 간의 관계를 드러낸다. 이 진술은 ‘나’가 ‘무엇’을 영속적으로 소유할 거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진다. 객체를 소유하고 있음을 빌려서 나의 자아를 표현하며, 소유물을 나의 실체 근거로 삼는다.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나’이다”라는 개념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나’가 ‘무엇’을 소유하는 동시에 ‘무엇’이 ‘나’를 소유하는 관계가 형성되며, 주체와 객체 모두 사물화된다.14) 만약 소유물을 잃는다면 어떨까? 나의 존재는 표현되지 못하고 파괴될 것이다. 하지만 소유란 언제라도 빼앗기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유한한 행위이므로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이 해체되는 결과를 맞게 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지만, 더 많이 소유할수록 소외되는 악순환이다.

 다른 측면에서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유한함에 대한 불안이다. 작업 파일 초본을 지울 때, 묵혀뒀던 파일을 지울 때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내가 공들였던 시간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내 추억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 우리는 불완전한 기억을 시간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끊임없이 저장하고 백업하고 보관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파괴되며 사라진다. 이름을 새겨놓은 바위가 풍화하고, 놀이기구 한편에 적어둔 이름이 오래된 페인트와 함께 떨어지듯 말이다. 우리는 데이터와 소유물이 불멸할 거라는 그릇된 환상 속에서 거대한 피라미드에 육신을 안장하는 대신, 데이터 속에 기억을 안장한다. 하지만 ‘기록된 기억이 외화(外化)된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렸으므로, 나의 기억 능력은 나를 떠난 셈이다’.15) 어디 그뿐일까. 데이터가 불멸한다 해도 그것을 기억하고 추억할 내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과거의 기억은 의미를 상실한다.

 두 번째는 불확실함에 대한 불안이다. 미지의 존재가 불안감을 주는 것과 달리, 소유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16) 이러한 안정감과 안도감은 감정적 애착으로 이어지며, 소유자와 저장 대상을 정서적으로 연결해준다. 따라서 소유자는 대상을 버리는 행위를 삶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고통으로 인식하게 된다.17)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대상을 떠나보낼 때는 일종의 애도 과정이 필요하다. 마음껏 슬퍼하고, 상황을 받아들이고, 쏟아부은 에너지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언제나 순탄할 수는 없다. 상실의 충격이 큰 나머지 애도 과정을 거치지 못하기도 한다.18) 이 경우 고통은 가중된다. 결국 상실의 아픔을 차단하기 위해 처분 자체를 회피하게 되며, 저장 강박을 초래할 수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상실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인간은 (기능적 소유의 범위를 넘어선) 소유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불가능하진 않으나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벗어나기 어렵다. 소유를 강조하고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소유는 곧 존재의 본질로 여겨지기 때문이다.19) 소유를 지상 목표로 삼는 이윤추구 사회에서 저장 강박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분별하게 저장된 자료들을 삭제하면 저장 강박은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무턱대고 자료를 삭제하는 것은 되레 자신의 결정권을 박탈하고 정서적 혼란을 가중하는 일이다. 삭제와 처분보다 중요한 것은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택은 상실을 전제하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택과 마주하게 된다. 결코 선택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말했던 한 철학자가 떠오른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인간은 우선적으로 미래를 향해서 스스로를 내던지는 존재”20) , 즉 ‘기투(企投)’를 통해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구상하고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실존의 불안을 겪게 되지만, 이는 우리의 자유와 가능성을 드러낸다. 불안은 행동을 망설이게 하는 요소가 아닌, 행동 자체의 일부분이다.21)  


 필자는 글을 작성하며 파일 정리를 시작했다. 존재 자체를 잊고 있던 파일이 대부분이었고, 이별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공중으로 흩어지는 파일을 보며 깨달은 것이 있다. 추억을 파일로 기록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파일에 맞춰 추억을 만들어냈던 거라고. 추억은 포착될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이라고. 당시의 상황을 소생시키는 파일이 있는가 하면 그저 정지된 흔적에 불가한 파일도 수두룩했다. 파일의 삭제와 함께 기억도 사라질 거란 걱정과 달리 불필요한 파일이 사라질수록 기억은 또렷해졌다. 저장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선택하고, 더 자유롭게 존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명멸하는 추억에 갇히지 않기를, 상실을 마주하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기를, 우리가 유한한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기를 응원한다.



참고문헌

강수연, 「핸드폰 ‘사진’ 못 지우는 것도 병 ‘디지털 저장강박증’ [헬스컷]」, 『헬스조선』, 202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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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영, 「세계 첫 '데이터 거래사' 양성…디지털 시대 수놓는다」, 『전자신문』, 202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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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차경아 옮김, 『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991.

이은경·전중옥, 「죽어도 못 버리는 사람의 심리」, 『마케팅연구』, 제28권 제6호, 2013.

임미나, 「서울시, 빅데이터 분석기술 온라인교육 제공」, 『연합뉴스』, 2021.04.12.

장 폴 사르트르, 박정태 옮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이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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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환, <다큐 시선 - 마음의 그늘, 저장강박>, 14회, EBS 다큐, 2017.06.16.

EBS, <유발 하라리 - 신년특집 유발하라리에게 듣는다 4강 데이터 권력과 민주주의>, EBS 위대한 수업 GREAT MINDS, 2022.01.07.

「2023년 데이터거래사 교육 신청 안내」, 『DATA ON-AIR』, n.d., (2022.01.15.).


1) 정윤환, <다큐 시선- 마음의 그늘, 저장강박>, 14회, EBS 다큐멘터리, 2017.06.16.

2) 테라바이트(terabyte). 1테라바이트는 약 1조 바이트(byte)에 달한다.

3) 이은경·전중옥, 「죽어도 못 버리는 사람의 심리」,『마케팅연구』, 제28권 제6호, 2013, (112쪽).

4) 강수연,「핸드폰 ‘사진’ 못 지우는 것도 병 ‘디지털 저장강박증’ [헬스컷]」, 『헬스조선』, 2022.07.19.

5) 심재민, 「필요 없는 파일도 지우지 못하는 ‘디지털 저장강박증’...비움이 필요한 시대 [지식용어]」, 『시선뉴스』, 2022.08.01.

6) 미국 시장조사 기관 IDC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전 세계 디지털 정보량은 90ZB(zettabyte) 수준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전체 해변 모래알 수의 약 1,282배에 달한다고 한다. (김재수, 「데이터 잘 다루는 사람이 승자 되는 시대 왔다」, 『중앙일보』, 2022.01.10.)

7) 데이터 거래사는 데이터 거래의 수요 탐색, 데이터 거래 중개·알선, 데이터 품질관리, 데이터 거래 시장의 조사·분석업무 등 데이터 거래와 관련된 전반적인 부분을 지원한다. (「2023년 데이터거래사 교육 신청 안내」, 『DATA ON-AIR』, n.d., (2022.01.15.).)

8) 송혜영, 「세계 첫 '데이터 거래사' 양성…디지털 시대 수놓는다」, 『전자신문』, 2022.12.27.

9) 임미나, 「서울시, 빅데이터 분석기술 온라인교육 제공」, 『연합뉴스』, 2021.04.12.

10) 21세기에는 데이터가 권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한곳에 모을 수 있는 데이터의 특성에 의해 하나의 정부나 기업 등은 전 세계 데이터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는 정보와 데이터가 불균형하게 흐르고, 하나의 조직이 데이터를 독점하는 상황은 민주주의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EBS, <유발 하라리 – 신년특집 유발 하라리에게 듣는다 4강 데이터 권력과 민주주의>, EBS 위대한 수업 GREATMINDS, 2022.01.07.)

11) 김재섭, 「한국인들, 데이터 저장강박증 심하다」, 『한겨레』, 2016.12.07.

12) 장윤미, 「[장윤미의 문화톡톡] 저장이 생존을 위협할 때」,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0.10.05.

13) 에리히 프롬, 차경아 옮김, 『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991, (46쪽).

14) 위의 책, (115-116쪽).

15) 위의 책, (56쪽).

16) 위의 책, (157쪽).

17) 이은경·전중옥, 앞의 글, (117-118쪽).

18) 장윤미, 앞의 글.

19) 에리히 프롬, 앞의 책, (33쪽).

20) 장 폴 사르트르, 박정태 옮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이학사, 2008, (34쪽).

21) 위의 책,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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