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라노
아, 또다. 아빠가 좀비로 보인다. ‘아빠’라고 칭하기도 두려운 그것이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쳐다본다. 이 기이한 현상은 산재 환자로 10년간 병원에 있던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단순한 착오일까, 간병으로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보이는 헛것일까. 아빠는 3초 남짓한 찰나의 순간에 좀비와 사람을 오간다.
오늘도 엄마는 아빠의 식사를 챙기느라 바쁘다. 시선을 두기 싫어 조용히 밥만 먹고 있는데, 엄마가 말을 걸어온다.
“아빠 물”
못 들은 척해본다.
“아빠 물”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쿵쿵대는 발걸음으로 정수기 앞으로 가, 대충 찬물을 따르고 엄마 앞에 내려놓는다.
“미지근한 물이라고. 몇 번을 말해. 다시 받아 와”
지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 ‘아빠’ 한 마디에 난 엄마의 요구에 응하게 된다. 언제나 엄마를 돕는 건 내 몫이다. 오빠가 있지만, 엄마는 오빠에게 돌봄을 강요하지 않는다.
집을 벗어나고 싶다. 내 눈앞에 좀비가 있다.
사랑하지만 떠나고 싶다. 그럴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 영화 <그리고 집> 감독 의도 인용
첫 번째 장
2019년 1월, 첫 막을 연 서울여성독립영화제는 남성 중심적인 영화계 속 여성 독립 영화인들의 입지 확장을 위해 만들어졌다. 서울여성독립영화제는 “여성이 ( ) 만든다”라는 문구를 표어로 삼아 활동하며, 여성이 한국 영화계 내 변화를 만들어 낸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위의 모토에 따라, 영화제에서는 여성과 관련된 소재를 차용한 영화만을 상영한다.
‘평등’은 서울여성독립영화제의 중요한 신조이다. 영화제 책자의 맨 뒷장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게재되어 있다.
<평등한 영화제를 위한 약속>
-우리는 모든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우리는 나이, 성별,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신체조건, 국적, 피부색, 출신 지역, 혼인 여부, 가족관계 등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평등합니다.
-우리는 불편함을 표현하는 일을 분위기를 망치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올해 열린 제 5회 서울여성독립영화제에서는 ‘평등한 영화제’에 걸맞은 영화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지금부터 3편의 영화를 통해 서울여성독립영화제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엄마 극혐
<엄마 극혐>, 제목부터 강렬하다. 입 밖으로 꺼내기 망설여지는 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딸로 살아봤다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봤을 법하다. 엄마의 말이 지긋지긋해지는 순간, ‘미움’이라는 감정은 마음 한 귀퉁이를 불쑥 치고 올라온다. 영화는 이런 감정들을 무겁지 않게 담아낸다. 영화감독이 꿈인 딸 가영과, 그런 가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엄마가 등장한다. 가영과 엄마는 끊임없이 부딪히고 대립한다. 둘의 대립은 가영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엄마에게 들킨 장면에서 더욱 심화한다. 그들이 내뱉는 문장들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시커먼 애들이랑 다니면서 담배나 배우고.”
“엄마는 왜 맨날 사람을 무시해? 나보다 내 인생을 더 응원해 줘야 하는 사람이 엄마잖아.”
언젠가 엄마에게 들어본 적 있는 듯한 단어들, 엄마에게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둘의 관계에는 싸움과 아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모녀는 앙숙처럼 보이지만, 엄마의 시선 끝에는 언제나 딸이 있다. 늦게 들어온 딸에게 일찍 들어오라며 잔소리하는 것도, 딸이 먹을 치킨을 남겨놓는 것도 언제나 엄마였다. 동기와 선배들이 바쁘다며 가영의 촬영을 도와줄 수 없다고 할 때, 엄마는 흔쾌히 가영을 거든다. 그는 언제나 집에, 가영의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곳곳에 엄마의 돌봄과 애정이 숨어있다. 가영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엄마를 향한 미움을 가감 없이 드러내지만, 엄마는 딸의 영화를 본 후 웃으며 ‘너도 극혐이야’라는 농담을 던진다. 미워하고 상처받는 관계이지만, 엄마는 딸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집
주인공 수진은 집으로 가는 길에 노인 폭행 사건을 목격한다. 집에는 병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빠와 그런 아빠를 돌보는 엄마가 기다리고 있다. 때마침 TV에서 수진이 목격했던 사건이 나온다. 노인이 일방적인 폭행을 당한 사건이지만, 뉴스는 노인을 ‘좀비’라 칭하며 오히려 노인이 청년을 공격한 것처럼 보도한다. 그 뉴스 이후 수진은 아빠가 좀비와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좀비’ 이미지는 우리 사회 내 돌봄이 필요한 존재에 대한 혐오와 맞닿아 있다. 좀비는 아무런 말도, 사고도 할 수 없는 ‘본능’에만 충실한 존재이다. 이들의 모습은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 병상에 누워 있는 수진의 아빠를,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어 밖을 방황하는 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서는 노인과 환자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가부장적인 가정에 대한 문제점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가부장적인 가치관은 수진의 엄마를 통해 나타나며, 이것은 수진과 엄마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엄마는 수진의 오빠에게 돌봄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빠는 언제나 집에 늦게 들어오며, 항상 이어폰을 착용한다. 오빠의 늦은 귀가와 이어폰 착용은 가족 간의 소통 단절을 드러낸다. 엄마는 오빠에게 돌봄을 강요하지 않고, 수진은 자신이 아니면 엄마 혼자 아빠의 간호를 떠맡아야 한다는 부담에 사로잡힌다.
수진에게만 돌봄을 강요하는 모습, 워킹 홀리데이에 가려는 수진을 향한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니?”, “가족을 버리고 간다는 거야?”, “아빠 소변 통이나 비워” 등의 폭언과 무시는 딸의 희생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가부장 사회를 반영한다.
실금
정수기 관리 매니저인 수희는 고객의 집에서 본인에게 요실금이 있음을 알게 된다. 직업 특성상 화장실에 자주 가기 힘든 수희는 요실금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한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운동이 최선의 치료라 말하고, 일하느라 운동할 시간이 없는 수희는 정수기 관리 일을 그만둔다. 때마침 친하게 지냈던 고객인 옥순이 치매로 인해 간병인을 구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수희는 옥순의 간병인 일을 맡게 된다.
수희는 본인의 오줌이 뜻하지 않게 샌다는 사실을 알지만, 선뜻 요실금 기저귀를 구매하지 못한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 결국 집어 든 건 생리대다. 수희가 몸의 변화를 당황스러워하고 받아들이지 못함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늙어감에 따라 생기는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를 부끄러워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수희가 병원에서 자가 진단 표를 숨기기 바빴던 것도, 기저귀를 집지 못했던 것도 요실금을 부끄러운 질병으로 여기는 사회를 의식하여 나온 행동이다.
두 번째 장
세 영화는 다양한 각도로 돌봄을 조명한다. <엄마 극혐>에서 돌봄은 사랑에 기반한 것으로 ‘모성애’를 강조한다. ‘힘들 때 나를 도와주었던 것은 엄마’라는 메세지를 전달하려던 감독의 의도대로, 상호 돌봄보다는 엄마의 일방적 돌봄이 잘 나타나 있다. 다툰 뒤에도 딸의 치킨을 챙겨놓는 장면처럼 엄마는 딸과의 관계가 틀어져도 끊임없이 딸을 보살핀다.
<그리고 집>에서는 가부장제를 통해 여성에게 돌봄이 강요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엄마 극혐>과 다르게 <그리고 집>은 돌봄을 억압적으로 표현한다. ‘가족 내 환자’라는 소재를 통해, 돌봄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그린다.
<실금>에서는 경제적 사정으로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실금이 있음에도 일을 쉴 수 없는 주인공을 통해 돌봄의 경제적 측면이 강조된다.
돌봄은 여성의 전유물이자,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여겨졌다. 돌봄을 소재로 했던 그동안의 영화들 또한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여성의 모습을 그려내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속 영화들이 말하는 ‘돌봄’은 숭고하지만은 않다. 불편하고 강압적인 것이자 생계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평등한 영화제를 위한 약속>의 ‘우리는 불편함을 표현하는 일을 분위기를 망치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라는 구절과 연결된다.
엔딩크레딧
서울여성독립영화제는 영화제 구성에도 ‘평등’의 가치가 잘 실현되었다. 영화가 막을 내린 후에 진행되는 ‘관객과의 대화’는 관객과 감독, 배우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통해 관객은 감독에게 직접 궁금한 점을 질문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연출자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질의응답을 통하여 감독과 관객이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공적인 장에서 모두가 방해받지 않고 혐오와 차별에 반대할 수 있다는 점도 서울여성독립영화제의 독특한 이점이다. ‘평등’한 영화제에 참가해 차별에 목소리를 내는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혐오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