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아침 일곱 시 반, 알람을 듣고 눈을 뜬다. 학교에 가는 날인 건 맞는데 첫 수업이 뭐였더라. 직접 짠 시간표지만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결국 오늘도 시간표를 확인하기 위해 에브리타임 앱을 누른다. 메인 화면이 열리자 눈에 들어오는 건 ‘비밀게시판’ 외 여타 게시판의 이름 옆에 놓인 글의 제목들. 크게 관심 가는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하단의 바를 잘못 누르기라도 하면 바로 ‘HOT 게시판’이 보인다. 간밤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결국 참지 못하고 들어가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아, 에타 망했으면 좋겠다!
에브리타임 규칙
3월의 에브리타임은 꽤 소란하다. 신입생이 합격 인증을 받아 에브리타임에 입장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3월은 ‘새내기’에게 에브리타임의 여러 규칙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의 주요 논제는 ‘퇴행어 사용 금지’ 규칙이다. 의문을 느끼고 반발하는 새내기와 고수해야 한다는 재학생 간의 열띤 논쟁은 ‘연례행사’라고 불릴 정도다. 이런저런 갑론을박이 존재하지만, 결말은 항상 같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라.’ 이런 귀결은 신입생들의 반발과 의문에 일축으로 답하는 에브리타임의 주된 분위기에서 비롯된다. 물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이어져 온 ‘연례행사’로 누적된 피로감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개선책이나 발전 가능성을 이야기하지 않는 일방적 규칙을 토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설득력을 잃은 낡은 담론에는 새로운 의견을 위한 자리가 없다. 기존의 질서만을 주입하는 태도는 먼저 공간을 점유한 이들의 권력처럼 작용한다. 하지만 ‘새내기 게시판’은 새로운 구성원들이 모여 직조해 나가는 공간이다. 새로운 규칙과 문화를 통해 서로 소통한다. 게시판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질서를 따를 것을 요구하는 문화는 새로운 논의의 가능성을 차단할 뿐이다. 이 논쟁에서 규칙이 만들어진 시기와 현재의 시점 차이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다른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폐쇄적 분위기는 다양성과 담론장을 훼손하고, 혐오의 재생산과 정당화로 이어진다.
사회는 규격에 알맞은 발화만을 요구한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발화에서 벗어난 ‘하등한 발화’는 공적 영역에 오를 수 없다. 따라서 여성은 공적 발화를 위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남성의’ 언어, 즉 ‘여성적이지 않은 발화’를 연습해야 한다. ‘쿠션어’, ‘퇴행어’로 일컬어지는 ‘여성성’은 ‘남초’ 커뮤니티에서 조롱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조롱과 제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초’ 커뮤니티인 여대의 에브리타임에서도 반복된다. 퇴행어 사용 금지 규칙은 퇴행어가 여성을 무해한 존재로 포장해 자신의 지위를 낮춘다는 논리와 연결된다. 이는 쿠션어, 퇴행어를 여성성의 산물로 바라보고, 여성성을 남성성보다 하위의 것으로 바라보는 여성혐오적 시각과 맞닿아 있다.
여성의 행동을 제한하는 표현 방식은 분명히 변화해야 하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우리는 왜 우리를 단속해야만 할까? 여성을 가두는 사회 구조나 직접적으로 공격을 가하는 남성의 행동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바꾸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여성이 모인 에브리타임 공간에서 ‘쿠션어’ 사용을 금지하는 것운 유용해 보일 수 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표현 방식만으로 모든 억압과 차별을 없애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어떠한 주제에 대한 발화를 막는 것만으로 성평등을 이룩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자. 그 답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을 것이다. 특정 행위를 금지하기만 한다면 그 행위의 대안적 표현 방법은 영영 논의될 수 없다. 오히려 맥락이 거세된 채 금지되는 ‘표현’들은 갈 곳을 잃고 은닉될 뿐이다. 결국 우리의 다양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금지되어 온 발화에 대해 끊임없이 언쟁하며 새로운 사유를 쌓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대학 내 구성원들이 가진 입체성과 위치성을 고려하기 위한 방식을 고민해 보아야 할 때다.
에브리타임 혐오
에브리타임에 심심찮게 나타나는 중국인·조선족 혐오를 보자.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그들’은 당연히 ‘우리’의 공간에서 몰아내야 할 존재로 상정된다. 이러한 타자화된 언어를 표출하는 것은 혐오의 역치를 낮춘다. 예를 들어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이다’의 줄임말인 ‘착짱죽짱’은 에브리타임 이외의 온라인 공간에서도 자주 볼 수 있을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이처럼 혐오는 단순한 발화 자체로 끝나지 않으며, 양자의 공간을 점유하고 확산한다. 그러나 자정은 쉽지 않다. 중국인이나 조선족을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사람을 그 당사자라고 여기며 조롱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혐오하고 공격해도 된다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반복되는 혐오 표출과 미흡한 자정능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다양한 색채를 숨기게 된다.
에브리타임을 이상적인 담론장으로 만들 수는 없다. 에브리타임 역시 “참여보다는 퍼뜨리기, 토론보다는 글 올리기, 깊은 대화보다는 얕은 촌평에 유리한 방식으로 설계”1) 되어 있는 소셜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기계, 권력, 사회』의 저자 박승일은 인터넷 권력은 ‘환경관리권력’과 ‘정신관리권력’의 형태로 작용한다고 말한다.2) 인터넷은 일상적 환경이 인터넷의 상시적·잠재적·자동적 매개 안에 있도록 구성하고 관리하며, 이러한 관리는 인터넷 사용자 중 특정한 개인의 정신을 특정한 방향과 형태로 인도한다.3)
여대, 그러니까 학교라는 공간은 에브리타임의 상시적·잠재적·자동적 매개 안에서 구성·관리된다. 이러한 관리는 학교 구성원 각각의 정신이 일정한 궤도로 옮겨 가게 만드는데, 이 현상은 앞에서 말한 ‘규칙’과 무관하지 않다. 각각의 규칙들은 에브리타임이라는 온라인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에브리타임을 이용하며 규칙과 함께 혐오와 규제를 학습한다. 이용자들은 규칙을 어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의심하고, 생각과 행동을 제한한다. 이러한 제한은 개개인이 자신을 표출하는 방식을 망각하게 하고, 자신의 다양성을 억압받는 상황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단순히 에브리타임에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내재화 과정을 겪는 것이다. 인터넷의 원리는 파놉티콘처럼 작동해 에브리타임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자기검열을 수행하게 한다. 에브리타임에 산재하는 혐오들이 뻗어나가 물리적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비만인, 장애인,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이주민, 노동자······. 이렇듯 다양한 혐오는 검열의 기저에 자리하기에, 특정한 약자성에 대한 혐오가 일단 촉발되면 자정되지 않고 에브리타임에서의 정당화 및 재생산을 통해 현실 공간으로까지 이어진다.
에브리타임 담론장
사람들은 온라인이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자정이 불가능한 온라인은 절대 건전한 담론장으로 남을 수 없다. 일례로 ‘카이로의 봄’이라고 불리는 이집트 민주화 혁명의 주역 와엘 고님(Wael Ghonim)은 일찍이 “만약 사회를 해방시키고 싶다면, 인터넷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한 적 있다. 그러나 그는 불과 5년 만에 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사회를 해방시키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인터넷을 해방시켜야 한다”라고 말하게 된다.
고님이 인터넷의 잠재력과 효용을 재고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국가권력의 고문으로 숨진 젊은 남성의 이야기를 알게 된 그는 익명으로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다.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확산되던 시기였고, 이후 튀니지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자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고님은 페이지에 가입한 이들에게 카이로 거리에 나가 부정부패와 독재에 맞서자고 독려했다. 행사에 참여하겠다는 답장이 밀려들자 사람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이 마음을 모으고 행동한 배경에는 페이스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봉기를 가능케 한 페이스북은 독재 지배층뿐만 아니라 마음을 응집했던 사람들 역시도 분열시키고 말았다. 혁명 이후, 그 힘과 불꽃은 제도권 내의 정치로 안착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정치적 투쟁이 불러온 양극화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증폭되었다. 합의에 기반한 정치 대신 편향이 그 자리를 채웠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소셜 미디어는 “잘못된 정보와 루머, 울림방(에코 효과를 내는 방), 증오의 말들이 쉽게 확산되도록 할 뿐”이었다.4) 결국 첫 민주 선거로 뽑혔던 대통령은 대중에게 사임을 요구받다 군에 의해 축출되었다.
고님은 이와 같은 혁명 이후의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고 몇 년간 완전히 침묵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혐오를 재생산하지 않는 ‘건전한 담론장’을 세워야 한다. 우리에게는 현실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수평으로 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담론장에서는 목소리의 무게를 맞춰 모든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줄곧 말해왔듯 에브리타임을 비롯한 온라인 공간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런 기능을 위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니 우리의 담론장은 오프라인에 건설되어야 한다. 실체 없이 부유하는, 손으로 움켜쥘 수 없는, 서로를 상상할 수 없는, 직접 닿을 수 없는 온라인에서 만들어지는 말과 생각은 오프라인에 침투해 영향을 끼친다. 온라인 담론장에서는 자유로운 의견 공유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지만, 안전과 존중을 담보할 수 없는 공간에서 자유란 없다.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공간은 언제가 되었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어디서 만나나요?
화면 너머에는 사람이 있다. 이 자명한 사실을 무시하게 만드는 온라인 공간에서는 덕성여대 학우들이 아닌 ‘익명1’과 ‘글쓴이’로 존재하게 된다. 동문이라는 연결된 감각은 너무나도 쉽게 파괴되고, 감정과 어조를 느낄 수 없는 활자는 피상적인 사고와 관계만을 남긴다. 모두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유할 능력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내 앞에 있는 그가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해야 한다. 타인의 배경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배려할 줄 아는 힘을 길러야 한다. 다양성의 실현은 이러한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 이제 서로를 마주 볼 시간이다.
1) TED. [TED]. (2016.02.05.) Let's design social media that drives real change | Wael Ghonim [Video]. YouTube. https://youtu.be/HiwJ0hNl1Fw.
2) 박승일. (2021) 기계, 권력, 사회. 고양:사월의책
3) 위의 책.
4) TED, 앞의 자료.
참고문헌
박승일. (2021) 기계, 권력, 사회. 고양:사월의책
TED. [TED]. (2016.02.05.) Let's design social media that drives real change | Wael Ghonim [Video]. YouTube. https://youtu.be/HiwJ0hNl1F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