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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맥교지편집위원회 Mar 12. 2024

[86호][특집] 세계관 최강자로 환승했습니다

수습위원 이주은

*눈 떠보니 S급 세계관 최강자 아이돌이 빠은 성공을 만날 때 벌어지는 일[요약 리뷰/결말 포함]


 자고 일어났더니 새로운 방에 도착해 있다. 최고급 실크 이불과 푹신한 베개로 둘러싸인 침대. 대체 이곳은 어디지?

 뿌슝빠슝. 쾅. 창밖엔 몬스터와 날개 달린 인간들이 결투를 벌이고 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방문이 열린다. 앞치마와 프릴이 달린 옷을 입은 여자가 들어와 말한다. “공주님, 일어나셨군요!” 이 세계 소드마스터인 황제가 쓰러진 딸을 걱정하느라 밤을 꼴딱 새웠단다.

 어느새 침대 앞엔 거울이 놓여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벽안. 미모를 감탄할 새도 없이 여자는 손에 검을 쥐여준다. 일어났으면 얼른 나가서 몬스터들과 싸우란다. 황궁 앞에 던전이 열려 피해가 장난 아니라고. 이를 해결할 사람은 유일한 S급 몬스터 조련사이자 각성자인 공주님밖에 없단다. 


 

 칼을 들고 어영부영 문밖으로 향하는데, 눈앞에 상태 창이 뜬다.

 뭐? 그러니까 내가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공주이자 세계 유일 S급 몬스터 조련사인 동시에 초절정 인기 아이돌이라고? 


 잠깐만. 나 분명 이런 내용의 책을 읽다 잠들었는데. 

 

1화. 눈 떠보니 세계관 최강자

 어딘가 익숙한 이 제목은 웹소설 페이지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하다. 회귀, 환생, 빙의. 줄여서 ‘회빙환’이라 불리는 장르는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에서 자주 차용된다. 셋은 비슷해 보여도 각각의 특징이 존재한다. 회귀는 주인공이 과거로 가 삶을 재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고난이 닥치기 전으로 돌아간 주인공은 자신이 겪었던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한다. 가끔 그를 도와주는 도구도 등장한다. 과거로 돌아갔음에도 현재 뉴스를 파악할 수 있는 휴대전화나 정보 및 지령을 전달하는 시스템 창 말이다.

 빙의는 불행한 삶을 살던 인물이 책 속 인물이나 동시대에 사는 생뚱맞은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주로 수려한 용모와 건강한 몸을 가진 인물에게 빙의한다. 죽기 직전의 90대 노인으로 바뀌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빙의 후엔 좋은 집안도 갖게 된다. 가난하고 핍박받더라도 알고 보면 세상을 구할 능력이나 황가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 무조건 주인공을 믿어주고 사랑하는 가족이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된 앙숙,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조력자도 등장한다. 

 환생도 앞선 두 가지 장르와 거의 유사한 설정을 지닌다. 불우한 삶을 보낸 주인공은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새로 태어나,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신생아의 몸으로 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기에 행동에 제약이 있지만, 주변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도 하다. 순진한 아이를 연기해 몰래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적에게 들킬 위험 없이 능력을 마음껏 사용한다.

 ‘회빙환’을 관통하는 주된 흐름은 ‘현재의 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삶은 ‘망해버린’ 이전 삶에서 겪었던 결핍까지 채운다.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여성은 딸바보 황제의 능력 있는 막내딸로 환생한다. 능력 있지만 집안 사정으로 꿈을 펼치지 못하던 남성은 재벌가 자제에 빙의한다. 주인공들은 ‘회빙환’을 통해 이전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가지지 못했던 ‘성공을 위한 환경’에 놓이게 된다.

           

▲ (좌) 네이버 웹소설 <베이비폭군> 표지|(우)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포스터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부분 청년이다. 돈 많고 행복한 50대 남성 가장이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엑스트라 시녀로 환생한다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노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서사가 인기였다. 일명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시나리오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정과 의지만 있으면 모든 걸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개천 용 서사는 더 이상 공감받지 못한다. 자신의 의지만으로 미래를 개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조형근은 개천 용 서사가 고도 성장기와 엘리트를 생성해 내는 장치가 맞물려 생긴 우연이며, 근 미래에는 고도 성장 사회가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1) 시대에 맞춰 공교롭게 생겨난 신화이며, 재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청년은 환생, 빙의, 회귀를 통해 새로운 신화를 찾아 나선다. ‘노력’이란 서사에는 등 돌린 지 오래다.


▲ (좌) 기사 「"하늘이 감동할 만큼 노력해봤습니까?"…속상한 청년들」 ⓒSBS|(우) 웹툰 <피폐물 남주의 엄마가 되었다> ⓒNAVER웹툰

 2016년, 스브스뉴스 채널에 올라온 카드 뉴스는 기성세대에게 ‘이미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노력하고 있으니 노력하란 말은 멈춰달라’고 당부한다. 8년이 지난 현재에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악착같이 노력하던 청년들은 이제 번아웃을 호소한다. 공부, 취업, 생계 등 많은 압박을 견디다 못해 극한의 피로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실시한 <2022 청년 삶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 동안 번아웃을 경험한 청년은 33.9%에 달한다.2)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이 현상이 ‘하이텐션(high tension·고도불안)사회’의 병폐라고 주장했다. 과거에 대한 불신, 현재의 불만, 미래를 향한 불안 등이 청년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이다.3)

 회귀, 빙의, 환생을 다루는 창작물은 시간에서 기인하는 불안을 말끔하게 해결해 준다. 내가 살아왔던 삶에 기댈 수 없고 장래는 불안하기만 한 상황에서 ‘회빙환’은 시공간을 마음대로 뒤틀어 버린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과거는 되돌리고, 두려운 현재와 미래는 없애버리면 그만이다. 고달팠던 삶은 버리고 세계관 최강자의 몸으로 빙의하거나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의 자녀로 환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빙환’ 작품 속 주인공의 전생은 감춰진다. 주인공의 이름, 성별 정도만 등장하며, 생김새에 대한 정보는 주어지지 않는다. 짧게 묘사되는 폭력적인 남자친구, 가난한 집안 등으로 ‘불행했던 전생’을 가늠할 뿐이다. 주인공이 없어진 후의 미래와 남겨진 사람들, 살던 집이 나오지 않는 건 당연지사다. 상단 우측의 사진은 한 빙의물 웹툰 1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난 분명히 죽었는데’라는 대사로 전생은 일축되며, 이 외 별다른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기술되지 않는 전생은 그가 없어도 전생의 세상이 잘 굴러감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주인공은 ‘필요하거나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만약 주인공이 대기업 총수라면, 빙의 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 있겠는가? 돌아갈 방법을 강구할 것이며, 전생의 세상도 발칵 뒤집힐 것이다. 투명 인간 같던 우리의 주인공들은 ‘회빙환’ 이후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들은 이전 인생에 미련 갖지 않는다. 전생의 친구 관계, 직장, 가족은 깡그리 잊어버린 채 오롯이 ‘회빙환’ 후의 행복한 삶에 빠르게 적응하며 살아간다. 독자들도 주인공의 전생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듯 빙의해도 수긍하며 이야기를 읽어 나간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인물이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히로인으로 변신하는 꿈만 같은 줄거리에 이입하여 대리만족하는 것이다. 

 최근 성황리에 종영했던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결말과 시청자들의 반응을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은 기업 총수 가족의 오너리스크4)를 관리하는 비서가 살해된 후, 해당 일가 막냇손자의 어린 시절로 환생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집안 사람 중 누군가가 자신을 죽였음을 확신하고, 재벌가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복수를 하기 위해 애쓴다. 그는 비서 시절에 가지고 있던 정보와 실력을 바탕으로 지분을 모아 최대 주주가 된다. 하지만 결말에선 이 모든 게 주인공이 죽지 않고 기절한 후, 일주일간 꿨던 꿈이라는 사실이 공개된다. 자신을 공격했던 범인은 찾았지만, 막대한 재산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는 재벌가를 무너뜨리고 빈털터리가 된다. 이후 꿋꿋하게 살아가지만, 시청자에게 필요한 건 통쾌함이 아닌 권력과 행복이었다. 이들은 결말을 두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왜 최대 주주가 되어 가장 행복할 때 끝냈냐’, ‘허무하다’ ‘용두사망’ 등의 반응을 보였다. 권력과 지위, 자본이 없는 그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캐릭터가 됐다. 사람들은 ‘환생 이전의 삶’이 아닌 ‘환생 이후의 행복한 삶’을 갈망한다. 처음부터 여의주 물고 시작하는 이야기를 원한다.


 2화. 아무도 노력에 관심갖지 않는다

 신세대 아이콘으로 떠오르는 장원영은 16살에 데뷔했다. 그의 별명은 ‘갓기’. 어릴 적부터 성공적인 데뷔를 마치고 완성형 미모를 가진 ‘성공한 아이돌’의 표본이다. 뉴진스도 마찬가지이다. 뉴진스와 장원영에게는 특별한 노력 서사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들은 ‘처음부터 아름답고 완벽한 존재’로 여겨진다. 코스모폴리탄 칼럼 <뉴진스가 시대의 새 얼굴이 된 이유>에서 이예지 에디터는 “뉴진스는 풍요로운 집안에서 듬뿍 사랑받고 자라나 구김 없는 딸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무해’한, 시대가 가장 열망하는 얼굴이 된 것”이라며 “윤기 나고 고른 옥수수 낱알들 같은 얼굴로 말갛게 웃는 소녀들에게 부족함이란 조금도 없어 보인다. 외면과 내면의 풍요가 다른 아이돌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라고 언급했다.5) ‘사랑받고 자란 티’와 ‘금수저’는 중요한 수식어가 된다. 그들이 뼈와 살을 깎는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어떤 춤과 노래를 연습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건 태생부터 가지고 있던 완벽함이다.


▲ 인스티즈 댓글 재구성

 한 커뮤니티의 ‘장원영보다 언니가 더 이쁘대’라는 제목의 게시글에 적힌 댓글이다. ‘예쁜 가족’이라는 존재는 그의 태생을 뒷받침해 준다. 꼭 뉴진스와 장원영이 아니더라도, 많은 유명인에게 ‘태생부터’라는 건 유효한 마케팅 수단이 된다. 흠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완성형 인간보다 더 아름다운 미지의 누군가. 이들은 핏줄 자체를 완벽하게 만든다.


▲ (좌) 인스티즈 게시물|(우) 더쿠 게시물 재구성

 상단의 사진은 인터넷에 올라온 강남 출신 아이돌을 나열한 글이다. 댓글에는 “집안이 어느 정도 사는 동네야?”, “막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급 부자는 아니어도 그냥 풍족하고 넉넉한..? 그래도 비행기 탈 때 항상 비지니스 아니면 퍼스트만 타는 그런 정도.. 금은 아니어도 은 이상으로 봐야 할 듯” 등 아이돌의 집안 형편을 추측하는 댓글들이 대거 달렸다. ‘000은 진짜 부족한 게 뭐냐 다 가졌네’라는 반응도 있었다. 그들의 출신지와 살던 아파트조차 능력이자, 셀링 포인트가 된다. 제니의 청담 하우스가 잘 팔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 기조와 비슷하다. 회빙환을 통해 ‘여의주 물고 시작하는 이야기’에 푹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왜 환생했고, 회귀했고, 유명한 아이돌이 되었는지 중요하지 않다. 해피엔딩, 결함 없는 주변 환경, 아리따운 외모에 관심 가질 뿐이다. 성공을 위한 노력 신화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니며 그들을 향한 열망과 부러움은 식은 지 오래다. 풍요로움을 숨기지 않는 이들. 몸에서 배어나는 여유와 당당함, 햇살 같은 미소, 사랑받은 티를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 우리는 처음부터 성공한 이들을 선망하고 사랑한다.

 <2022 청년 삶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년들은 이상적인 삶의 조건으로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 학력, 높은 소득과 많은 자산, 명예와 권력 등을 뽑았다. 응답자 대다수가 거의 모든 조건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상적 삶을 완벽히 실현할 수 있다고 응답한 청년은 7.2%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어느 정도만’ 실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우리가 꿈꾸는 삶을 위해 필요한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3화. 2배속으로 보는 사람들

 ‘태생부터’, ‘해피엔딩’ 등 과정이 아닌, 시작과 결과에만 집중하는 기조는 결국 서사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현상은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의 매체에서도 나타난다. 숏츠와 릴스 같은 1분 남짓의 영상은 어느 순간 주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짧은 길이에 맞춰 영상을 제작하거나, 긴 길이의 영상을 짧게 편집해 올린다. 러닝타임 2시간의 영화를 20분으로 요약해 영상을 게재하고, 다시 해당 영상을 1분으로 줄여 숏폼으로 만든다. 우리는 그것마저 건너뛰기와 배속을 사용해 시청한다. 식사하거나 걸어가는 등 가벼운 장면은 영화 결말에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넘겨버린다. 노트북에 영상을 틀어놓은 채, 휴대폰으론 인터넷 서핑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영상을 보다 보면 머릿속엔 아무런 정보도 남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자극적인 장면과 영화의 결말, ‘재밌겠는데?’라는 감상뿐. 그마저도 다른 숏폼으로 쉽게 잊힌다.


▲ <"갈수록 짧다"‥2분 대로 들어온 K팝 노래 길이> 캡처ⓒMBCNEWS

 음악도 마찬가지다. 과거 짧게는 3분 30초 길게는 4분 30초를 웃돌았던 노래들은 최근 점점 짧아지고 있다. 4분은 고사하고 3분도 넘지 않는 곡들이 다수다. 가사에도 많은 변화가 있다. 완결된 노래는 찾아보기 힘들다. 많은 노래가 별다른 줄거리 없이 강렬한 후렴구만 들려준다. 직관적인 단어들로 구성한 가사는 ‘서사’를 찾아내거나 해석할 필요도 없다. 

나로 시작되는 Drama Drama-ma-ma-ma Drama-ma-ma-ma
                                        Drama – aespa
다 괜찮아 어때 껌이라고 난 생각해 Alright alright
왕 하고 먹어버려 다 yeah like CAKE CAKE CAKE CAKE CAKE
                                        CAKE – ITZY
Do you see New hair New tee NewJeans
Do you see New hair New tee NewJeans
                                        New Jeans – NewJeans 


 차례대로 아이돌 그룹 에스파(aespa), 있지(ITZY), 뉴진스(NewJeans)의 노래 가사다. 모두 특정 단어를 반복하고 있다. 집중할 만한 점은 내용이다. 에스파는 드라마처럼 펼쳐질 아름다운 미래를 연주하고, 있지는 어려운 건 쉽게 떨쳐내자고 이야기한다. 뉴진스는 끊임없이 자신의 새로운 머리 모양과 옷에 대해 말한다. 이들에게는 밑바닥에서 올라와 매일 10시간씩 일하며 생계를 꾸린 시절이 없다. 이들이 가진 건 성공과 아름다움뿐이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강조해야 한다. 실패하는 법도 없다. 설령 낭패를 보더라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실패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애초에 실패할 가능성이 없는 환경에 있다는 것은 현실의 실패와 큰 차이를 보인다. 개인화된 사회는 실패를 자력으로 이겨내도록 만들었다. 소설과 다르게 현실에는 조력자와 이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꿀 수도, 모든 것을 노력으로 극복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 도피를 위해 가벼운 콘텐츠만을 찾는다. 콘텐츠에 긴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감정 소모 자체가 버거운 시대다. 슬픈 이야기는 보다 지치며, 50부작이 넘는 대하드라마는 큰 인기를 끌지 못한다. 행복한 결말만 쇼츠로 시청하면 충분하다. 주인공의 감정선은 이해할 필요 없다. 수도 없는 실패는 말하기도 지쳤다. 과정은 중요치 않다. 그 무엇도 진심으로 대하기는 피곤한 사회가 도래했다.


 외전.

 이 세계에 들어온 이후로 3년이 흘렀다. 그날, 던전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를 해치운 뒤 각지의 던전을 닫으러 돌아다녔다. 작년엔 서쪽 지역에서 SR급 드래곤이 나와 고생 좀 했더랬지.

 s급 몬스터 조련사, 최강 아이돌, 공주로도 모자라 국민 영웅까지 된 나는 작년에 북부 대공과 결혼했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그는 두 번째 월드 투어에서 처음 만났다. 오랫동안 내 팬이었다나 뭐라나. 현재는 그를 따라 북부에 와 살고 있다. 척박하고 식량도 부족하지만 혼자 곡 작업하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대공은 나를 위해 커다란 몬스터 조련실도 마련해주었다. 마음에 든다. 지금은 다음 앨범에 들어갈 곡의 가사를 쓰는 중이다. 그나저나 빨리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마무리해야 할 텐데. 딸바보 황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공이다. 

 

 “또 곡을 쓰고 있었습니까. 빌보드 1위 했으면 만족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감기 걸릴까 걱정됩니다.” 

 “후훗, 안 그래도 잠시 접어두고 아버지께 보낼 편지를 쓰려던 참이었어요. 그리고 감기라뇨. 방이 이렇게 따뜻하기만 한데. 꼭 여름처럼 매미 울음도 들리고,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도…” 


 어?

 눈이 떠졌다. 내리쬐는 햇볕과 시끄러운 매미들.

 여름이었다. 


 아, 이게 아니고.

 아름답던 외모와 출중한 무예 실력, 재력, 인기⋯등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요란하게 돌아가는 선풍기와 익숙한 침대만이 남았다.

 일어나자. 학교 가야 하니까.



1) 류이근. 「개천에서 용 난다는 신화로 불평등을 왜곡하지 마라」. 『한겨레』. 2023.12.20. https://www.hani.co.kr/arti/economy/heri_review/1121160.html(2023.12.30. 접속).

2) 국무조정실. 「2022년 청년 삶 실태조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출판일 불명. https://2030.go.kr/board/1/boardView?ntt_id=2046(2024.01.14. 접속).

3) 윤석만. 「번아웃 증후군’에 빠진 2030」. 『중앙일보』. 2023.03.29.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51070#home(2024.01.14. 접속).

4) 기업 대주주와 관련된 논란이나 대주주의 독단적 경영으로 회사가 손해를 보는 것

5) 이예지. 「뉴진스가 시대의 새 얼굴이 된 이유」. 『COSMOPOLITAN』. 2022.10.12. https://www.cosmopolitan.co.kr/article/71482(2024.01.14. 접속).



참고문헌

국무조정실. 「2022년 청년 삶 실태조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출판일 불명. https://2030.go.kr/board/1/boardView?ntt_id=2046(2024.01.14. 접속). 

류이근. 「개천에서 용 난다는 신화로 불평등을 왜곡하지 마라」. 『한겨레』. 2023.12.20. https://www.hani.co.kr/arti/economy/heri_review/1121160.html(2023.12.30. 접속). 

윤석만. 「번아웃 증후군’에 빠진 2030」. 『중앙일보』. 2023.03.29.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51070#home(2024.01.14. 접속). 

이예지. 「뉴진스가 시대의 새 얼굴이 된 이유」. 『COSMOPOLITAN』. 2022.10.12. https://www.cosmopolitan.co.kr/article/71482(2024.01.14.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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