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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자한 핏물과 고막을 가르는 비명, 찌르는 욕설과 둔탁한 파열음. 언제부터였을까, 밤마다 TV 속 스크린이 고통을 호소하던 날이.
드라마 속 자극적인 연출은 때로는 현실적 묘사라는 뜨거운 호평으로, 때로는 비현실적 요소에 기댄 대리 만족으로 설명되곤 한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게 드라마라지만, 그 표현의 당위마저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참으로 모순적이다. 드라마의 작품성을 따지는 시청자의 눈은 높아져만 가는데 어째서 드라마 속 폭력성에 대해서는 이토록 관대하기만 할까? 한국 드라마, 이대로 괜찮은 걸까?
‘현실’이라는 방패
“저게 현실이야.” “현실은 더 심해.” 드라마의 자극적인 연출에 눈살을 찌푸릴 때쯤 듣게 되는 이야기다. 드라마가 아무리 잔인하다 한들 현실을 따라올 수 없다는 논리. 현실에서도 흉악한 일이 판을 치니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흉흉한 현실에 대한 불안을 카메라로 재현하려는 듯, 드라마 속 범죄는 점점 더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는 '현실고증'과 결부되어 드라마의 입체감을 부각하는 장치로도 쓰인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를 보면 그 묘사가 점점 도를 넘는 것 같다.
드라마 <모범택시>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작품 속 젓갈 공장은 사회적 기업이라는 선한 이미지를 내세운다. 하지만 뒤에서는 범죄행위를 일삼으며 지적장애가 있는 고용인을 상습적으로 감금·폭행한다. 드라마는 그러한 폭력을 충격적일 만큼 적나라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적나라한 악행에 시청자가 분노하기를 바랐던 걸까. 악인을 향한 시청자의 격분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다. 드라마의 큰 맥락을 위해 감수해야 한다는 작은 불편함들은 어딘가 불쾌하기만 하다. 드라마의 구체적인 묘사는 '현실적인 묘사'로 대변되어 작품성을 결정짓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는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닌 반영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는 비단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닌 듯하다. 현실적으로 묘사했을 뿐이라는 드라마의 폭력적인 장면은 또 다른 폭력을 재생산한다. 그리고 그 폭력은 차별과 혐오를 견고히 한다. 앞선 예시에서도 피해자의 성별과 장애는 인물의 악행을 더욱 두드러지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이용된다. 이 과정에서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예의는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속 획일화된 약자의 이미지와 이를 향한 폭력은 소수자의 낙인을 공고히 할 뿐이다.
상황에 따라 현실적인 묘사는 사회 고발을 위한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때 폭력적인 표현은 대의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를 시도한다. 드라마 <펜트하우스>는 살인, 폭력, 불륜 등 자극적인 소재로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동시에 부적절한 연출로 꾸준히 비판받아왔다. 그 비판의 중심에는 학교폭력도 있었다. 해당 드라마는 감금, 폭력, 욕설, 식고문 등을 통해 학교폭력 피해자의 고통을 극대화하여 보여주었다. 이러한 장면들은 많은 논란을 빚었지만, 이를 통해 실제 학교폭력 피해자의 고통을 체감할 수 있었다는 옹호의 의견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펜트하우스>의 김순옥 작가는 “펜트하우스를 통해 학교폭력의 폐해, 빈부격차 문제, 불공정한 교육문제와 같이 다소 불편한 이야기를 좀 더 파격적이고 솔직하게 다뤄보고 싶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파격적이고 솔직한’ 묘사가 학교폭력 피해자를 비롯한 시청자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었는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해당 사진은 <펜트하우스 2>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의 일부이다. 학교폭력을 겪었던 작성자는 작품 내의 지나친 학교폭력 묘사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켰다며, 학교폭력을 단지 자극적인 소재로 이용하지 말아 달라 호소했다. 드라마는 학교폭력의 현실을 알리고자 그 잔인함을 낱낱이 묘사했으나, 정작 실제 피해자에게는 고통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끔찍했던 현실이 그저 이목을 끌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만 사용된다면, 그 ‘전략’이 누군가의 아픔이 된다면, 드라마의 사실적 묘사는 절대적으로 존중받아도 되는 걸까? 섬세한 고려가 부재한 묘사는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자극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 변명의 여지는 없다.
‘정의구현’을 위하여
그 옛날 전래동화의 권선징악 프레임은 오늘날 드라마의 정의구현으로 다시 태어났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지라도 '악'은 처단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은 여전한 모양이다. 드라마 내 '정의구현'은 악을 소탕한다는 일념으로 꾸준히 등장하고 꾸준히 환영받는다. 하지만 악인을 향한 수위 높은 응징을 과연 정의구현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지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드라마 <빈센조>의 주인공은 악을 처단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정의구현’을 이행한다. 해당 드라마는 기존의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파격적인 살해 방법과 고문 장면으로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끌어냈다. 악인을 고문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적나라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악인을 향한 자비 없는 징벌에 속이 시원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잔인한 장면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악인의 고통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들. 대중은 어쩌다 이토록 과격한 정의구현에 갈증을 느끼게 되었을까?
뉴스에서 매일같이 들려오는 크고 작은 범행과 찝찝한 판결. 바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억지로 삼켜내야만 하는 이 고구마가 너무 버겁다. 답답한 속을 시원히 뚫어줄 사이다를 찾아, 정의구현을 찾아, 대중들은 드라마로 눈길을 돌린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이루어지지 않는 불편한 현실을 피해, 눈에는 주먹과 이에는 죽음을 안겨주는 이야기에 열광하게 된다. 그리고 이 폭력은 합당하다 여겨진다.
합당한 폭력. 마치 착한 조폭과 같은 어불성설의 조합이다. <빈센조>와 같은 사적 응징을 허용하여 악을 심판한다면 당신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정의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악인지 구분 지을 수 있는가? 또한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논리가 언제까지나 ‘우리’가 아닌 악인만을 향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악인을 단죄할 영웅적 변호사는 드물다. 한 번 허용된 사적 폭력이 힘없는 자들에게 향하지 않으리라고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드라마와 달리 현실에서는 흑백논리를 대입하기에 너무나 많은 도덕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드라마 속 폭력, 그 모호한 기준
방송 통신 심의제도는 방송 통신의 공공성과 윤리성을 확보하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유해한 매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에 TV 프로그램은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가 제시한 방송프로그램 시청등급 분류기준에 따라 방송사의 자체적인 심의를 거친 뒤 방영된다. 차후 문제가 발생할 경우 방통위의 재제와 재검토를 통해 시청등급이 조정된다. 방송프로그램 시청 등급제(이하 시청 등급제)는 ‘주제, 폭력성, 선정성, 언어 사용, 모방 위험’ 정도에 따라 시청 연령을 제한한다. 그러나 아래의 표에서 볼 수 있듯 그 기준은 추상적이며, 그마저도 방송사의 판단에 따라 상이하다. 방통위와 방송사의 판단에 의존하는 심의는 모호성과 자의성을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와 달리 가정에서 보는 드라마는 시청 등급제에 따른 제지가 엄격하지 않은 편이다. 보호를 목적으로 한다는 기준이 제 기능을 해내고 있는 것인지, ‘19세 이상’이라는 딱지가 무엇이든 용인하는 면죄부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볼 여지가 있다.
매체에서의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공동체로서 누릴 수 있는 중요한 권리 중 하나이다. 그러나 목적과 당위가 ‘자유’에만 있는 표현은 존중받기 어려우며,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르는 것 또한 분명하다. 표현의 자유가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폭력적인 묘사보다 세밀한 감성을 지향하는 세상이 오기를, 필자는 오늘도 간절히 바란다.
참고문헌
고재완, 「‘펜트하우스’ 김순옥 작가 “나 때문에 어린 배우들 상처받을까 마음아팠다”(인터뷰1)」, 『스포츠조선』, 2021.01.25
김수현, 「‘펜트하우스2’ 끔찍한 폭력, 살인... 민원 쌓여도 방송심의 못한다」, 『머니투데이』, 2021.03.02
손화신, 「‘모범택시’, 통쾌함 뒤에 밀려오는 찝찝함」, 『오마이뉴스』, 2021.04.12
이동진 외 1명, <이동진을 괴롭힌 논란의 한국영화 TOP 10>,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2021.04.02
이재진, 『미디어 법』, 커뮤니케이션북스, 2013
이정현, 「‘SKY캐슬’과 닮은 듯 다른 ‘펜트하우스’」, 『연합뉴스』, 2020.10.31
홍승한, 「과감해진 드라마, 19禁으로 안방극장 공략 나선다[SS이슈]」, 『스포츠 서울』, 2019.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