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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 의미의 혁명이란 기존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같은 것을 단번에 깨뜨린 후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세우는 일을 뜻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생각한다. 삶은 혁명이라고. 누군가의 인생, 그리고 당신의 세상은 혁명이라고 명명할 만한 사건들의 집합체라고. 이것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와 멀게만 느껴지는 혁명이란 개념이 인생의 동의어라고 감히 주장하는 글이다.
혁명은 멀지 않다.
살아가다 보면 무엇 하나 쉽지 않다는 생각과 자주 마주한다. 구태여 지난 세월의 고비를 회상하지 않더라도, 지금 나를 이끌어 가는 기류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벅찬 세상이다. 해마다 스펙을 빙자한 기업의 열정 페이가 재상신되고 언론은 청년들의 빗발치는 공정성 요구를 지적하며, 정부에서 교육 양극화를 막을 겨를도 없이 계층 이동 사다리는 우후죽순 가파른 비탈을 만든다. 그런 와중에 이십 대는 밀레니엄 세대, N포 세대, Z세대 등 갖가지 별칭을 갱신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학생에게 동일하진 않지만 최소 흡사하기라도 한 시간표, 말인즉슨 ‘공교육’으로부터 벗어난 후 시작된 일들이다.
한국 사회는 이십 대를 청춘이라고 부르지만, 그 이면에는 무릇 젊음이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끊임없이 바위에 부딪혀야 한다는 ‘무한 동력’의 기대감이 존재한다. 청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함으로써 공교육의 ‘동일한’ 요구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투쟁을 시작해야 함을 깨닫는다. 이십 대가 열정, 혹자에게는 광기처럼 비치는 경쟁 구도에 자기 자신을 기꺼이 밀어 넣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성년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N 번째 혁명기의 시작을 알리는 기점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약 12년간의 유사한 커리큘럼과 목표 의식을 주입받던 이들은 그동안 자신을 통제 혹은 보호해 온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내던져지고, 새로운 목적을 위해 투쟁할 의무를 부여받는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열여덟의 청춘과 스무 살 이후의 청춘이 살아가는 형태는 극명한 차이를 보여 준다.
옛것은 무너졌지만 새로운 세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혁명은 언제나 그렇게 온다.¹
성년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혁명기가 시작된다는 것은, 말인즉슨 이런 것이다. 기존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앞으로 요구될 새로운 지위를 달성하지 못한 상태,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혁명이 발발할 만한 전제 상황이라고 본다. 국가에 비유하자면 컨트롤타워가 건재하지 못한 국정 공백 상태일 것이다. 이런 긴급 상황은 누군가에게는 기회로 읽히는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혼란이 된다. 알다시피 혁명은 투쟁이다. 그리고 사람의 혁명은 성장이다. 혁명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성장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투쟁의 역사와 동행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교육부의 커리큘럼에 맞추어 생활해 온 학생들은 어느 날 성년의 지위에 오르더니 얼떨결에 새로운 세상으로의 도약을 요구받았다. 새로운 생활양식의 주체가 되는 계기가 언제나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개인의 삶은 출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혁명기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시작되는가. 각자의 사정에 따라 N 번째 혁명이 어떻게 발발하느냐는 제각기 다르겠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청년이 있다면 그에게 전하고 싶다. 법적 성년으로 발돋움한 이십 대의 우리는 분명 새로운 혁명의 출발점에 서 있다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끊임없이 사건을 맞이하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 것일까. 한 사람의 삶에는 수많은 목적이 자리하는 것처럼, 투쟁의 목표 역시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그런 목표에는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바가 반영되며, 자기 자신이 지향하는 새로운 질서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혁명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기존의 질서를 ‘깨부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과정은 결코 평탄할 수 없다. 아주 단순한 명제이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쉽게 잊히는 사실이기도 하다.
비자발적인 투쟁에서는 그런 고통이 유독 도드라지고는 한다. 개인의 혁명기는 그가 기존의 지위나 관습을 잃었지만 외부 사회, 혹은 주체 내면에서 필요로 하다고 요구하는 상태가 부재할 때 시작된다.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이 바로 외부 사회이다. 세상의 등쌀에 떠밀려 억지로 걷는 길은 평탄치 못한 것도 모자라 상당히 고통스럽다. 이때의 전진이 때로 번아웃, 우울증과 같은 질병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한국의 경우 사회 풍조 자체가 정신적인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편 개인은 자신의 고생을 별것 아니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지친 개인’ 혹은 ‘개인을 지칠 수밖에 없게 하는 구조’는 쉽게 인정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이에 대해 반문하는 문화가 만연한 상황이다. 네가 뭘 얼마나 했느냐, 그게 무슨 고생이라고 힘들어하느냐, 모두가 너만큼 혹은 너보다 힘들다, 따위가 그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이 고질적인 피로 사회라는 공식은 모순되지만 당연하다.
“내가 뭘 얼마나 했다고 번아웃을 겪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날에는 당신이었고, 때로는 나였으며, 어쩌면 당신의 친구가 겪었을 자책이다. 어느새 당연해진 투쟁적 인생의 한복판에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거대한 물살을 헤쳐나가고 있는지를 잊고, 지쳐 버린 자신을 책망하기도 한다.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일상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며, 괴로움의 원인을 자신으로부터 찾는 것이다.
물론 삶의 무게는 상대적이다. 누군가는 자기가 한 일이 정말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서술한 것처럼 삶은 개인의 출생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글은 혁명과 투쟁이 인생의 동의어라고 주장하는 글이지 않나. 즉, 사람에게 인생이란 언제나 투쟁이었으며, 스스로 수만 가지 껍질을 깨야만 한다고 채근하는 세상에 내던져진 삶을 최선을 다해 직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이기적이고, 선의로만 이루어진 사람은 많지 않다. 나를 기꺼이 이해해 줄 만큼 여유 있는 타인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세상에서 겪는 일들이 무엇 하나 쉬울 리가 없다. 풍파²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처럼. 고생을 고생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건강과 행복은 기만적인 유토피아와 같은 것이다.
개인의 삶에는 혁명이라 명명할 만한 투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혁명의 괴로운 파동은 고스란히 본인에게 되돌아간다. 21세기 ‘위안의 시대’는 힘에 겨운 사람들이 기댈 곳을 찾아 헤맨 끝에 도래한 때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몇 년간 서점에는 정해진 듯이 베스트셀러 매대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 있다. ‘그래도 괜찮다. 당신은 잘하고 있다. 그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그런 위안이 매대 한쪽을 차지한 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³ 그러나 위로 에세이라는 장르가 특정 세대에 머물러 꽃을 피웠다는 사실은 그저 그렇게 넘길 일이 아니다. 위안의 열풍은 수많은 투쟁에 기인한 고통을 견디는 우리네 인생의 방패로 생각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문화평론가 정지우는 말했다. “예를 들어 ‘너는 우주의 먼지일 뿐이야.’ 이 말 한마디에 위로를 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는 저 말을 SNS에서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으며 내 가치를 깎아내린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위로 에세이를 읽으면서 오히려 우울감에 빠져 위로가 아닌 격한 감정으로 자기혐오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힘들었던 사람들에겐 내가 같잖게 생각한 위로가 시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위안의 시대 또한 어느새 저물어 가고 있다고 덧붙인다. 정서적인 위안보다는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습득, 말인즉슨 재테크와 성공의 비법에 관한 책들이 대중의 이목을 끌고 있다고 말이다. 이 변화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너, 내 동료가 돼라!
이쯤에서 인류 역사를 다시 한번 돌아보자. 아니, 피곤하다면 거창하게 갈 것까지 없다. 빅토르 위고의 거작 <레미제라블>만 보아도 알 수 있을 테니까. 무릇 혁명이란 다양한 인물이 힘을 합쳐 도모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의 혁명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투쟁 속에서는 끈끈한 동지애 한 줌 찾기도 쉽지 않다. 열이면 열 본인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 벅찬 시대에 동반자의 서약을 나눌 사람을 찾기가 어디 쉽겠는가. 하물며 타인이 감히 간섭하고 싶어도 해서는 안 될 사적 투쟁마저 차고 넘치는 장르가 인생이다. 여럿이 힘을 합쳐 몰아붙여도 쉽지 않은 혁명을 두고 혼자서 맨몸 싸움을 해야 하니 머리가 아픈 것도 당연하다. 머리만 아프면 다행이겠다. 이 외롭고 지치는 싸움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생각하면 눈앞이 다 아득해진다.
소년 스포츠 만화, 특히 성장 요소가 도드라지는 만화들이 수십 년 전부터 한결같이 사랑받는 것은 이 같은 이유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번번이 등장하는 자극과 절망, 갈등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혁명기를 보란 듯이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외로운 투쟁을 겪는 개인에게 위안이 되어 주고는 한다. 게다가 이런 만화에서는 보통 주인공이 홀로 시련을 견뎌내기보다 그가 건강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동료애가 전제되어 있다. 이런 모습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해도 좋다. 창작된 비현실의 뒤편에는 언제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실재해 있으니 말이다. 작품에 기대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비현실이 단지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의미를 잃을 수 있겠는가.
또한, 그런 만화들은 개인의 실패에 냉소적이지 않다. 실패한 혁명은 대개 기억되지 않는다. 제대로 기록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실패는 그저 실패로 그칠 뿐, 내가 아니고서야 나의 실패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대 사회가 얼마나 치열하면 ‘역사는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유명한 공부 자극 글귀로 떠돌고 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수긍했을 뿐, 수긍했다는 사실이 곧 이런 사회 풍조에 상처받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의 경험이 남들 보기에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칭한다면 누군들 상처받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장 만화의 플롯은 그렇지 않다. 실패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극복해 나가려는 의지와 과정 자체를 유의미하게 그린다. ‘혁명기’, 그리고 ‘투쟁’을 그 자체로 기억하려는 시선이 거기에 있다.
유명한 소년 배구 만화 <하이큐!!>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걱정할 건 하나도 없어. 모두 앞만 보는 거야. 등 뒤는 내가 지켜 줄게.” 여러 명이 한 팀을 이루는 스포츠의 특색이 더해진 덕분인지 등장인물들은 여럿이 한 몸을 이루는 듯한 유대감을 보여 준다. 이것이야말로 그들 사이에 축적된 유대감이 단번에 드러나는 대목일 것이다. 뒤쪽은 본인이 맡을 테니 각자 할 일 제대로 하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혹은 뒤쪽에 내가 있지만 다들 긴장하고, 절대 마음 놓지 말아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종이 위의 인물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일까? 자기애와 동료애, 자기 자신이 가진 능력에 대한 믿음과 동료들의 부담을 덜어 주고자 하는 선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이 최선을 다하리라는 신뢰가 엿보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의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을 몇이나 만날 수 있을까. 기꺼이 내 등 뒤를 지켜 주겠다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중 나의 걱정과 부담을 함께해 주겠다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리고 나는 몇 번이나 누군가의 짐을 나누어 들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될까.
돌이켜 보면, 대다수의 드라마와 영화,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경향성은 까마득한 고전 소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투쟁을 성공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한마디로 크고 작은 ‘히든카드’를 가진 사람. 그렇다 보니 거창한 포부나 도드라지는 선천적 재능을 연출하지 않는 무난한 인간상을 주인공 삼은 작품에 신선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018년에 종영한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앞서 말한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는’ ‘거창한 포부가 도드라지는’ ‘결코 무난하지 않은’ 인물이 한 명, 그리고 자기 인생에 주어지는 사건사고를 극복하는 것만으로 벅찬 인물이 한 명. 각 인물을 대표하는 대사를 생각하면 더욱 묘한 조합이다. “저는요,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기만 하는 판사 따위, 절대 되지 않을 겁니다.” 이렇듯 정의와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 인생의 모토를 지키기에도 벅찬 인물이 다른 한 사람이다. “재판은 기본적으로 남의 일입니다. 전 그냥 먹고 살려고 판사 됐습니다.” 그들은 성격에 배분된 기본값만으로 미묘하게 부딪칠 법한 정도의 차이를 보여 준다. 제삼자의 시점에서 우리는 후자 인물의 사고방식에 더욱 몰입하지만, 전자의 인물이 세상을 가시적으로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한다. 단순한 감탄 정도라면 한 사람의 업적을 통해서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서로의 판단을 이해하기 힘들 만큼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인물이 기어코 타협하고 협력하여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클리셰는 그보다 더 깊숙한 울림을 준다. 그렇지 않아도 험한 세상, 고독한 싸움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마음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 타협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사실상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구조 자체에서 비롯되는 질문과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가끔은 내가 양보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타인들과 타협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과 연대해야 하는가.”⁴ 이 외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우스갯소리로 정글이라 비유되는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이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위해 가끔은 나의 뜻을 희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스 함무라비>의 각본가 문유석은 ‘행복’이라 답했으며,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예를 들어 보겠다. 2021년 방영한 JTBC 드라마 <로스쿨>이다.⁵ <로스쿨>의 주연은 대부분 이십 대 학생들이다. 이 청년들 또한 여타 작품의 인물들처럼 다양한 갈등을 경험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동료임을 인정하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누군가의 삶에 예기치 못한 투쟁이 찾아오면 다른 구성원들이 그의 삶에 기꺼이 뛰어드는 동지애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어린 학생들의 전우애와 성장만이 아니다. 개인의 실패가 과연 실패로만 끝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작중 주인공들을 가르치는 교수는 오랜 시간 생각해 온 사건의 의문점을 끝내 풀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해소하지 못한 의구심과 이로 인한 절망감을 단지 패배라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비록 과거의 나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은 끊임없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다음 사건의 주체는 내가 되지 못하더라도 나의 자괴감을 반면교사 삼아 누군가는 성장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혁명과 갖은 투쟁은 사실 타인의 그것들과 난마처럼 얽혀 있어서 한 사람의 경험은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수레바퀴처럼 맞물리는 투쟁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배움 혹은 반면교사의 대상이 되어 주며, 사회는 때로 그런 실타래 위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굴러가기도 한다. 실패한 경험을 그 자체로 무용지물 삼는 것도 바람직하진 않지만, 그러니 그것이 언제까지나 실패로만 남아 있으리라는 절망도 속단일 수 있다. 단 한 가지 대상에도 수만 가지 이해관계가 동반되는 세상에서 사람은 영영 혼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혁명
우리는 너무나 잦은 투쟁의 틈바구니에서 살고 있다. 아무리 고요한 들판의 한복판일지라도 오랜 시간 서 있던 사람은 어느 순간 스러질 수밖에 없으므로, 수많은 혁명으로 점철되어 있던 삶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막을 내리게 된다.
무언가 끊임없이 생산하기를, 생산적인 결과물을 위해 투쟁하기를 요구받던 우리는 결국 수많은 흔적을 남기고 숨을 거둘 것이다. 다사다난했던 삶 이후의 소멸이란 개인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덧없고도 지대한 마지막 혁명이다. 생사 여부를 측정하는 의학적 견해는 비교적 통합된 한편 삶과 죽음을 맞닥뜨린 사람들의 생각은 여전히 다양하기만 하다. 이 글에서는 그중 ‘본질’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보았다. 본질은 특정한 사물이나 현상 자체의 근본적인 성질을 의미한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사람은 나와 그이가 다녀가거나 경험한 대상의 새로운 본질로 정의되기에 충분한 존재가 아닐까. 때로 사람의 기억은 사물의 본성을 압도한다.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의 눈꺼풀에는 사랑했던 이와의 기억이 덧입혀져, 어떤 사물에 대하여는 사자가 항구적인 본질이 되고 사물 자체는 그저 겉모습에 불과하게 되니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탄생과 죽음은 참으로 묘한 투쟁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선택할 수는 없지만 나를 비롯한 주변 세상에 참으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이, 유독 그렇다.
이즈음 글을 마무리해야 하는 나에게 감히 단언할 기회를 주길 바란다. 우리의 탄생과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성공적인 혁명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 당신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고달픈 혁명기의 위안이자 행복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법적 성년으로 발돋움한 이십 대의 당신, 혹은 또 다른 혁명기의 출발점에 선 당신에게 전하고 싶다. 비록 고된 투쟁 속에 내던져진 우리네 삶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많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사람은 잊힐 수 있지만 글은 지워지지 않으므로.
우리가 언제까지나 건승하기를.
¹ 유종선 외, <60일 지정생존자>, 6회, tvN, 2019.07.16
²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풍파란 ‘세찬 바람과 험한 물결을 아울러 이르는 말’인 동시에 ‘세상살이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의미한다.
³ 교보문고에서 발표한 ‘2018 연간 도서 판매 동향 및 베스트셀러 분석 종합 10위권’ 중 6권이 위로를 주안점에 둔 도서였다.
⁴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문학동네, 2015년, p.21
⁵ 필자의 일관된 드라마 취향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참고문헌
류지현, 「나도 모르게 빠지는 ‘번아웃 증후군’... 극복법은?」, 『헬스조선 뉴스』, 2021.04.23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문학동네, 2015
이웅, 「올해 베스트셀러 키워드 "토닥토닥"...1위 '곰돌이 푸, 행복한...'」, 『연합뉴스』, 2018.12.03
JTBC 공식 홈페이지, 「[최종회] (@두근두근@) 정의대회 결과를 확인하는 로스쿨즈」, 2021.06.10
JTBC 공식 홈페이지, 「JTBC <미스 함무라비> 선입견 통쾌하게 깨는 개성 만점 캐릭터 포스터 공개!」, 2018.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