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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접시 모양의 쟁반을 타고 지금 올라가는군요. 비둘기들이 성화대 주위에 있는데…. 성화가 점화되는 순간 비둘기들이 데일까 걱정이네요. 네 이제 점화 순간입니다! 서울 올림픽을 밝힐 성화, 점화됐습니다. 역사적인 순간,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1988년 9월 17일. 서울 올림픽의 성화가 점화되었고 관객들의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봉화의 불길은 높이 치솟았다. 아마 올림픽 기간 내내 활활 타오를 것이다. 성화대에 앉아 있던 비둘기들은 성화가 점화되는 순간 퍼드득 날아올랐다. 개중에는 높은 불길을 피하지 못한 놈들도 있었다.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는 인간들의 축제를 알리는 불꽃 속으로 타들어 갔다.
2012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역대 최악의 올림픽 개막식으로 1988 서울 올림픽 개막식을 꼽았다. 해당 기사는 “성화대에 불을 붙인 순간 비둘기들은 지구촌이 보는 앞에서 불에 타버렸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찰나의 힘은 대단했다. 지금까지도 포털사이트에 ‘88올림픽’을 검색하면 ‘굴렁쇠’와 ‘호돌이’보다 ‘비둘기’가 먼저 뜬다. 일각에서는 ‘비둘기 화형식’, ‘올림픽 비둘기 통구이’ 등으로 불리며 유머와 조롱 그 언저리를 배회했다.
비둘기와 성화. 평화와 화합의 두 상징물이 만나 죽음을 피워냈다. 서울 올림픽의 비둘기 사건이 올림픽 역사에 불명예로 남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자랑스러운 메가 이벤트의 오점은 ‘그땐 그랬지’하는 해프닝이면서도 눈치껏 쉬쉬하게 되는 항간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건의 진정한 부끄러움과 마주해야 한다. 평화를 노래하는 올림픽에서 ‘통구이’가 된 비둘기가 생중계되어 창피한가? 아니면 그 장면 자체로도 꺼림직한가? 희생된 것은 정녕 비둘기에 불과했는가? 영광스러운 올림픽의 흑역사는 동물과 사람, 그리고 국가에까지 드리운다. 저들끼리 단단한 오륜기의 팔짱이 절대로 끼워주지 않는 것들이 있다.
올림픽은 가상의 동물을 사랑했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올림픽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어느 4년은 뜨겁고 어느 4년은 차갑다. 반복되는 대회가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매번 달라지는 개최도시 덕분일 테다. 개최국의 역사와 문화, 국가정체성에 따라 올림픽이 강조하는 주요 비전도 달라진다. 올림픽의 광활한 아이덴티티는 올림픽의 홍보대사, 마스코트로 압축된다. 개최국은 저마다 다른 마스코트를 내세우며 대회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그중에서도 친근한 이미지를 자랑하는 동물은 마스코트의 단골 소재다. 역대 올림픽 마스코트의 절반 이상은 동물 캐릭터였다. 우리나라도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호돌이(호랑이)’를, 2018 평창 올림픽에서는 ‘수호랑(백호)’을 내세웠다. 올림픽은 사랑스럽고 자연 친화적인 동물 캐릭터를 적극 활용했다. 스포츠 특유의 활동성과 자연이 주는 거룩함을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데 동물만 한 아이템이 없었다. 그렇게 올림픽은 동물을 열심히 ‘활용’했다.
그러나 두 발로 걷는 귀여운 마스코트는 실존하지 않는다. 가상의 캐릭터에서 벗어나 보자. 이족보행 대신 사족보행이 보인다. 인간의 축제에서 동물은 ‘소비품’에 불과했다. 1900 파리 올림픽에서는 300마리의 비둘기가 던져졌다. 경기 종목은 '살아있는 비둘기 쏘기'였다. 스물한 마리를 떨어뜨린 벨기에 선수가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거리는 비둘기의 피로 얼룩졌다. 해당 경기는 단 한 번의 기록을 남긴 채 사라졌다. 세기가 바뀌어도 올림픽의 인간 중심적인 동물 소비 논란은 계속되었다.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잡음이 일었다. 개막식 주제는 ‘경이로운 영국’이었다. 과거 영국의 농촌을 표현한 1막 ‘푸름과 유쾌함(Green and Pleasant)’에는 양, 말, 암소, 거위 등 최소 80마리 이상의 동물들이 동원되었다. 동물애호단체(PETA)를 비롯한 수많은 동물보호 단체가 장기간 진행될 개막식에서 동물들이 받을 스트레스와 여러 위험 요소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이에 개막식을 이끈 총감독은 동물들의 각별한 보호를 약속했고 행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하 리우 올림픽)은 피의 역사를 반복했다. 서울 올림픽에서 비둘기가 타버린 지 3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리우 올림픽의 마스코트는 재규어 캐릭터 ‘징가’였다. 개최팀은 마스코트가 재규어라는 이유만으로 성화 봉송 행사에 실제 재규어를 등장시켰다. 이름은 ‘주마’, 17세 암컷이었다. 동물원에서 자란 주마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목줄을 하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낯선 인파에 흥분한 나머지 행사 막바지에 이르러 탈출을 시도했다. 그는 마취총에도 아랑곳 않고 목줄을 잡으려는 군인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군인이 인명피해를 막고자 주마에게 총을 겨눴다. 주마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혹자는 진정제도 먹히지 않던 주마를 보며 야생동물의 본능이라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마가 도망쳐 향한 곳은 자신이 살던 동물원이었다.¹ 친근한 동물 마스코트가 인간 친화적인 성격을 잃는 순간, 현실은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2021년 여름 일본 도쿄에서, 우리는 올림픽이 그은 사랑의 한계선을 여지없이 절감했다. 여자 근대5종의 승마 경기²가 치러진 때였다. 독일 선수와 함께한 말(馬) ‘세인트보이’는 장애물 뛰어넘기를 거부하는 등 경기에 협조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앞선 경기 내내 선두를 달리던 독일 선수는 승마에서 0점을 받으며 메달 순위권에서 완벽히 밀려났다. 제비뽑기로 말을 배정받는 경기에서 세인트보이는 복불복 중 ‘꽝’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승리를 방해한 동물에게는 매질이 가해졌다. 독일 코치는 경기 중 울타리 쪽을 향한 세인트보이의 엉덩이에 주먹을 휘둘렀다. 자신의 선수에게는 세인트보이를 더 세게 채찍질을 할 것을 계속해서 요구했다. 동물과의 교감이 필요한 경기에서조차 동물은 수단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메가 이벤트를 준비할 때, 대장정의 시작을 알릴 때, 심지어는 경기가 한창일 때까지. 올림픽의 모든 순간에는 동물이 있었다. 그러나 동물들은 입에 발린 소리를 더 부드럽게 만들어줄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사랑과 교감, 평화와 화합을 돋보이게 해줄 더할 나위 없는 ‘도구’였다.
축제가 끝나고 난 뒤
올림픽이 끝나면 시끌벅적하던 경기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다. 사람들은 각자의 나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모두가 돌아간 줄 알았던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보름간의 메가 이벤트를 밝히기 위해 야생동물들은 평생의 집을 잃어야 했다. 약탈자는 축제의 주인, 인간이었다. 그들은 2010 밴쿠버 올림픽에 필요한 고속도로를 내기 위해 원시림을 밀었다. 그렇게 흑곰의 터전은 아스팔트로 끊어졌다. 2018 평창 올림픽에서는 스키장을 위해 가리왕산을 파헤쳤다. 그곳에는 멸종위기종을 포함한 수십 종의 야생동물이 살고 있었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도 배구 경기장을 짓기 위해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의 산림지를 파괴했다. 개최국이 약속한 ‘지속 가능한 올림픽’은 오랑우탄의 서식지던 산림벌목과 함께 쓰러졌다. 찰나의 경기를 위해 영원을 잃은 동물들의 이야기는 경기장의 불이 꺼진 뒤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돌려받기엔, 그들의 터전은 이미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 노출된 이후였다. 본래 가리왕산은 강원도의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이었다. 그러나 평창 올림픽의 알파인 경기장을 짓기 위해 그 일부 보호구역을 해제했다. 여기에는 올림픽이 끝난 뒤 산림을 복원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평창 올림픽이 폐막한 지 3년이 넘어가는 지금, 가리왕산은 계획대로 복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간 경기장의 전면복원에는 여러 이견이 있었다. 산림청과 환경단체, 지방자치단체, 체육계 등은 각자의 견해를 고수하며 갈등을 빚었다. 당초의 약속은 당연한 1순위가 되지 못했다. 올림픽유산 주민대책위원회는 스키장을 활용함으로써 지역 발전 및 경제 활성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알파인 경기장이 평창 동계올림픽의 유산인 만큼 경기장 철거는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페어플레이에 기반을 두는 올림픽 정신은 인간 우선주의 앞에서 본뜻을 잃어갔다.
올림픽이 책임지지 않은 동물 비극의 잔재는 멀리 있지 않다. 당장 오늘 아침 나의 등굣길을 막은 비둘기가 무책임의 소산이다.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는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날았다. 1980년대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가 행사에는 어김없이 수입 집비둘기가 함께했다. 따져보면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비둘기는 이전부터 많았다. 그러나 서울 올림픽이 집비둘기의 개체 수를 증폭시킨 변곡점이라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 올림픽 때 날린 2,400마리의 비둘기는 비둘기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뛰어난 번식력으로 살아남은 그들은 현재 유해야생동물을 넘어 혐오 동물로 거듭났다. 평화를 위해 날던 비둘기는 ‘더러운 닭둘기’가 되었다. 인간의 축제에 동원된 동물에게 인간이 느끼는 책임의 무게는 그 정도였다.
메가 이벤트에서 철저하게 활용된 동물들을 보면 올림픽은 오직 인간만을 위한 축제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해서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한 동물들을 안타깝게 여길 수 있겠다. 그러나 동물들이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자신의 터전을 지키며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거라 착각하기는 아직 이르다. 위대한 올림픽은 인간의 집도 앗아갔다.
‘상계동 올림픽’에는 폐막이 없다³
제집을 내놓은 건 동물만이 아니었다. 올림픽을 세계인의 대회라 칭하기엔 올림픽의 거름망이 걸러낸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88올림픽을 민족의 영광, 인류의 축제라 부르며 온통 법석들이다. 하지만 우리 상계동을 비롯한 200여 군데 철거민들에게 올림픽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을 원망의 대상일 뿐이다. … 9월에 1분도 채 못되게 성화가 지나간다고 하여 40세대에 200여 명이 1월부터 추위에 떨며 무의미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 영화 <상계동 올림픽> 내레이션 中
다큐멘터리 영화 <상계동 올림픽>은 올림픽 도시 난민들의 3년에 걸친 투쟁을 고스란히 담았다. 국제적 손님맞이를 위해 남루한 집주인은 쫓겨났다.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릴 절호의 기회에 허름한 서울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도시 미관’을 저해하는 200여 곳의 달동네 사람들은 철저히 숨어야 했다. 혹여 올림픽 성화가 지나는 곳에 가난의 얼굴이 보일까, 주민들은 땅굴에서 10개월을 버텼다. <상계동 올림픽>의 김동원 감독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자했다.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서 중요한 일이라고 올림픽을 홍보하는데, ‘우리’나 ‘대한민국’ 속에 철거민들은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란 말이냐’ 이런 반문이 쉽게 나오죠.”
결과적으로 성화 봉송이 걷는 길은 깨끗했다. 무허가 판자촌을 부수고 노숙자들을 가둔 덕택이었다. 온 나라가 올림픽에 매진해 있을 때 누군가는 생계를 영위할 최소한의 공간을 위해 투쟁해야 했다. 당시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은 ‘세계가 보는 눈에 부끄럽지 않게끔 모든 분야의 수준을 향상시킬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의 ‘수준 향상’에 기다림이란 없었다. 붕괴와 낙오의 연속이었고 그 과정에는 철거 깡패와 포크레인이 함께했다. 공권력 남용에 의한 강제퇴거는 엄연한 인권유린이었으나 당시 언론은 철거민들을 등지고 올림픽을 담기에 급급했다. 결국 ‘상계동 올림픽’은 주거 취약 계층의 외로운 경기였다. 국민이 나라를 상대로 하는, 엄연한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가장 서러운 올림픽이 열렸다.
‘상계동 올림픽’은 비단 서울 올림픽만의 흑역사가 아니다. 1988년부터 2008년까지 6번의 하계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200만 명의 사람들이 강압에 의해 주거지를 잃었다. 어느 개최국은 고문과 수용소행(行)도 마다하지 않았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도시 난민은 2,500명에 달했다. 로마계 사람들과 저소득층이 주요 타깃이었다. 노숙자들은 감시 대상이 되어 통제받았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은 ‘인종청소’의 빌미를 제공했다.⁴ 그 결과 3만여 가구가 거리로 내몰렸다. 철거민은 대부분 흑인이었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도시 경관’을 위한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로마계 사람들을 향한 차별이 주를 이루었다. 1만여 명의 로마인들은 경관을 위해 터전에서 쫓겨났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은 올림픽 강제 철거 역사에 최정점을 찍었다. 중국의 중흥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데 누추한 건물들은 걸림돌이었다. 그렇게 눈엣가시가 되어 등 떠밀린 도시 난민은 150만 명에 달했다.
‘상계동 올림픽’은 기존 올림픽 못지않게 꾸준히 돌아온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도, 2016 리우 올림픽에서도 ‘상계동 올림픽’은 계속되었다. 당장 2020 도쿄 올림픽에서조차 정부는 도쿄 거리의 노숙자들에게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더 깊숙이 숨을 것을 강요했다. 한 철에 피고 지는 올림픽과 달리 ‘상계동 올림픽’들에는 폐막이 없다. 사회 안전망의 보호를 받아 마땅한 약자들은 국가의 대대적인 행사 앞에서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개최국은 철거민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억지로 쥐여준 해결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엔 턱도 없었다. 결국 개인의 일방적인 희생만이 남았다. 가히 ‘토지강탈의 면허증’이라 불릴 만한 세계인의 대회였다.⁵
국가사업이 보우하사
‘상계동 올림픽’ 뒤에는 늘 국가가 있었다. 올림픽은 지구촌의 축제이자 개최국의 국가사업이다. 개최지가 선정되는 순간부터 해당 국가에는 메가 이벤트라는 면죄부가 발급되나 싶을 정도다. 명목은 손님맞이 혹은 세계 속 우리다. 조국의 미래를 바꿀 절호의 찬스는 온 나라의 염원이 된다. 그러나 대의에는 사소한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변명이 붙는다. 서울 올림픽의 도시 개조가 그러했다. 한쪽에서 ‘보기 안 좋은’ 무허가 판자촌을 무너뜨리면, 다른 한쪽에서는 ‘보기 좋은’ 도시 시설을 만들었다. 쌓아 올린 도시들은 깨끗하고 질서 정연했다. 이들은 88 올림픽의 성공, 다 함께 일구어낸 발전한 대한민국을 증명하는 기념비였다. 당시에 형성된 도시들은 발전모델이 되어 이후 신도시 건설의 본보기로 활용되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성공 신화의 명패는 청결과 질서, 적절한 녹지와 기능을 두루 갖춘 도시 모델 안에서 성립되었다. 도시의 벽돌을 쌓기 위해 깨부순 판자촌의 벽돌은 잊혀졌다. 정확히는 성공의 반대말로 기억되었다. 서울 올림픽이 양산한 철거민들이 살고자 선택했던 임대주택은 도시의 성공 모델과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공이라는 기준 아래 양극화된 주거 형태가 자리를 잡아갔다.
국가사업이라는 보호막 아래서 많은 것들이 자행되었다. ‘이참에’가 그토록 무서운 말이었던가. 올림픽 개최국은 희생을 안고서라도 올림픽을 위한 감행을 펼쳤다. 리우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후 브라질의 치안이 걱정거리로 떠올랐다. 한국 외교부는 올림픽을 앞두고 치안 및 보건 관련 유의사항을 공지하기도 했다. 국제적 불안감을 인지한 브라질 정부는 치안 문제에 각별히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개최국이 약속한 안전한 도시에서 정작 자국민은 안전하지 못했다. 치안 작전은 총으로 다스려졌다. 2016년 8월 국제앰네스티는 브라질 경찰에 의한 사망자가 전년도 같은 기간과 비교해 103%나 급증했다고 발표했다. 대부분 빈민가 흑인 청년들이었던 사망자들은 ‘치안 작전’ 중 사살되었다. 이들이 치안에 위협을 가했는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병력까지 합세한 덕에 브라질의 열악한 치안은 어느 정도 개선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리우 올림픽의 치안 작전은 인권침해 및 인종학살이라는 오명을 벗기 힘들었다.
1936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 정권의 선전 무대였다. 거리에는 오륜기와 나치의 하켄크로이츠가 함께 휘날렸다. 그 시각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는 국기 게양대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저의 가슴팍에 달린 일장기를 영광의 월계수로 가려보려 애를 썼다. 1968년 멕시코 틀라텔롤코 광장에서는 올림픽을 열흘 남겨두고 대학살이 일어났다. 멕시코의 민주주의를 외치던 시민들은 죽어 나갔으나 학살과 관련한 정부의 공식 입장은 없었다. ‘틀라텔롤코 대학살’에도 올림픽은 진행되었다. 세계인의 경기는 국가사업 앞에서 마냥 순수한 즐길 거리가 되지 못했다. 때로는 국가적 명분이 사회 격차에 불을 지폈다. 공권력을 남발할 빌미를 마련하거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기도 했다. 무엇이라도 메가 이벤트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다. 비극적이게도 그들의 희생에는 국가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 구성원을 배제한 껍데기는 무엇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는가, 의문이 드는 와중에도 화려한 쇼는 계속된다.
Show Must Go On
2020년은 없었던 셈 치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올스톱되었다. 올림픽도 예외는 아니었다. 2021년이 되어서야 2020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일본 내 코로나19 확산세는 여전했다. 지난 6월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도쿄 올림픽을 취소 및 연기해야 한다는 도쿄 시민은 약 60%에 달했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일본 정부는 올림픽을 더는 미룰 수 없다며 무관중 경기를 강행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작동한다. 국가 단위의 정치·경제적 문제도 있겠으나 올림픽 무대를 위해 5년을 기다린 국가대표 선수들의 사정도 무시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꼭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올림픽 참가자들을 위협하는 요소는 여전히 존재했다.
일본 정부는 이번 올림픽을 통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방사능 유출 피해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먼저 성화 봉송 출발지가 후쿠시마현으로 지정되었다. 이번 올림픽의 첫 경기였던 소프트볼도 후쿠시마현에서 치러졌다. 선수촌에는 후쿠시마산 식자재들로 요리된 음식들이 제공되었다. 이에 자국 선수단의 안전을 고려해 직접 도시락을 공수하는 나라들도 생겼다. 국내외적 시름에 올림픽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언제나 그래왔듯 반대의 목소리를 누르고 올림픽은 진행되었다.
2022 베이징 올림픽도 벌써 시끄럽다. 홍콩, 티베트, 신장위구르자치구 등의 인권과 관련한 보이콧 제기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7월 EU 의회는 회원국에 이와 같은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시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보이콧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의결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스포츠의 정치화를 지적하며 타국의 내정 간섭에 대한 불쾌감을 내비쳤다. 이러한 보이콧 논란이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올림픽 보이콧의 역사는 유구하다. 서울 올림픽이 대외적으로 ‘평화 올림픽’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도 이전 올림픽들에서 국가이념에 따른 보이콧이 심심찮게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때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로 서방 진영을 비롯한 60여 개국이 불참했다. 또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모스크바 올림픽에 대한 공산권 국가들의 맞불 보이콧이 이어졌다. 냉전에 의한 보이콧이 있을지언정 올림픽은 계속되었다. 반쪽짜리 올림픽을 하는 서로는 감히 평화의 노래를 불렀다.
1972 뮌헨 올림픽 때 일이다. 선수촌에 팔레스타인 테러 집단이 침입했다. ‘검은 9월단’은 이스라엘 선수 2명을 즉시 사살했다. 9명은 인질로 붙잡혔으나 종국에는 전원 사망했다. 추모의 시간을 가지며 올림픽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34시간 후 IOC 회장 에이버리 브런디지가 발표했다. "올림픽은 계속되어야 한다! (The Games must go on!)" 테러 집단의 농간에도 굳건한 올림픽은 인류의 고난과 진전에 대한 메시지였다. 좌우지간 올림픽은 진행되었다. 선수들의 안전을 해칠지라도 경기는 계속된다. 국제 갈등으로 보이콧이 있어도 경기는 계속된다. 신변의 위협, 국가 간 균열의 조짐, 그 무엇도 올림픽의 대의를 막을 수 없었다.
오륜기가 허락하지 않는 것들을 위하여
고대 올림픽은 곧 휴전이었다. 경기가 진행될 때만큼은 전쟁을 멈추고 잠깐의 평화를 맞이했다. 현대 올림픽도 이러한 정신을 계승해갔다. 그러나 ‘올림픽 휴전(Olympic Truce)’의 진정한 의미는 역사의 풍파 속에 힘을 잃었다. 언젠가 올림픽은 구실이 되었다. 그 순간을 위해 무언가는 희생해야 했다. 또 언젠가 올림픽은 핑계가 되었다. 이번에도 그 순간에 가려 무언가는 밀려나야 했다. 그럼에도 올림픽은 꿋꿋이 평화와 화합을 이야기한다. 이따금씩 그 목소리는 너무도 맹목적이어서 경기장에 한정된 평화만을 좇았다. 소리 없는 전쟁이 늘 올림픽 주위를 맴돌았다. 누군가는 절대적인 평화의 외침에 묶여있을 뿐, 신호만 바뀌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했다. 누군가는 무언의 입막음에 숨이 눌려 있을 뿐, 축제가 끝나면 참았던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동물도 약자도 나 몰라라 하는 올림픽은 누구를 위한 올림픽인가. 우정 대신 국가이념 싸움에 바쁜 올림픽은 무엇을 위한 올림픽인가. 결국 올림픽이 반기는 것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허망함이 밀려온다. 올림픽 휴전의 본 의미는 지금은 꿈꿀 수 없는 그 옛날 어느 기적이 되었다.
그러나 올림픽은 우리의 모든 생에 걸쳐 또 찾아올 것이다. 뜨겁고 차가운 4년의 기다림 끝에 우리는 악의 없이 열광하고, 환호하며, 눈물지을 것이다. 반복되는 메가 이벤트 속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잘못된 역사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뿐이다. 성화가 빛날수록 어둠은 짙어진다. 그렇다고 어둠이 무(無)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 혼자 타오르는 성화로 이제는 어둠을 밝힐 때다.
¹ 주성하, 「리우올림픽 마스코트 ‘비명횡사’ 논란」, 『동아일보』, 2016.06.23
² 근대5종은 한 선수가 펜싱, 수영, 승마, 레이저런(사격, 육상)을 모두 소화해야 하는 경기다. 5개의 종목별 점수를 합산하여 총득점이 가장 높은 선수가 승리한다.
³ 서울대저널 ‘상계동 올림픽, 폐막은 없다’ 제목 참고
⁴ But the Games gave the clique of white developers who ran them the excuse to engineer a new ethnic cleansing programme. (『Guardian』, 2007.06.12)
⁵ 환경 운동가 조지 몬비오는 올림픽 강제 철거와 관련하여 “The games have become a licence for land grabs(올림픽은 토지강탈의 면허증이 되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참고문헌
권오경, 「‘환경올림픽’이라더니...경기장 건설에 열대림 남벌」, 『그린포스트코리아』, 2018.12.03
김경진, 「평창올림픽 알파인스키장 허물고 가리왕산 복원 시작한다」, 『내외뉴스통신』, 2021.06.17
김남권, 「비둘기 불타고 재규어는 사살…동물들의 올림픽 흑역사」, 『연합뉴스』, 2016.06.26
김동찬, 「올림픽유산 주민대책위 "정선 알파인경기장 전면복원 반대" 집회」, 『연합뉴스』, 2021.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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