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안
[scene #1] 학교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친다. 학생들이 모여 있다.
A : “하루는 내가 학원 끝나고 집에 가는데 비가 미친 듯이 쏟아졌어. 우리 집이 골목길에 있거든? 어떤 여자가 그 비를 다 맞으면서 서 있는 거야. 우산 밖으로 눈만 굴려서 흘깃 봤지. 근데 이상하게, 하나도 안 젖어 있어. 게다가 그 여자 근처를 지나가니까 왠지 서늘함이 훅 끼치는 거야. 좀··· 께름칙하잖아? 그래도 감기 걸릴 수도 있고, 꼭 사연 있는 사람 같길래 내가 "우산 씌워드릴까요? 어디 가세요?" 이렇게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나를 빤-히 보면서 "들어가도 돼요?"라고 묻더라. 당연히 그러라고 했지. 근데 또 물어봐. "들어가도 돼요?" 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말했어. 근데··· 또 물어봐. "들어가도 돼요?"
"네, 얼른 들어오시라니까요!"
"세 번 말했 네?"
그러더니 그 여자 입이 확! (A가 친구들을 겁준다)”
B : 으악! 야, 하필 비도 오는데 그런 걸 가져오냐, 더 무섭게. 그럼 우리 한 번씩 다 얘기한 거지?
C : 근데 이상하네, 왜 사람은 셋인데 이야기는 네 개지···?
(줌 아웃되며 학생들을 비춘다. 네 명의 뒷모습.)
비정상이여, 괴담이 되어라
공포 없는 괴담을 괴담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괴담 속 어떤 요소가 공포를 유발하는 걸까? 대부분의 괴담은 ‘나’의 처지를 들려주며 시작한다. 곧이어 ‘나’는 낯선 환경에서 비현실적인 존재를 마주하고, 공포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분투한다. 예측 불가능하기에 무엇보다 위험한 미지, 그 공포에 화룡점정으로 더해지는 것이 '비정상적'인 존재의 출현이다. 그것의 비일상적인 면모는 찝찝함과 거북함, 불쾌함을 자아낸다. ‘나’는 그것과 접촉해선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한데,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는 그것들. 어딘가 낯이 익지 않은가?
낯설고 기괴하며 위협적인 괴물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인간’인지 정의해야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물질성과 특성의 저편에서 괴물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낯선 것은 ‘보편’의 경계로부터 생겨나고, 기괴한 것은 ‘정상성’을 상정함으로써 탄생한다. 예컨대, 몸통에 한 개의 머리와 사지(四肢)가 달린 것을 ‘정상적인 신체’로 정의한다면, 괴물은 두 개의 머리와 네 개의 다리를 가질 테다. 그렇게, ‘인간성’의 경계 바깥으로 밀려난 것들이 응축되어 ‘괴물’이 된다. 또, ‘인간’의 형상은 시대와 사회, 정치적 흐름 등에 따라 달리 규정되므로 ‘괴물’의 특질 또한 더 ‘비인간적’으로 끊임없이 변전한다. 과거에는 혼기에 찬 ‘처녀’가 결혼하지 못한 채 죽으면 ‘손각시’라는 악귀로 화하리라 믿고 두려워했지만, 혼인을 필연으로 여기는 풍조가 변화하면서 ‘처녀귀신’의 위명이 사라진 것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이지(理智)를 잃고 닥치는 대로 인간을 학살하는 광인은 ‘과학적 이성’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특히, 초기 서구 오컬트 영화는 과학적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불가지의 문제를 발생시킴으로써 공포심을 자아냈다. 그러나, 광인이 늘 ‘괴물’로 표상되지는 않았다. 근대 이전에 그들은 신과 인간의 연결을 돕고 신의 말을 전하는 ‘선각자’로 여겨지기도 했다.1) 물론, 그 역시 그들을 타자이자 비인간으로 주변화하는 것이다. 다만, 당시의 사회는 그들을 도덕적 타락의 산물이나 온갖 부정(不正)의 원흉으로 치부하지는 않았다.2) 이러한 풍조는 의학과 과학을 수단으로 사회적 소수자에게 ‘비정상성’을 부여하려던 근대 권력자들의 시도로부터 형성되었다.3) ‘비정상’을 규정하고 분리함으로써,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사람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공고히 한 것이다.4) 결국, 정상과 비정상을 분류하고 분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만연해지며 ‘광기’는 통제와 감금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근대에 전환을 맞이한 건 광인만이 아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같은 ‘기형인’은 광인과 마찬가지로 ‘신의 뜻이 담긴 존재’로 이해되기도 했으나, 상술한 시대에 접어들며 단지 ‘결함’만을 상징하는 존재로 격하되었다. 요지는, ‘광기’와 ‘기형’을 접할 때 느끼는 감정들이 사회문화적 배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 (좌)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블루레이 포스터 ⓒThe creation collection|(중) <워킹데드 17> 만화 표지 ⓒ황금가지|(우) 영화 <좀비랜드: 더블 탭> 포스터 ⓒ네이버 영화
대중적인 괴물 중 하나인 ‘좀비’는 되살아난 시체에 대한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초기의 좀비는 단지 ‘움직이는 시체’일 뿐이었지만, 가상의 전염병으로 인해 좀비가 등장하는 세계관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 ‘생존’과 ‘폭력’이라는 키워드가 자리 잡는다. 좀비의 흉측한 외관과 이지를 잃은 듯한 행동은 즉각적인 혐오를 촉발하고, 사람을 공격해 시체를 파먹는다는 설정은 인간 집단의 비윤리성과 폭력성을 합리화한다. 좀비 장르가 ‘호쾌하고 자극적인 액션’을 목표 삼을수록, 좀비의 ‘비인간성’은 강조되며 확대된다. 불붙은 몸이 끔찍하게 타들어 가며 뒤틀리는 걸 바라보고, 형체가 남지 않도록 야구 배트를 휘두르고, 사지를 분리하듯 찢어발겨도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들은 '그래도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좀비의 이분법에서 한때 ‘인간이었던’ 감염병 환자들은 약자성을 삭제당하고 ‘병원체’와 동일시된다.5)
코로나19가 ‘우한 폐렴’으로 불릴 무렵, 세계적으로 특정 집단을 향한 무차별적 혐오 범죄가 급증했다. ‘낯선 이’들은 대로변에서 폭행당하거나, 기피와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인종과 국적부터 종교나 계층, 직업에 이르기까지 의심되는 집단은 전부 배격되었다. 타자를 ‘감염병 환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감염증’ 자체로 인식한 것이다.6) 사회적 규범이 붕괴하고 도덕적 혼란이 발생했을 때, ‘인간’이 집단적 폭력을 자행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모습은 어쩐지 ‘좀비’ 세계관 속 군상과 겹쳐 보인다.
상술한 경우는 장르적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허구의 괴물을 다루지만, 실제 역사에도 ‘괴물’을 만들어냄으로써 폭력을 정당화한 예시가 존재한다. 바로, 중세 유럽에서 자행된 ‘마녀사냥’에 관한 이야기다. ‘마녀’와 ‘마녀사냥’ 사건의 실체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 현상에서 중점적으로 살필 부분은 ‘실체’가 아니라 학살이 정당화된 과정이다. 당시 폭력은 가부장적 질서와 지배 종교에 반하거나 여성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는 비규범적 존재들에게 향했다. 악마와 결탁했다는 둥 당시 터부시되던 것들과 그들을 결부하는 ‘이야기’는 일종의 도시 괴담처럼 불어났다. 마침내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갈 마녀를 죽이자는 강변이 힘을 얻기에 이르렀고,7) ‘학살’은 정의와 윤리를 수호하는 인간의 저항으로 둔갑했다. 마녀가 사특한 힘을 가졌다는 ‘괴담’이, 인간에게 ‘선’을 부여하고 ‘인간적 가치’를 되새김으로써 집단의 결속을 도모하는 서사적 장치로 쓰인 것이다. 괴물에게 악한 성질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비윤리성과 폭력성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숭고한 것으로 변양하려는 욕망은 시대와 맥락을 불문하고 존재해 왔다.
21세기 괴담록
앞서 살펴본 ‘마녀사냥’은 계몽되지 않은 대중이 불러온 참사로 여겨지곤 한다. 특히, ‘선과 악’ 같은 신학적 키워드가 부각되어 현대에서는 ‘마녀사냥’과 같은 참사가 “상상도 못 할 이야기”로 회자된다. 그러나, 소수자를 ‘괴물’로 둔갑시키고 그 삶을 ‘괴담’으로 만드는 일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자행되고 있다. 2018년 6월의 광장에는 “국민이 먼저다!”라는 구호가 울렸다. 격화되는 내전을 피해 제주에 들어온 예멘난민 500여 명을 추방하라는 요구였다. 사태는 대형 언론이 난민법을 악용하는 ‘가짜 난민’의 존재를 앞다투어 보도함으로써 시작되었다.8) 이후 난민혐오를 조장하는 가짜뉴스가 폭증했고, 그들이 삶터를 떠나게 된 배경은 지워진 채 ‘이슬람 난민’이라는 상상 속 괴물이 탄생했다. 『낙인찍힌 몸』의 저자 염운옥이 지적했듯, 예멘난민 사태는 “이슬람에 대한 인종주의이자 반아랍 인종주의”인 이슬람공포증(Islamophobia)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9)
▲ 예멘난민 수용 반대 집회 현장. “국민은 안전을 원합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한겨레
인종주의는 타자의 ‘속성’으로 그를 판단하고 분류하며 배제하는 근대 서양의 이데올로기다.10) 이슬람에 대한 인종주의는 무슬림을 ‘인종화’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제2의 피부’라고 할 수 있는 의복과 관습이 그 ‘속성’이 된다.11) 이에 따라, 이슬람 문화권의 복장이나 전통을 따르는 자는 그의 살아온 배경이나 피부색·정체성과 관계없이 (서구의 시선에서 재구성된) ‘무슬림’이라는 ‘야만스러운 인종’으로 낙인찍힌다. 혹자는 무슬림이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와 ‘습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을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무던히 반복되는 인종주의의 편린에 불과하다. 예멘난민을 향한 핍박과 억압은 이슬람 교리가 폭력적·극단적이고 여성차별적이라는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에게는 폭도·테러리스트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고, 이슬람은 불온하며 극단적인 사상으로 왜곡되었다. “그들을 발견한 곳에서 그들을 살해하라”라는 한 구절은 ‘부당한 폭력을 저지르는 자에게 저항하기 위한 투쟁을 허용한다’라는 맥락을 삭제당한 채 이슬람의 폭력성을 입증하는 데 쓰였다.12) 아브라함계 신앙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심판의 날’은 이슬람이 극단적인 종교 전쟁을 계획한다는 소문으로 와전되었다.13) 네 명의 여성과 결혼하라는 구절은 당시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이들 간 협력과 화합을 도모하라는 맥락과 배경에서 나왔으나, 역시나 역사적 배경은 고려되지 않았다.14)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한 곳에서 성차별과 전쟁·테러가 교리로써 정당화된다면, ‘이슬람’을 수단 삼아 권력을 유지하려는 무슬림 공동체의 권력자들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의 구절은 방대한 해석의 여지가 있기에, 그 정론을 정하는 데 숱한 토론과 고민이 요구된다. 이슬람의 경전에는 살인을 종용하고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구절이 담겨있지 않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벌어지는 성차별과 폭력은 그곳의 사회문화적 악습을 철폐할 때 해결할 수 있다. 히잡 쓴 여성을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로 이해하고, 단지 히잡이라는 문화를 소거하고자 한다면 ‘무슬림 여성’이 실제 삶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변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신식민주의적인 사고에 종속된 폭력일 뿐이다.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정서는 '국민'과 '난민'의 범주를 차별적이고 편협하게 구성한다. 외부의 침범에 대항하는 애국적 주체인 '국민'과 도덕적·종교적으로 타락해 국가를 위협하는 '난민'의 이미지가 집단 내부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삭제하는 것이다. '국민은 안전을 원한다'라는 문구와 '국민보호'라는 핵심어 역시 이러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탄생한다. 이어 약자를 향한 일방적 폭력을 합리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에 이른다. 상술한 것들은 ‘마녀사냥’과 일견 닮아있다. ‘마녀’에 대한 공포와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마녀사냥’을 합리화한 것처럼, 난민을 악마화함으로써 일방적인 폭력을 합리화한 것이다. 이러한 집단의 정서적 저변은 타자에 대한 공포로 이루어져 있다.15) 두려움에 빠진 ‘나’를 가장 유약하고 위태로운 ‘잠정적 피해자’의 위치에 두고, 모든 행위를 ‘생존’을 갈구하는 발버둥으로 치환한다.
21세기 괴담은 ‘나’의 처지만 고려하는 화자에게서 시작된다. 괴물은 그가 상대를 타자화하고 비인간화하며 탄생한다. 상상 속 괴물을 마주하며 두려움에 떠는 ‘나’는 생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지난한 싸움이 무색하게도, 종장에는 칼날 같은 말에 베여 쓰러진 사람만이 널브러져 있다. 선악이 명백한, 전개가 명약관화한 사건은 간편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입체적이지 않은 인물이 없으며 가부를 판명하는 명료한 기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복잡한 사회를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폭력이 된다. 문학평론가 박인성은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그 사람이 된다”라고 지적하며, 의식적이고 조작적으로 형성되는 현대 사회의 관계성 안에서 우리는 자신이 취하는 위치가 자의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경고한다.16) 그의 말처럼 타인을 평면화할 때, ‘나’와 타자의 위치와 맥락을 사유하지 않을 때, 그 두 존재 사이에 어떤 권력관계가 형성되는지 성찰하지 않을 때 사고가 전도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분리와 격리를 통해 이룩한 평화가 온전한 평화일 수 있을까요. 자폐인들을 배제한 공동체에서는 ‘정상적인 몸’에서 벗어난 인간은 누구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지체장애인도, 성소수자도, 이주민도 “특수학교에 보내든지, 홈스쿨링을 시키든지, 아니면 외국으로 가세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어떤 기준으로 인간의 몸을 서열화하고 열등한 몸을 배제하는 원칙을 고수하는 사회라면, 다른 기준으로 ‘열등한 몸’이 되는 소수자들 역시 차별할 수 있을 테니까요.”17)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이 형성하는 구획을 권력 배분의 기준 삼을 수는 없다. 그것은 ‘비인간’에 대한 차별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숭고한 가치’도 아니다. 정의가 무엇을 배제하고 또 포함하는지의 여부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것의 말뜻인 ‘인간의 성질’,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사회와 타자를 직면하는 자세일 테다. ‘내게 무해한 세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이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세계는 결코 무결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살펴야 하는 것이다. 발 딛고 있는 세상이 분리와 격리로써 세워진 곳은 아닐는지 말이다.
괴담같은 세계에서
[scene #2] 도로
8차선 도로 위로 여럿이 떼를 지어 기어가며 ‘괴성’을 낸다. 당황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는 행인들. 사방에서 클랙슨이 울린다. 그럼에도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무척이나 불편해 보이는 몸짓, 8차선 도로에는 몹시 이질적인 느릿느릿한 속도. 틈 없이 굴러가던 도시 한복판이 일순간 경직된다. 움직이는 것은 오직 ‘그것’들과 펄럭이는 깃발뿐이다. 사방에서 울리는 클랙슨과 ‘그것’들의 ‘괴성’에 얼굴을 찌푸리는 시민1, 긴급 전화를 건다. 민원이 쏟아졌는지 연결은 지지부진하다.
시민1: (피식 웃으며) 함께 살아갈 권리? 무슨 소리야, 거기 다 살아있고만.
(시위를 뒤로하고, 버스에 오르는 시민1)
괴담 속 괴물들은 자꾸 알 수 없는 언어로 소리치고, 무언가를 부수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그들은 왜 그렇게 행동할까? 그들은 ‘정상 사회’에서 공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규범에 맞지 않는 요소를 노출한 사람은 으레 비가시화되거나 경멸당하기 마련이다. 사회 바깥으로 밀려나고, 비일상적이며 비정상적인 존재로 취급된다. 설령 부조리에 저항하더라도, 그 목소리는 쉽게 묵살당하거나 호도된다. 결국, 존재와 삶을 부정하는 사회에 맞서기 위해서는 행동할 수밖에 없다. ‘정상 사회’의 평화를 깨뜨리는 ‘괴물’은 없다. 단지 이 세계가 ‘소수자’를 괴물 취급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을 뿐이다.
“그 사회가 “당신은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당신을 존엄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가학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요. 이러한 현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수자들이 사회 곳곳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합리적인’ 근거가 되어,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18)
▲ (좌) 활동보조인제도화 촉구 시위, 중증장애인들이 한강대교를 기어서 행진하고 있다. ⓒ에이블뉴스|(우) 같은 시위, 행진하는 도로에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고 적어두었다. ⓒ에이블뉴스
2006년, 서울시는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위한 ‘활동보조인서비스’의 예산을 반액으로 삭감했다.19) 사실상 중단 선고였다. 누구도 관심갖지 않는다면, 볼 수밖에 없도록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결심 아래 사진 속 서른여 명의 중증장애인은 서울 용산구의 위치한 한강대교를 기어서 건너는 시위를 벌였다. 국가의 결정으로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바닥을 기어갈 수 없는 이들은 목에 칼을 차고, 휠체어와 신체를 쇠사슬로 엮은 채 도로를 지켰다. 누군가는 ‘교통을 방해하지 말라’며 그들을 매도했고, 어떤 이는 ‘뜻은 알겠으나, 온건한 방식으로 시위하라’며 진을 뺐다. 이에 시위를 주도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한 활동가는 “당신은 30분 발이 묶여 있는 걸 못 참지만, 우리는 평생을 이렇게 발이 묶인 채 살아왔다.”라고 응수했다.20)
“활동보조인이 얼마나 필요한지 삭발로 알릴 수 있다면 머리카락이 아니라 몸이라도 못 자르겠는가.” (최강민, 당시 32세, 뇌병변장애1급)21)
약 20년이 지난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떨까. 2025년 1월 2일, 새해의 첫 출근길 지하철에 전장연이 탑승했다. 서울시에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 400명에 대한 해고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건강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22) 국가와 지자체가 장애인이 지역사회에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라는 외침이다. 2024년에는 100일간 지하철 내부를 기어다니며 장애인권리스티커를 붙이고 ‘동료시민’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포체투지(匍體投地) 시위를 진행했다. 포체투지는 오체투지가 불가능한 중증장애인들이 기어가며(기어갈 포) 투쟁하는 시민불복종 행동이다. 중증장애인들이 바닥을 기는 행위를 ‘구걸하는 행위’에서 ‘권리행동’으로 전유한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전장연의 시위를 “시민들을 볼모 잡는 행위”라고 낙인찍었고, 서울시는 서울교통공사의 폭력적인 시위 탄압을 방조했다. 환경보건학자 김승섭의 지적처럼, 정부와 정치인들이 시민의 범주에서 장애인을 제외시키고, 그들을 향한 ‘시민’의 불만과 증오를 폭증시키는 데 역량을 집중하여 장애인이 ‘존중받을 수 있는 시민’의 범주에서 멀어지도록 한 것이다.
8시 20분, 교통약자 좌석에 앉은 승객이 낮게 읊조린다. “출근길에 왜들 이래. 집에 가서 해.” 박현은 이 말을 못 들은 것 같다. 박현이 말한다. “집에만 있기 싫어서,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살기 싫어서, 탈시설운동을 시작한 김진수 동지가 오늘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탈시설해서 행복하게 살다가 오늘 떠납니다.”
8시 22분, 한 승객이 활동가들을 향해 말한다. “길 막지 말고 비키세요.”
출근하는 사람들로 조밀한 열차 안에선 모두가 모두의 길막이다. 그 사이에 장애인이 탔을 뿐이다. 장애인의 자리가 없는 곳에서 길을 내어달라 했을 뿐이다. 그 길을 연 김진수는 세상을 떠났고, 그와 뜻을 함께하는 장애인들은 오늘도 막힌 길을 열어간다. 세상에는 장애인의 자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23)
▲ (좌) 의료진들이 JP Morgan Chase의 런던 엠뱅크먼트 사무실 앞에서 화석 연료 투자에 반대하는 다이인(Die-in) 시위를 벌이고 있다. ⓒHealth for XR 2025 |(우)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기습 다를 진행하고 있는 전장연 활동가의 모습.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구조적 부정의에 의한 죽음은 목격되지 않고, 사회는 태연자약하게 굴러간다. 다이인(Die-in)은 참가자가 일정 시간 동안 바닥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평화적·비폭력적인 시위다. 이들은 도로에, 박물관에, 지하철에 널브러져 그 죽음을 가시화한다. 누군가의 사인(死因)이 심장마비, 뇌출혈이 아니라 기후재난을 외면하는 정부와 기업, 장애인의 생존권을 저버린 사회임을 명명백백히 알리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를 멈춰 세우는 걸림돌이 됨으로써 ‘방해하지 말라’는 말의 함의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가치’들이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할 때 인간의 신체와 물질성이 잊히고 있다는 점을. 현대 사회가 환경을 파괴하고, 여성을 착취하며, 장애인의 인권을 저버림으로써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어떤 요구는 ‘생떼’로 낙인찍힌다. 그들의 목소리는 ‘합리성’으로 재단 당하고, 억지를 부린다는 말로 덧씌워진다. 투쟁이 주장하는 변화 내용과 요구하는 방식 모두 비이성적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존재를 인정’한다지만, ‘존재하는 데 수반하는 것’은 철저히 외면한다. ‘열등한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만으로 사회가 평등해졌다는 착각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경제적 재분배 상태를 이룩하지 않은 채 소수자의 문화와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은 허울뿐인 평등에 불과하다.24)
이제는 합리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성찰할 때다. 사회가 무엇을 ‘정상’으로 두고, 어떤 주장을 ‘합리적’이며 ‘실현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누구의 음성을 ‘말’로 인정하고 있으며, 어떤 집단의 감각에 부응할 때 합리적인 것으로 여기는가. 약자의 요구에 ‘맥락’을 지우고, 기득권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면 타자의 목소리는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호도와 왜곡은 복잡성을 지워낸 세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타인의 정체성을 평면화하고, 현실의 입체성을 평탄화함으로써 회색지대를 지워내면 모든 것들이 단순명료해진다. 다만, 기득권을 중심으로 짜인 ‘경제성’과 ‘합리성’만을 고려하는 사회에서는 어떠한 개선이나 정의도 이룩할 수 없을 뿐이다.
결국 '타자'와 마주치는 것은 한순간일 뿐,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일상’을 영위한다. 그를 괴물로 여김과 동시에, 그가 존재하는 세계를 '현실'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자신을 괴물로 여기는 ‘현실'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더 공포스럽지 않겠는가. 괴담은 결국 낯설고, 잘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서 촉발된다. 나와 다른 존재를 이상한 것, 미지의 것, ‘왠지 싫은’ 것으로 정의 내리는 순간 사회적 소수자, 약자의 목소리는 괴물들의 괴성처럼 들릴 뿐이다. 박인성의 말처럼 우리는 공동체 내부에서 의도적으로 타자와 접촉하고, 마찰하며 서로를 자극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25) 결국, ‘미지의 공포’는 단지 ‘앎’으로써 해소되는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자, 이제 당신의 세상을 둘러보자. 복잡한 사회에서 자신과 타자의 위치와 그 역학을 이해하려는 시도만이 당신의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다. 괴담 속 세계 같은 사회를 회피해서는 무엇도 바꿀 수 없다. 폐단과 병폐를, 헤아리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복잡한 이야기들을 마주하고, 그와 마찰하며, 꿋꿋이 경청할 때 인간을 ‘괴물’ 취급하는 세계가 사라질 것이다. 괴담은 언제나 당신 곁에 있다.
1) 미셸 푸코는 광인들의 지혜가 사탄의 영역과 세계의 종말을 예견한다고 언급했다. 광인이 특유의 능력으로 “더없는 희열, 최상의 처벌과 지상에서의 최고의 권능과 지옥 같은 타락을 예견”한다는 것이다. 광인이 감금과 분리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는 보일 따름이었다. 난간의 저쪽에서. 광기의 현존 또한, 광기와 어떤 관계도 갖지 않고 어떤 유사성도 거부하는 이성의 눈 아래서, 이성과의 거리를 유지한 현존이었다. 광기는 사물로서 관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제 광기는 우리 내부의 괴물이 아니라 이상한 메카니즘의 동물, 오랫동안 인간을 억압해 온 야수성이 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Michel Foucault, 김부용 역. (1991). 『광기의 역사』. (이성재. 2022. 재인용).
2) 위의 글, 103쪽.
3) 위의 글, 102쪽
4) 위의 글, 133쪽.
5) 박성호. (2021). 좀비 서사의 연주와 감염병의 상상력. 현대소설연구, 0(83), 357-358쪽.
6) 위의 글, 359쪽.
7) 주경철. (2013). 마녀 개념의 형성 연구: 『캐논 에피스코피』에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까지. 서양사연구, 0(48), 47쪽.
8) 전홍기혜. (2019). 한국 언론의 난민 보도를 통해 본 ‘혐오와 배제의 정치학’. 젠더리뷰, 0(51), 56-57쪽.
9) 염운옥. (2019). 낙인찍힌 몸. 파주: 돌베개. 361쪽.
10) 위의 글, 29쪽.
11) 위의 글, 285쪽.
12) 이상아·김규리. 「이슬람에 대한 우리들의 다섯 가지 오해와 편견들 1편」. 『난민인권센터』. 2019.09.23.
13) 이상아·김규리. 「이슬람에 대한 우리들의 다섯 가지 오해와 편견들 1편」. 『난민인권센터』. 2019.09.23.
14) 이상아·김규리. 「이슬람에 대한 우리들의 다섯 가지 오해와 편견들 2편」. 『난민인권센터』. 2019.09.23.
15) 위의 글, 325쪽.
16) 박인성. (2024).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 서울: 나비클럽. 8쪽.
17) 김승섭. (2023).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서울: 동아시아사. 63쪽.
18) 위의 책, 125쪽.
19) 소장섭. 「장애입자립생활센터 예산 증액 무산」. 『에이블뉴스』. 2006.12.28.
20) 채은하. 「“활동보조인 없는 중증장애인, 이렇습니다”」. 『프레시안』. 2006.04.27.
21) 강서희. 「"한국사회가 장애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프로메테우스』. n.d. (강혜민. 2013. 재인용).
22) 이동권 보장을 위해 달성되어야 하는 것은 ‘1역 1동선’이다. 이는 교통약자가 타인의 도움 없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하나의 동선(지상↔대합실↔승강장)으로 이동할 수 있는 체계를 의미한다. 현재 휠체어 이용자의 이동을 위해 설치되어 있는 리프트는 고장이 잦아 사용하기 어려우며, 안전장치가 미흡해 장애인의 안전을 위협한다. 서울시는 2022년까지 서울교통공사 관할 지하철 전역에 ‘1역 1동선’을 실현하리라 약속했지만, 입장을 번복하며 엘리베이터 설치를 미뤘다. 서울교통공사가 이에 항의하는 전장연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있으나, 서울시는 그 행태를 방조하고 있다. 3년이 지난 현재에도 서울교통공사 관할 지하철 중 신설동역, 까치산역, 고속터미널역에는 ‘1역 1동선’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았다.
23) 강혜민. 「“다시 돌아가더라도 기꺼이” 탈시설 맏형, 김진수의 유언」. 『비마이너』. 2024.08.02.
24) 염운옥, 앞의 책, 229쪽.
25) 박인성, 앞의 책, 11쪽.
참고문헌
강혜민. 「“다시 돌아가더라도 기꺼이” 탈시설 맏형, 김진수의 유언」. 『비마이너』. 2024.08.02.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6753(2025.02.01. 접속).
강혜민. 「7년의 시간, 씨앗 되어 흙 속에 심다.」. 『비마이너』. 2013.05.16.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5349(2025.02.01. 접속).
김소영. 「전장연은 왜 ‘굳이’ 루브르박물관에서 “STOP 오세훈”을 외쳤을까」. 『비마이너』. 2006.04.27.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7363(2025.02.01. 접속).
김승섭. (2023). 타인의 아픔에 응답하는 공부. 서울: 동아시아사.
김유미·신지은. 「<포토>활동보조인 제도화 한강대교 시위」. 『에이블뉴스』. 2006.04.27.
https://www.abl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12(2025.02.01. 접속).
박성호. (2021). 좀비 서사의 변주와 감염병의 상상력. 현대소설연구, 0(83), 341-366.
박송이. 「서울시 ‘선택적’ 약자와의 동행···일자리 잃은 중증장애인들」. 『경향신문』. 2024.01.27 https://www.khan.co.kr/article/202401270900021(2025.02.01. 접속).
박인성. (2024).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 서울: 나비클럽
소장섭. 「장애입자립생활센터 예산 증액 무산」. 『에이블뉴스』. 2006.12.28. https://www.abl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438(2025.02.01. 접속).
염운옥. (2019). 낙인찍힌 몸. 파주: 돌베개.
이상아·김규리. 「이슬람에 대한 우리들의 다섯 가지 오해와 편견들 1편」. 『난민인권센터』. 2019.09.23. https://nancen.org/1971(2025.02.11. 접속).
이상아·김규리. 「이슬람에 대한 우리들의 다섯 가지 오해와 편견들 2편」. 『난민인권센터』. 2019.09.23. https://nancen.org/1974(2025.02.11. 접속).
이성재. (2022). 근대적 괴물과 기형인의 탄생-16~17세기 이형 신체에 대한 혐오와 통제를 중심으로-. 서양사론, 0(154), 99-137.
이창신. (2009). 역사적 집단 광기 현상의 실체와 여성사적 재조명–중세 말 근대 초기 유럽사회의 마녀사냥을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12, 73-96.
전홍기혜. (2019). 한국 언론의 난민 보도를 통해 본 ‘혐오와 배제의 정치학’. 젠더리뷰, 0(51), 56-57.
주경철. (2013). 마녀 개념의 형성 연구: 『캐논 에피스코피』에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까지. 서양사연구, 0(48), 45-81.
채은하. 「“활동보조인 없는 중증장애인, 이렇습니다”」. 『프레시안』. 2006.04.27.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0025598?sid=102(2025.02.01. 접속).
황금비. 「70m 사이로... ‘예멘 난민’ 반대 집회와 찬성 집회가 열렸다」. 『한겨레』. 2018.06.30.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1336.html(2025.02.01. 접속).
Dominic. 「19th October 2023: Health for Extinction Rebellion stage a Climate Inquest and ‘die-in’ at the entrance of JP Morgan Chase’s embankment offices, London」. 『Health for XR 2025』. 2023.10.18 https://healthforxr.com/climate-inquest-die-in-at-jpmorgan-chase/(2025.02.01. 접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