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돌이표
2024년 12월 7일. 탄핵안 표결을 앞둔 국회의사당 앞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멀리서 보면 머리통뿐인 그곳에 나 역시 있었다. 찬기가 올라오는 아스팔트 위, 국회 내부를 중계하는 전광판을 바라보고 앉았다. 발언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입을 모아 외쳤다. 운율을 담은 구호는 간결했다. 전광판을 바라보며 메신저 앱을 켜 친구들에게 연락을 보냈다. 문득 생각했다. 여기서 내 ‘의견’이랄 건 작은 화면 안에만 있었다. 한마음 한뜻으로 모인 이들 속에서 허락받을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자꾸만 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울분과 두려움, 불안이 배출되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틈없이 빽빽한 ‘국민’들은 몸으로 연결된 채였다. 그 사이 내 자리는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날 나는 왜 여의도로 갔을까?
일상의 몸
지난 2022년 윤석열이 제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약 2년, 각계각층의 삶은 저마다의 어려움에 놓였다. 오르는 물가, 낮은 지지율만을 증거로 대는 건 외려 저마다의 삶을 흐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윤석열 대통령 후보 시절 공약이라는 이름 아래 폐지가 논의되었던 여성가족부 장관은 열 달째 공석이며, 서울시는 퀴어문화축제를 위한 서울광장 사용 신청을 불허·취소하는 등 행사 목적에 따라 차별행정을 선보였다.1) 민주노총 간부 고 양회동 씨는 정부의 노동조합 탄압에 항의하며 분신했다. 2024년 6월 아리셀 공장 화재 폭발로 인한 사망자 중 대부분은 이주노동자였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등 ‘4·20 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은 ‘장애인의 날’에 지하철 승강장에서 장애인 차별 철폐를 외치며 단체행동에 나서는 과정에서 체포되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에 대한 탄압 또한 지속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집회·시위는 기본권으로서 보장되어야 하는 보편의 것임에도,2) 투쟁의 주체는 '누군가'들로 어느 정도 특정되어 있다. 여성, 노동자, 퀴어, 장애인, 이주민 등 “나중에”3)라는 말조차 없을 정도로 후순위에 밀려 있는, 투쟁이 일상이 되어 버린 소수자들 말이다. 그러니 집회·시위 및 결사에 대한 탄압은 이들 존재 자체에 대한 압제다. 혐오와 차별은 공권력의 의지를 통해 전면으로 드러난다. 윤석열은 여러 차례 집회시위 참가자들을 ‘엄중처벌’하라는 데 더해 포상 의지를 보여 주기도 했다. 2023년 5월 23일 국무회의 중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의 집회에 대해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고 공공질서를 무너뜨린”, “국민들이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한 데 이어 “그 어떤 불법 행위도 방치‧외면하거나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이며 불법 행위로 명명한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4) 또한 2024년 10월 21일 ‘제79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에서는 “불법 집회·시위”이자 “국민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라고 수식하는 등 지속적으로 집회·시위에 대해 불편과 불법의 이미지를 덧씌웠다.5)
세계화와 글로벌을 부르짖는 이 시대, 도시·국가정부는 해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각종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여타 자본과 교한 가능한 가치를 지니도록 만든다는 명목 아래 도시공간이 사람의 삶으로써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간과된다. 도시 자체의 가치가 높아진다 해도, 시민이 누려야 할 사용가치는 외려 약화되고 주변화되는 것이다.6) 이때 언급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도시에 대한 권리(the right to the city, 도시권)’다. 프랑스 철학자인 앙리 르페브르의 도시권 개념은 신자유주의 도시공간의 교환가치를 대체할 수 있는 사용가치와 공공성을 지향하는 대안적 도시공간의 단초로 재조명된다.7) ‘도시’는 다양한 거주자들이 공동으로 만들어 나가는 집합적 작품이다. 무언가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즉 자본이나 생산수단이 없더라도 일상·정치·관리·행정을 비롯한 생산과 관련한 의사 결정에서 실질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젠더·계층·종족·인종 등의 차이에 따라 중심부로부터 배제되고, 공간은 기능이나 계층에 따라 격리 및 단절되는 현실이다.
외치는 몸
‘도시에 대한 권리’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자유민주주의’에 항거하는 투쟁으로 읽어내는 시작점은 ‘도시민’이라는 정체성이다. 같은 도시에 거주하며 반복되는 경험은 공통의 의식으로 이어진다. 이는 도시민 간의 차이를 수용하고 용인하는 가능성으로 연결된다.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도시민으로서의 차이‘들’이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하고 또 이루어 내고자 하는 실천 말이다. 다만 선술한 여러 이야기처럼 목소리가 ‘도시’에서만 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편리와 이해 뒤의 삶과 생은 무시되는 상황에서, ‘새벽배송’ 서비스는 기업 경쟁과 정부의 비호로 수도권에 이어 전국으로 권역을 넓히고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조합원들이 해고를 거부하고 고용승계를 위해 투쟁하며 시작한 고공농성은 어느덧 1년을 넘겼다.8) 청주 서브원 오창 메가허브에서 일해온 화물노동자 3명 역시 고용승계 보장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에 돌입했다.9) 경상남도 밀양에서 송전탑을 두고 이루어진 행정대집행으로부터 10년이 지난 2024년에는 경남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청도345kV송전탑반대공동대책위 등 197개 단체가 ‘윤석열 핵폭주 원천봉쇄 결의대회’를 열었다.
결집한 이들은 일상에서 탈피해 자신만의 ‘사건’을 만들어 낸다. 국회의사당 앞 몇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시민들의 모임은 분명 ‘예외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살 수 없다’10)는 외침과 어느덧 ‘일상’이 된 탄핵심판에 대한 염원을 통상적이지 않은 국면에 따라 형성된 여론으로만 볼 수는 없다. 정쟁 중심의 정치를 일삼는 거대양당에 대한 비판으로만 치부해서도 안 된다. 여당이 교체된 지난 몇 년이 아닌, 지금껏 건재한 부정의와 불평등을 문제화하며 더 이상 “폐기 가능한” 존재로 취급되지 않겠다는 선언이니 말이다. 끈질기게 버티며 보다 큰 정의와 불안정성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살 만한 삶’에 대한 가능성을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여기에 있겠다는 의미다.11) 정치와 국가, 공권력에게 자신들의 삶을 주목하라 말하는 일은 곧 동료시민에게 함께하자는 제언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데 모인 신체들과 깃발들의 존재가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 읽어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집회는 모두가 놓인 상황을 공유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그런 상황을 함께 깨닫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12) 즉, 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언어의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모인다는 것’에서 실행되며, 광장은 이를 통해 만들어진다. 광장은 이렇듯 물리적인 공간에 등장한 몸으로서 비로소 장소로, 일상으로 곁에 머문다.
금속노조 @metalunion (2025.01.04.) 우리가 가면 길이 됩니다. 우리가 멈추면 광장이 됩니다. 우리는 함께합니다.13)
광장의 몸
그렇다면 어떤 몸이 광장의 주체로 나타나는가? 주체성은 획득되는 것인가? 이때 짚어 보아야 할 것은 ‘누가’ ‘어떤’ 몸을 ‘무엇’이라 지칭하는가다.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주체가 이데올로기의 호명(interpellation)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화 작업에 대해 설명하기 전, 이데올로기의 주요 기능은 지배의 재생산이며 이는 국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짚어야 한다. 가시적인 힘으로서 민중을 통제·억압하는 억압적 국가장치로는 경찰 및 군대가 있고, 비가시적으로 사회의 규범을 내면화시켜 체제를 안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는 종교, 가족, 교육, 문화 등이 있다. 후자는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기준 틀을 제공한다.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라는 범주로 구성해 낸다면, 주체는 특정한 국면에 따라 형성된다. 각 개인들은 호명의 객체가 됨으로써 주체로 자리매김하는데,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주체’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체는 어떠한 장소에 있기를 허락받는 호명의 과정에 따라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에 종속된다. 이렇듯 주체는 본질을 내재하지 않는다.
비록 알튀세르의 주체구성론이 인간이 아닌 구조에 천착한다는 비판을 받기는 하나, 탄핵 이후의 광장에서 등장한 주체들을 살펴볼 때 상술한 이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윤석열 탄핵을 요구했던 작년 12월, 국회의사당 앞은 주체 간의 차이가 가장 잘 누락되면서도, 자리를 찾고자 스스로를 목격시키고야 마는 투쟁의 현장이었다. 현장에서 일견 나타났던 ‘보편’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는 ‘흠집’이 났다. 어떤 존재의 출현은 그 자체로 파격적이고 급진적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윤석열 탄핵’이라는 구호가 가진 강력한 힘이, 그간 성원이 되지 못했던 소수자들을 한시적으로나마 광장의 주체로 ‘승인’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며 주요 언론사 및 일부 정치인은 새로운 정치행위자로서 ‘응원봉을 든 2030 여성’ 또는 ‘MZ세대 여성’을 이야기했다. 이는 여성이 형식상의 참정권을 가진 데에서 나아가, 실질적인 정치적 집단으로서 고려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부터 공공공간의 점유를 통해 또 다른 내일을 사유하고 실천하기에 이른 여성운동가/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몰역사화이기도 하다. 집단의 동질화는 역사가 없으리라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여성 등 소수자 내부의 차이가 누락되는 일은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빈번하고, 계보의 부재를 이유로 특정한 존재들을 집단화하지 않는 것은 이 집단이 주체화하게 두지 않겠다는 선포다. 세대론 역시 궤를 같이한다. ‘MZ’라는 호명은 세대 내 이질성을 간과하고 세대 간 불평등을 과장한다. 내부의 집합적 감정이 그 내·외부로부터 ‘설정’되는 순간 정치적 집단으로서 동질화되는 것이다.
이때 호명의 배경과 의도는 무엇일까? ‘여성’으로 묶이는 여러 젠더 비순응 행위자들을 비롯해, 시위 현장에 ‘적게 출현하는’ ‘2030 남성’ 중 성소수자의 비율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과연 논의될 수 있을까? 앨라이 및 퀴어 당사자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서로가 목격되겠으나, 이들은 지금껏 무/의식적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여전히 ‘새롭다’는 속성은 결국 ‘역사 없음’이라는 성격을 부착해 예속한다. 그러니 지배권력에게 이들은 표집할 필요가 없거나 표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목격과 호명은 개별 존재를 집단화해 공적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기에,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의무 내지는 역할을 외면하는 ‘정치적’ 움직임이다. 이것은 인식 가능성의 문제다. 어떤 주체들은 여전한 타자, 또는 인식조차 되지 않는 비체로서 배제되고 누락된다. 누군가의 ‘요구’는 선두에서 외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 의제인 반면,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합의’와 ‘허용’은 당장 중요하지 않은 일로 전락하기도 한다. 비체와 타자가 절대적으로 구분되지 않고,14) 민주주의가 ‘누구를 인민으로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점에서, 인식은 인정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알아차리지 않겠다는 ‘사회적 합의’로서의 부정의의 전환은 앞서 말했듯 광장이라는 인식의 장소에서 싹을 틔울 테다.
광장으로서의 몸
한편, 광장에서 소리를 내지르며 출현하는 몸이 있다면 광장으로 나갈 수 ‘없는’ 몸이 있다. 요하나 헤드바는 한국계 미국인이자 여성, 퀴어, 만성질환자이자 트랜스이며 비순응적 젠더 주체로서, 서구-백인-남성-비장애인-시스젠더-이성애자 등 ‘합리적’ 주체와는 거리가 먼 몸의 경험을 ‘보여지지 않음의 트라우마’로 사유해 냈다. 그의 말대로 “정치적이기 위해서는 공공장소에 현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한다면, 단지 몸을 거리로 옮기는 것이 신체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인구집단이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15) ‘아픈 여자 이론(Sick Woman Theory)’은 몸이 당연히 가지는 취약성을 병리화하고 낙인찍으며 여성화하는 잘못된 사회를 짚어낸다. 누군가 아프지 않더라도 ‘아픈 여자’라는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16) 다만 “정신질환이 있는 흑인 여성”, “장애인 인권에 대한 강의가 장애접근성이 없는 공간에서 열렸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장애인”, “난민”, “학대 아동”이 ‘아픈 여자’라고 하더라도,17) 하나의 기표 안에 모든 차별을 포괄하는 대신 차이를 정치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뭉뚱그려진 연대와 공허한 선언을 넘어, 자신의 위치성을 파악하고 무슨 연대를 어떻게 함께 만들어 갈 것인지, 교차하는 억압 및 차별과 어떻게 싸울 것인지를 고민하는 작업은 늘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18)
하지만 지나치게 인격화된 헌법의 ‘의지’를 실현하는 존재로서의 신체라면, 그 사이의 차이들은 삭제되기 마련이다. 헌정의 시간이 도래했다는 선언과 ‘내란수괴’와 같은 옛것의 법리학적 언어가 반복적으로 재구성하는 현실은, 서로 다를 수 있게끔 하는 시민성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든다. 각개의 ‘헌법기관’ 또는 주권의 근간으로 위치지어진 몸들이 공권력에 의한 절차적·정치적 정당성의 후순위로 놓이는 것이다. 이때 광장의 몸들은 ‘내셔널 ↔ 로컬’, 즉 ‘국민 ↔ 시민’이라는 대조 안에서 전자의 위치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니 지금껏 누군가 무어라 외쳐 온 구호는 ‘대의’ 아래 흐려진다. 결집이 국민적 정체성, 특히 민족적인 국민성 아래 이루어진다면 집단은 하나의 소망을 가진, 단일하고 평탄한 것으로만 상상될 수밖에 없다. 집단의 소망 역시 집단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 안에 머무를 것이다. 민족성을 곧 국민성으로 등치하고 국가를 ‘나’와 동일시할 때, 민족/국가를 수치스럽게 만들거나 균열을 내는 존재는 바깥으로 배출된다. 이러한 상호관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분리와 배제는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영속적인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며, 상황과 맥락에 따른 각자 간의 경계 또한 전혀 고려되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결국 포용의 문제다. 누군가들이 좋아하는 법의 언어를 사용해 돌려주자면, 집회에 대한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엄밀히 다르다. 집회는 그곳에서 표현되고 발언되는 언어를 넘어 의미화하는 작업이다. 즉 그곳에 존재하는 신체의 모임과 실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누가 무어라 외쳐 왔는가?
12월에 모였던 우리의 민주주의는 완결되었는가를 질문한다면 이때의 ‘우리’는 누구이고, 누가 우리가 될 수 있으며, 또 누가 ‘그들’로 위치지어지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민주주의란 결국 우리 내부의 차이를 인식하고 인정하고 그냥 그 자체로 두는 것, 받아들이는 것, 차이를 부각하는 것이 아닌 중요하게 바라보는 것일 테다. 경험과 맥락에 따른 자기의 경험이 다른 이의 경험과 만날 때 어디서 만나 충돌하는지, 무엇이 비슷하고 또 달라 보이는지,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의식적으로 느끼고 깨우쳐야만 한다. 철학자 고병권의 말처럼, “새로운 민주주의는 인민 내지 국민의 통일성이 깨지는 곳에서” 발견되고, “대의(대표)를 거부하거나 대의(표상)가 불가능한 존재들로부터 도출될 것이다.”19)
따라서 우리는 일상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탄핵안 가결이라는 당장의 승리에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의 ‘너머’란 국회에서의 탄핵안 가결에 이어 헌법재판소에서의 탄핵심판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장기적으로 바라보자면 한두 사람이 ‘국운’을 좌지우지하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 나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더욱 늘어나며, 궁극적으로는 누군가가 나를 대표할 필요가 없는, 내 존재가 인식되지 않는 일이 없이 인식 그 자체로 이해되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은 당장을 바라보는 것이다. 당장 이 광장에 누가 몸담고 있는지, 누가 몸담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지, 누가 ‘광장’ 아닌 곳에서 자신의 투쟁을 이어 나가고 있는지 말이다. 누군가의 삶은 그 자체로 지난하고 고단한 싸움이 된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선봉에 서는 전사로, 자신의 몸 하나를 불사르는 투사로 태어날까? 사회는 구조적인 차별과 혐오를 토대로 누군가를 벼랑 끝에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으므로, 밀려나는 존재들 역시 늘 있어 왔다.
민주주의의 완결성은 결코 담보될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는 균열, 그 사이에서의 성찰과 사유만이 더 나은 내일을 가능케 한다. 복수(復讐)의 민주주의가 아닌, 복수(複數)의 민주주의를 상상하자. 새로운 새상이 더 이상 ‘새롭지’ 않게 일상으로 도래한다면,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가늠할 힘은 분명 우리에게 있다.
1) 2023년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예정되었던 7월 1일, 서울시는 퀴어문화축제의 서울광장 사용 신청을 불허했다. 하지만 CTS문화재단의 ‘청소년·청년을 위한 회복콘서트’ 개최는 승인되었고, 퀴어축제 조직위는 을지로2가 등으로 장소를 옮겼다. 2024년에도 차별행정은 변함없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는 당년도에도 정해진 기한에 맞춰 5월 31일과 6월 1일 서울광장 사용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책읽는 서울광장’ 프로그램이 지자체 및 대사관 등과 협력해 진행된다며, 규모에 따라 서울광장 전체를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권혜정, 「퀴어축제·책읽는 서울광장 등…'서울광장 사용' 정하는 조정회의 결렬」. 『뉴스1』. 2024.03.21.
2) 대한민국헌법 제21조
3)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심리하던 2017년 2월 15일,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여성 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한 성소수자가 “저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습니까?”라고 외쳤다. 문 후보가 개신교 단체를 만나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한 데 대한 항의였으나, 문 후보는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리겠다”고 답했다. 이어 문 후보의 지지자들은 한목소리로 “나중에!”라고 소리쳤다. 익히 알고 있듯, 문재인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차별금지법은 2025년 초입까지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김지환. 「더 이상 “나중에”는 안 된다」. 『경향신문』. 2024.12.16.
4) 탁종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보수신문이 언폭이다」. 『미디어스』. 2023.05.25.
5) 김기홍. 「윤석열 대통령 “서민에 고통주는 민생범죄 끝까지 추적해 엄중 처벌”」. 『브레이크뉴스』. 2024.10.12.
6) 황진태. (2010). 신자유주의 도시에서 ‘도시에 대한 권리’의 실현. 공간과사회, 34호, 34-35쪽.
7) 위의 글, 35쪽.
8) 구미에서 LCD 편광필름을 생산하던 한국옵티칼하이테크는 2022년 10월 화재를 이유로 법인 청산 절차를 거치고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조합원들은 노동자 동의 없는 폐업과 희망퇴직을 거부했으나 사측은 이들을 해고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지회는 공장 현장을 사수해 해고 거부와 고용승계를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해고는 600일을 넘겼고, 지회 2인이 한국옵티칼하이테크(구미)의 ‘쌍둥이회사’인 한국니토옵티칼(평택)로의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이어간 지는 1년이 지났다. 이에 2025년 1월 15일에는 사측의 압박과 노동자의 삶을 고려하지 않는 구미시의 행정절차 및 공권력 행사에 대해 고용승계를 촉구하기 위한 연대의 움직임으로 ‘한국옵티칼 고용승계 쟁취! 고공농성 사수 전국노동자 연대문화제’가 열렸다.
조연주. 「“고용승계 없인 땅 안밟을것”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 바리케이드’에 모여드는 연대」. 『노동과세계』. 2024.01.15.
9) 김지환. 「오창 서브원 물류센터 화물노동자, 고용보장 요구하며 고공농성」. 『경향신문』. 2024.12.30.
10) 2022년 6월 2일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하청노동자들은 조선업 불황기에 삭감된 하청노동자 임금 30% 인상과 재계약을 요구하는 파업에서 “이대로는 살 수 없지 않겠습니까”라며 외쳤다. 그러나 2025년 현재 하청노동자들은 “이대로” 살고 있다. 오히려 노동구조는 더 나빠졌다. 지회 간부 2인은 2024년 11월 20일부터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은 하청노동자의 현실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거제에서 서울로 장소를 변경해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김지환. 「“이대론 살 수 없는데…우린 이대로 살고 있다”」. 『경향신문』. 2024.12.02.
11) 주디스 버틀러. (2020).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김응산·양효실, 역). 창비. (원저작 출판, 2015). 40쪽.
12) 위의 글.
13) 금속노조(@metalunion) ‘트위터’. 2025.01.04.
14) 전혜은. (2021). 퀴어 이론 산책하기. 서울: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234쪽.
15) Hedva, J. (2016). 아픈 여자 이론(허지우, Trans.). off-magazine.
16) 박연정. 「여성과 장애, 돌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요하나 헤드바 작가의 특강」. 『이대학보』. 2024.11.03.
17) Hedva, J., 앞의 글.
18) 전혜은. 「질병의 타자성을 사유하기 : 질병-(타자)-비이성의 얽힘, 병리화의 재현정치」. 『SEMINAR』. n.d.
19) 고병권. (201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서울:그린비. 77-78쪽.
참고문헌
고병권. (201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서울:그린비.
금속노조(@metalunion) ‘트위터’. 2025.01.04. https://x.com/metalunion/status/1875455183070933350(2025.01.13. 접속).
김기홍. 「윤석열 대통령 “서민에 고통주는 민생범죄 끝까지 추적해 엄중 처벌”」. 『브레이크뉴스』. 2024.10.12. https://www.breaknews.com/1064308(2025.01.13. 접속).
김지환. 「더 이상 “나중에”는 안 된다」. 『경향신문』. 2024.12.16.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161508001(2025.01.13. 접속).
김지환. 「“이대론 살 수 없는데…우린 이대로 살고 있다”」. 『경향신문』. 2024.12.02.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022035005(2025.01.12. 접속).
권혜정, 「퀴어축제·책읽는 서울광장 등…'서울광장 사용' 정하는 조정회의 결렬」. 『뉴스1』. 2024.03.21. https://n.news.naver.com/article/421/0007426710?sid=102(2025.01.13. 접속).
박연정. 「여성과 장애, 돌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요하나 헤드바 작가의 특강」. 『이대학보』. 2024.11.03. http://inews.ewha.ac.kr/news/articleView.html?idxno=72779(2025.01.13. 접속).
전혜은. 「질병의 타자성을 사유하기 : 질병-(타자)-비이성의 얽힘, 병리화의 재현정치」. 『SEMINAR』. n.d.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5/jeonhyeeun/(2025.01.13. 접속).
조연주. 「“고용승계 없인 땅 안밟을것”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 바리케이드’에 모여드는 연대」. 『노동과세계』. 2024.01.15. https://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503893(2025.01.13. 접속).
주디스 버틀러. (2020).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김응산·양효실, 역). 창비. (원저작 출판, 2015).
탁종열 노동인권저널리즘센터 소장.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보수신문이 언폭이다」. 『미디어스』. 2023.05.25. https://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100(2025.01.13. 접속).
황진태. (2010). 신자유주의 도시에서 ‘도시에 대한 권리’의 실현 해치맨 프로젝트를 사례로. 공간과사회, 34호, 33-59.
Hedva, J. (2016). 아픈 여자 이론(허지우, Trans.). off-magazine. https://off-magazine.net/TRANSLATE/hedva.html(2025.01.13. 접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