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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근영 May 04. 2016

홀로 긴 여행을 마무리하며

세상의 끝을 보다

오랜 회사생활을 접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 fin del mundo라 불리는 곳을 보고 싶었다. 새로 걸어가야 할 나만의 길도 찾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었다. 후회없이 많이 걸었고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가진 것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먼 길을 돌아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정류장에서 지난 여행을 돌아보며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걸어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세상의 끝 fin del mundo


이번 여행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본 적이 없었다. 십여년 전에 혼자 한 달간 인도를 다녀 온 이후 처음으로 길게 한 여행이라 사실 좀 불안했다. 행여나 체하거나 배탈이라도 날까봐 아무리 배가 고파도 천천히 한 입 한 입 꼭꼭 씹으며 먹었다. 한 발짝 잘못 디디면 뼈도 못 추스릴 것 같은 아찔한 천 길 낭떠러지 길도 있었다. 방심하다가 헛디뎌서 발목이라도 다치면 모든 일정이 틀어질 수 있기에 평지를 걸을 때도 정말 조심조심 매 순간 깨어있어야 했다. 저녁이면 하루동안 수고한 다리와 발을 쓰다듬어 주었고 그러면 신기하게도 아프던 근육이 쉽게 풀리는 듯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제대로 발을 쓰다듬어 준 적이 있기나 했었나 싶어 괜히 미안했다.

칠레 푸콘, 비야리카 화산트레킹

마음이 아프면 몸도 탈이 날 것 같아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계속 들여다 보고 토닥여 주었다.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감탄하며 느꼈던 행복과 희열의 순간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내내 멈추지 않고 흘러 마냥 울며 가던 길도 많았다. 울면서 걷던 길 위에서 그동안 켜켜이 쌓여있던 해묵은 서러움, 상처, 실망, 섭섭함의 찌꺼기들을 날려보냈다.

아르헨티나 바릴로체, 치르키토 치코 트레킹 중 내려다 본 호수

유명한 관광지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명소라고 불리는 곳들을 본 것도 좋았다. 그러나 결국은 사람이었다. 자연은 어찌보면 불변의 진리 속에 움직이지만 사람은 관계속에 살면서 변화하는 지라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결국 상대방과의 관계는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여행 중에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칠레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트레킹 코스


조그만 시내버스에 오르는 어르신들이 자리에 앉을 때 까지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기다려주던 칠레의 기사 아저씨들. 무거운 짐을 들고 타는 연세 드신 분들이 있으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짐을 들어드리거나 팔을 부축하며 탑승을 도와드리던 칠레의 젊은이들. 줄을 설 때 아이를 데리고 있는 어른이나 노약자들은 열외로 하여 순서를 앞쪽으로 배정해주는 문화와 그것을 당연시하던 사람들의 밝은 표정.


지도를 들고 두리번 거리고 있으면 "Are you OK ?" 또는 "Can I help you?" 하며 친절하게 다가오던 아르헨티나 사람들.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제가 통역을 도와드릴까요?" 하며 옆에서 따뜻하게 물어주던 칠레 사람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을 건널 때 괜히 주춤거리고 있으면 저 멀리서부터 속도를 줄이며 오고 완전히 정지해서는 먼저 지나가라고 손짓을 하던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운전자들. 성격이 불 같고 화끈한 남미사람들에게 이런 인내심과 여유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나이 든 커플들도 아무데서나 자연스럽게 스킨십과 뽀뽀를 하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나라. 길을 걸을 때 손을 꼭 잡고 걷던 은발의 노부부들. 남의 이목에 신경쓰지 않는 그런 자연스러움과 자유가 부러웠다.



떠나올 때보다 물리적인 배낭의 무게는 줄었지만 돌아가는 길의 배낭이 더 가볍지 않은 건 결국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하는 나약한 인간의 숙명때문인가 싶다.
새로 가야할 길이 더 뚜렷해진 것도 없다. 하지만 조바심은 없다. 이번 여행에서 느끼고 얻은 경험은 가치를 잴 수 없는 나만의 자산이 되어 있기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힘차게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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