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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근영 Nov 11. 2016

행복의 나라 부탄에서 난 불행해졌다

우리는 무엇으로 행복한가


부탄 전통문양이 그려진 아담한 도착터미널 빌딩 안으로 들어오니 환전소가 보였다. 음료수나 기념품 살 정도의 돈만 있으면 된다던데 얼마나 바꿔야 할까? 대체적으로 공항은 환율이 낮으므로 필요하면 시내 환전소에서 더 바꿀 요량으로 100달러만 환전했다. 살면서 무언가를 바꿀 때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부탄의 화폐는 눌트룸(Ngultrum)이고 미달러 대비 환율은 약 1 USD : 66 BTN이었다. 즉, 1눌트룸은 약 17원이다.


1대왕부터 현재 5대왕까지의 얼굴이 들어있는 부탄의 화폐


환전을 하고 나서 몇 개 안 되는 입국 심사대에 줄을 섰다. 여행 베테랑이라고 해도 어느 나라를 방문하든 입국 심사대를 통과할 때는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후진국에서는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인지 괜한 트집을 잡는 일이 자주 생기고 선진국에서는 방문객에게 던지는 의례적인 질문에 불법체류 계획이 없는데도 긴장된다. 입국심사대에서 일하는 공무원은 국적을 불문하고 권위적인 포스를 풍기기 때문이리라. 심사대에서 어색한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은 여권을 건넬 때 가벼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하는 것이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이에게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Good morning"하고 인사를 하며 표정을 살폈다. 부탄 유일의 국제공항인 파로 공항의 직원들은 전혀 권위적이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친절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선한 그들의 눈빛에 마음이 놓였다. 살풋한 미소와 함께 건네주는 입국도장 찍힌 여권에는 핫팩을 손에 쥔 듯한 따뜻함이 함께 묻어왔다. '이 땅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문구에서 진심을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하나밖에 없는 작은 컨베이어 벨트로 흘러나오는 짐을 찾은 후 게이트 밖으로 나오니 여러 여행사의 가이드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훑어봐도 내 이름이 적힌 이름판이 보이지 않았다. 작은 비행기로 도착한 백 명 남짓한 여행객들은 각자 가이드를 따라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 LTE의 속도로 회신을 보내주던 여행사 사장의 스타일로 봐서는 가이드도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남아있는 가이드 숫자가 줄어들자 한 편의 시나리오가 빠른 속도로 머릿속에 펼쳐지고 있었다. 다행히 시나리오가 불행한 쪽으로 흐르기 전에 가이드 한 명이 헐레벌떡 내 이름이 적힌 판을 들고 나타났다. 오는 길에 마라톤 경기가 있어서 도로가 잠시 정체되었다며 늦어서 미안하다 했다. 부탄 사람들의 시간관념은 느슨하다고 책에서 읽은 터라 내게 배정된 가이드도 그럴 거라 감안했다. 예상과 달리 이 날 이후 가이드와 운전수는 단 한 번도 늦은 적이 없고 늘 약속된 시간보다 먼저 와서 나를 기다려주었다. 사람을 일반화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왼쪽이 가이드 남걀 그리고 오른쪽이 운전수 트링


가이드 남걀은 내 수트케이스를 받아서 차에 실었고 운전수 트링은 차 뒷문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호사스러운 서비스를 받아본 게 얼마만인가. 난 그저 맨몸으로 차에 오르기만 하면 되었다. 이 순간부터 부탄을 떠나던 날까지 차에 오르내릴 때 내 손으로 문을 열 기회가 없었다. 트링은 부담스럽지 않게 날 배려하며 문을 열고 닫아주었다.


차는 한국산 산타페였고 새 차같이 깨끗했다. 앞으로 9일간 전용가이드와 전용차량 그리고 전용운전수를 대동하고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20대 초반부터 시작된 나의 해외여행 역사에 이런 형태의 여행은 처음이다. 숙소와 식당 예약을 포함해 모든 일정이 준비되어 있었고 나는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자유여행처럼 좌충우돌 에피소드는 없겠지만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신경 써야 할 일이 없어졌으니 준비된 일정을 즐기는 일만 남았다. 편안하게 보호받는 느낌이 전해주는 아늑함에 기대어 창밖 풍경을 감상했다.





해발 2235 미터에 자리한 파로 공항에서 수도인 팀푸로 가는 길은 약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양쪽으로 높은 산이 솟아있고 중간에는 큰 강이 흐르는 파로계곡을 따라 길은 구비구비 이어졌다. 직선으로 백 미터 이상 뻗은 길은 없었다. 길이 굽을 때마다 차는 한쪽으로 쏠렸다. 좋은 사람이 옆에 앉았더라면 저절로 몸을 기댈 수밖에 없는 로맨틱 커브였지만 나는 허공을 가르며 차가 쏠리는 방향을 따라 몸을 출렁거렸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조심해서 운전하라는 뜻의 표지판을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기억나는 몇 가지는

“If you are married, divorce speed” 당신이 결혼을 했다면 속도와 이혼하라.

“After whisky, driving risky” 술 마시고 하는 운전은 위험하다.

영어의 라임(각운)을 이용한 말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맛은 떨어지지만 그들의 위트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부탄의 전통가옥은 커다란 널빤지로 지붕을 올리고 심하게 부는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큰 돌을 여기저기 눌러놓는다. 국토의 최소 60%를 숲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규정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부탄에서는 벌목이 금지되어있다. 현재는 70% 이상의 국토가 숲으로 보존되고 있고 전부 국가 소유다. 국가에서 벌목을 인정하는 공공 구역이 있지만 그마저도 규정이 매우 까다롭다고 한다. 따라서 목재가 비쌀 수밖에 없기에 저렴한 양철로 지붕을 올리는 집들이 늘어났다. 빨간 고추를 양철 지붕 위에 널어놓고 말리는 풍경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뜨거운 햇살에 달궈진 양철 지붕에 바짝 말린 고추는 부탄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주요 식재료다. 한국인의 고추에 대한 사랑은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현재 부탄 국왕부부의 다정한 모습


국왕 부부의 결혼식 사진


공항에서부터 길거리 여기저기 걸려있는 커다란 사진 속의 부탄 국왕과 왕비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남걀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미디어에서 부탄 국왕의 미담을 이미 많이 읽은 터였지만 부탄인의 시각이 궁금했다. 국왕이라는 단어에 그의 얼굴엔 벌써부터 흐뭇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고 이어지는 이야기에 나는 급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현재 36세인 국왕은 그의 나이 26세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공식적으로는 28세에 즉위식을 했고 선왕이 보여준 많은 업적을 이어나가는 행보를 보이는 중이다. 매해 몇 번씩 큰 도시와 동떨어진 오지 구석구석까지 다니며 국민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교육과 의료관련 시설이 소외된 곳은 없는지 직접 확인하고(부탄은 교육과 의료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됨) 시골 농부들에게 필요한 작물의 종자와 생산기술이 잘 보급될 수 있도록 애쓴다. 도움이 필요한 국민을 위해 우리 조선시대의 신문고처럼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지역 시찰을 나갈 때 상소를 올린 국민을 만난다. 지진이나 홍수 등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즉각적인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진두지휘한다. 홍수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에 가서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구호활동을 돕는다. 경작할 땅이 없는 농부나 집이 없는 사람에게는 국유지를 하사하여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준다.'


사실이라고 하기엔 내가 사는 나라의 상황과 너무도 동떨어진 얘기에 나는 솔직히 의심이 들었다. 이런 군주나 지도자가 진정 있단 말인가. 대를 이어 내려오는 국왕의 선정에 부탄인은 감사하고 행복해한다. 부탄인이 사원에서 기도를 할 때 첫 번째는 국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두 번째 기도는 다시 태어날 때 꼭 부탄에서 환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빈다. 순간 나는 갑자기 울컥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아니오라는 즉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헬조선이라 불리는 현재의 상황이라면 나는 절대 한국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부탄인과 같은 갈망으로 기도를 할 수 있을까. 행복해지고 싶어 부탄에 왔는데 갑자기 나는 불행해졌다. 행복은 상대적이라더니 지혜로운 군주가 국민을 진심으로 아끼는 나라 부탄에서 나는 작금의 답답한 내 조국의 상황을 떠올렸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침울해졌다.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남걀은 화제를 돌렸고 그의 이야기에 몰입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이때는 그나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이었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의 기분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 3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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