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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근영 Mar 26. 2017

배고플 때 싱가포르 시장에 가지 마라

싱가포르 wet market 구경하기


시장할 때 시장에 가지 마라.


'배가 고플 때 장 보러 가지 말라'는 격언은 동서양 공통사항이다. 허기진 상태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게 되기 때문이다. 뭐든지 다 해먹을 것 같은 생각에 장바구니를 가득 채워온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음식에 관심이 많은 나는 시장 구경을 좋아한다. 여행지에서도 화려한 명품숍보다는 재래시장이 훨씬 흥미롭다. 싱가포르 여행을 앞두고 설렜던 이유 중에 재래시장 구경에 대한 기대도 들어있었다. 다문화로 구성된 나라인만큼 식재료 또한 다양할 것이 분명한 데다 국내에서 보기 힘든 열대지방의 재료까지도 넘쳐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싱가포르에서 내겐 3일의 아침이 있었고 매일 아침마다 시장 구경을 나갈 생각을 하니 묘한 흥분마저 일었다.


Wet Market(젖은 시장). 싱가포르 재래시장 정보를 검색할 때 wet market이라는 단어를 접하고 곧바로  떠오른 장면은 어시장이었다. 생선 씻어낸 물로 바닥이 젖어있어 긴 바짓단을 들추고 조심조심 걷게 되는 내 고향 강릉 어시장. 싱가포르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채소나 생선 또는 고기를 손질한 후 물로 바닥을 물로 청소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해산물 파는 쪽만 물청소를 하지만 재래시장 또는 전통시장을 통칭하여 wet market이라 한다. 마른 바닥 위에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대형마트와 비교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다문화 국가 싱가포르 재래시장 풍경은 어떨까.




구글 검색을 하면 4-5군데의 재래시장을 추천해준다. 대개 이른 아침 시작하여 정오경에 닫는다고 하니 숙소의 위치나 일정에 따라 들러보면 된다. 출발 전에 일정의 동선을 그려보며 나는 매우 뿌듯해했다. 계획대로라면 꽤 만족스러운 일정이 되리라. 하지만 여행은 삶과 같아서 늘 계획한 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계획하고 준비하는 순간에 여행은 오히려 더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현실에서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늘 발생하기 마련이니까.




티옹 바루 쪽으로 오전 일정을 잡았던 날 아침에 들렀던 티옹 바루 재래시장은 건물 자체가 보수공사 중이었다. 시장 구경 후 푸트코트에서 맛난 식사를 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얼마나 허무하던지 대뜸 맥이 풀려버렸다. 혹시 나처럼 헛걸음 하는 사람이 없길 바라며 트래블라인 앱 실시간톡에 남겨두었다. 차이나타운에서 유명한 맥스웰 푸드코트는 청소하는 날이라 닫았다고 알려주시는 여행자와 그쪽으로 가고 있다가 톡을 보고 고마워하는 분의 실시간톡을 보고 있으니 트래블라인은 정말 유용한 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방문하기로 계획한 시장은 숙소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였다. 리틀 인디아 구역의 테카 센터에 자리한 Tekka Wet Market(테카 시장)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이라고 한다. 정오경 문을 닫는 다른 재래시장과 달리 이곳은 오후 5시 정도까지 연다. 아침 개장 시간이 6시 반부터라고 하여 7시경 숙소를 나섰다.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가 눌리지 않도록  매달아 놓은 풍경


시장 구경은 언제 해도 재밌지만 활기가 넘치는 아침 시장이 역시 백미다. 재료의 싱싱함을 제대로 느끼려면 아침 일찍 가야 한다. 그러나 구매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구경만 하는 경우에는 걱정이 앞선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되는 시간에 가면 생동감 넘치는 현장을 보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장사운을 따지는 상인에게는 아침 댓바람부터 구경만 하고 다니는 사람이 곱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수걸이도 안 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사지 않으면 재수 없다고 하는 상인도 많다. 한국에서 몇 번 겪은 경험이 있기에 나름 눈치가 생겼다.

시장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으면 상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거나 물건 사는 사람과 흥정을 하는 틈을 타서 몰래몰래 찍어야 한다. 뷰 파인더를 보지 않고 슬쩍슬쩍 찍는 기술을 연마해 두면 유용하다. 또는 매너 있게 물건을 조금 산 후에 허락을 구하고 찍는 것이 좋다.

 



리틀 인디아 구역에 있는 시장이라고 인도 식재료만 파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다양한 지, 전 세계 요리를 하더라도 필요한 식재료는 다 있는 듯 보였다. 양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가금류를 취급하는 구역과 온갖 채소와 과일 가게 그리고 싱싱한 해산물을 파는 어시장과 말린 생선을 파는 곳이 있었다. 향신료 종류도 넘쳐났다. 처음 보는 커리 잎사귀, 달달한 맛이 나서 디저트에 많이 쓰는 pandan(판단)잎, 분홍빛 생강꽃. 웬만한 생선 이름은 꿰고 있는 내가 처음 보는 것도 있었고 말린 생선 부레, 제비집은 마냥 신기했다.


코코넛 과육을 갈아서 파는 가게의 주인은 내게 먹어보라며 금방 갈아놓은 과육을 두어 꼬집 집어주기도 했다. 깡꿍을 다듬고 있던 아저씨는 나를 보자 웃으며 한국에도 깡꿍이 있냐고 물으셨다. '나 한국사람인 거 어찌 아셨을까.' 없으면 한 단 줄 테니 가져가라고 농담을 하셔서 사진 찍어도 되냐고 여쭈니 맘껏 찍으라신다.





시장 구경을 하며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내 걱정과 달리 싱가포르의 상인들은 친절했다. 딱 봐도 카메라 들고 어슬렁거리는 내 모습은 재료를 살 사람이 아닌 여행자가 분명한데 싫어하는 기색 없이 구경하라고 했다. 재료 이름을 물어보니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묻지 않은 재료의 이름까지 일일이 알려주는 분도 있었다.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어볼 때마다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주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얼굴만 빼고 일하는 모습은 찍어도 된다고 동의했다.

한국말로 "한국 아가씨 이뻐요"라고 했던 아저씨. 마음 같아서는 아저씨가 파는 생닭을 몇 마리 사들고 오고 싶었으나 난 부엌이 없는 여행자였다. 구경거리가 넘쳐나는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자 나는 싱가포르에서 한 달만 살고 싶어졌다. 이렇게 싱싱한 식재료를 사다가 요리를 하면 특별한 실력이 없어도 맛난 음식이 탄생할 것 같았다.



돌아 나오는 길에 있는 푸드코트를 구경하다 나는 인도음식을 파는 노점 앞에 멈춰 섰다. 진동하는 커리향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빈 속은 요동치고 있었고 허기만 달랠 생각에 맛나 보이는 몇 가지 음식을 시켰다. 감자 커리를 얹은 로티와 삶은 렌틸로 만든 튀김. 이렇게 푸짐하게 먹었는데 1.50 달러(1200원 정도). 조금씩 맛만 보고 호텔에서 조식을 먹으려 했으나 한 입 두 입 먹다 보니 접시를 비우고 말았다. 한국에도 이렇게 싸고 맛난 푸드코트가 있다면 자주 갈 텐데 아쉽다.




다 먹고 나자 주방이 궁금해졌다. 땀을 뻘뻘 흘리며 팬케이크를 부치는 아저씨에게 구경해도 되냐고 묻자 들어오라고 했다. 가스불의 열기가 후끈해서 금세 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렇게 더운 데서 일하면 구경하겠다는 여행자가 귀찮을 법도 하건만. 괜히 미안하고 고마웠다.

먹고 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포장해서 가는 사람이 더 많은 듯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팬케이크를 부쳐내는 아저씨와 재빨리 포장을 하는 아저씨의 호흡이 척척 맞았다.



싱가포르의 시장 상인들은 세계의 시장 어디서나 보는 상인들처럼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했다. 다만 그들에게서는 삶의 고단함이나 애잔함보다 여행자에게 곁을 내주는 여유가 느껴졌다. 여행자에게 팍팍하게 대하지 않고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것도 그들만의 삶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싱가포르를 여행하다 지치고 배가 고프면 재래시장에 가라. 새로운 사물과 풍경을 스캔하느라 온 몸이 녹초가 되었어도 그곳에 가면 어느 틈에 에너지 충전량이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이국적인 식재료에 반해서 어쩌면 장바구니를 가득 채워 나오게 될 지도 모르겠다. 맛난 요리를 해 먹는다며 예정보다 며칠 더 싱가포르에 머물게 되는 일이 벌어져도 나는 책임질 수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 본 포스트는 싱가포르 관광청으로부터 일부 경비를 지원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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