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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근영 Mar 28. 2017

싱가포르는 싱물원이다

빌딩숲에서 만난 오아시스,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

 

‘식물’이라는 단어를 발음해보자. ‘ㄱ’과 ‘ㅁ’이 만나면서 싱그러운 비음을 동반한 소리가 나온다.

싱물


식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 자동으로 연상되는 녹색식물들. 녹색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피로해진 눈과 마음에 안정을 찾아준다고 한다. 스트레스 쌓이는 도시생활을 하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색깔이다.


화초와 나무 가꾸는 것을 좋아했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식물에 관심이 많았다. 가지치기를 할 때 옆에서 전지가위를 들고 대기하는 일, 화분갈이를 하고 나면 젖은 수건으로 잎사귀를 닦아주는 일은 늘 내 몫이었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아버지가 고무나무 같은 식물을 베란다로 옮기면 나는 이유를 물었다. 열대식물은 월동이 힘들어 따스한 곳으로 옮겨줘야 얼어 죽지 않는다고 하셨다. 모든 식물은 사람과 같아서 관심을 가지고 가꿔줘야 예쁘게 잘 자란다는 말씀은 어린 나이에도 쉽게 이해가 되었다.


보타닉 가든을 가꾸는 정원사들


일본식 정원은 극도로 정제된 자연미를 자랑한다. 마치 넥타이까지 깔끔하게 매고 정장 차림을 한 신사 같다. 반면 영국식 정원은 넓은 잔디밭과 호수를 끼고 서있는 나무로 이루어진 전원 풍경의 자연미가 있다. 노타이로 조금은 여유 있어 보이는 세미 캐주얼 차림의 중년 신사 같달까. 아시아 식물원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은 과연 어떤 풍경일까. 이번 싱가포르 여행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코스였다.




발음하면 할수록 싱싱함이 묻어나는 ‘싱가포르 싱물원’.


트래블라인 앱에 나와있는 ‘보타닉 가든’ 정보를 보니 이용시간이 오전 5시부터 밤 12시까지다. 입장료는 심지어 무료다. 사이트를 클릭하니 홈페이지로 연결되었다. 더 이상 자세할 수 없을 정도로 세분화된 정보가 빼곡히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 들어있다. 식물원 내에 자리한 또 다른 여러 개의 정원의 이용시간, 입구가 세 개나 되는 식물원의 게이트 별로 찾아오는 길, 다운로드 가능한 지도와 트레일 가이드 등 미리 알고 가면 도움이 될 알뜰한 정보가 넘친다.




보타닉 가든의 규모는 74헥타르라고 한다. 얼른 가늠이 되지 않아 넓이를 환산해 보았다. 22만 평이 넘는다. 여전히 상상이 안되지만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방대한 식물원이면 하루가 걸려도 다 둘러보기 힘들겠다. 무더운 한낮에 다니면 더위를 먹을 수도 있으니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에 가면 좋다는 팁이 올라와 있었다.


여행은 계획한 대로 착착 이루어지지 않는다. 혼자 하는 자유여행이어도 마찬가지다. 전날 밤 화려한 야경을 보고 들어와서인지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나니 이른 아침 관람은 어려워진 시각이었다. 더위를 피해 일찍 가려던 식물원 일정을 늦은 오후로 미룰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밀고 나갔다. 덥다고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호텔이나 쇼핑센터에만 머물 수는 없는 일. 더운 나라에서 더위와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아시아 식물원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싱가포르 식물원






보타닉 가든의 어시스턴트 디렉터였던 J.H.Corner의 집. 현재는 레스토랑으로 운영됨.




다행히 날씨가 좀 흐리기도 했고, 키 큰 열대우림 수목이 그늘을 만들어주어 땡볕을 쬐며 걸어야 하는 길은 많지 않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나무 밑 그늘에 모여 피크닉 하는 사람도 많이 보였다. 지친 심신을 힐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까. 보타닉 가든이 싱가포르의 오아시스라더니 딱 맞는 표현이었다.


오키드 가든을 향해 대략적인 동선을 머릿속에 그리며 걷고 있었으나 주변에 보이는 신기한 꽃과 식물을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다 보니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이정표가 잘 되어있어 헤맬 일은 없었다.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분들이 중간중간 있어서 방향을 물어보면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시스템이 잘 갖춰진 나라다웠다.









* Prayer Plants : 저녁에는 잎을 위로 말아 올려 마치 기도하는 손과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낮에는 잎을 펴고 광합성을 한다. 수면 운동을 하는 독특한 식물에 속한다.




National Orchid Garden (국립난초정원)

입장료 : 성인 5 SGD, 학생 1 SGD

이용시간 : 08:30~19:00


보타닉 가든 안,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 난초 정원. 싱가포르 식물원의 하이라이트라고도 부른다. 입구에 도착하니 땀이 많이 흘렀고 다리도 아팠다. 매점에서 시원한 음료를 사서 마시며 휴식을 취한 후 티켓을 샀다.  약 1만여 평의 크기에 6만 포기의 다양한 난초가 심어져있다고 한다. 종류는 자그마치 1천여 종이 넘고 교배종은 2천여 종이 넘는다. 사실 이런 숫자는 실제 모습을 상상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 생전 처음 보는 난이 대부분인데 그 종류를 숫자로 말한들 조물주처럼 창조의 상상력이 자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의 난초 수출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오키드 가든은 볼거리가 풍부했다.








오키드 가든을 돌고 나오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식물원 내에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었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매우 붐볐다. 매점에서 음료수 하나와 빵을 사서 먹었다. 바람이 솔솔 부는 나무 그늘 아래 있으니 온통 그린그린한 주변에 둘러싸여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열대 우림 식물들이 고개를 꺾고 쳐다봐야 할 정도로 높게 우거져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이 한국이 아니라 싱가포르라는 것이 실감되는 장소였다.



* 높이가 30-40m 가 넘고 수령이 수백 년 된 보호수가 수십 종 있다. 카메라로 담기 어렵다.



먹구름이 깔리기 시작하고 주위가 어두워지는 듯하더니 스콜이 쏟아졌다. 비를 긋기 위해 커다란 나무 밑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열대지방에 내리는 소나기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세차게 쏟아졌다. 장관이었다. 녹음이 우거진 풍경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는 한 폭의 그림 같았고 한낮에 달궈졌던 땅의 열기를 금세 식혀주었다. 천둥까지 동반한 비는 쉽게 그치지 않았고 나뭇잎 사이를 뚫고 떨어지는 빗줄기에 우산이 없는 여행자는 온몸이 젖기 시작했다. 비 맞은 생쥐꼴이 되었지만 처량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열대의 비는 엄마품처럼 따스했다.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속이 후련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비를 맞으며 열대식물은 무럭무럭 자라는 거구나.'


싱가포르 5달러 지폐 뒷면에 나오는 나무. Tembusu Tree라는 이름이 있지만 5달러 나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우산잎이라고 불리는 야자나무. 비를 피하기 좋다.


비가 그친 후 산들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에 식물들은 빗방울을 후드득 털어내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초록빛 잎사귀들은 보석처럼 더욱 반짝이며 빛났다. 바삐 돌아가는 서울 생활에 메말라있던 내 가슴이 촉촉해졌다. 물기 없는 선인장 가시처럼 뾰족하게 예민해져 있던 내 신경의 끝도 우산잎 야자나무 잎사귀처럼 둥글게 펴지고 있었다. 빌딩숲 사이에 자리한 싱가포르의 커다란 오아시스에서 목을 축인 여행자의 발걸음은 전에 없이 경쾌해졌다.



* 본 포스트는 싱가포르 관광청으로부터 일부 경비를 지원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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