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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근영 Jul 03. 2018

페트라 낮과 밤의 두 얼굴

페트라를 제대로 만나는 법

세상에 존재하는 유적지 중에는 그런 곳이 있다. 영화 촬영지로 설명하면 쉽게 알아듣는 곳. 요르단의 ‘페트라’도 그런 유적지 중 하나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또는 드라마 ‘미생’ 촬영지라고 하면 바로 ‘아하’ 소리가 나온다. 인디아나 존스에서 성배를 찾던 장소가 페트라인 것을 알고 나서 언젠가 꼭 가보리라 별렀던 곳. 한참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뜨거운 여름날 찾게 된 페트라. 이틀간 세 번 입장하여 둘러본 페트라는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고, 이천 년 전 나바테아 사람들의 일상이 눈 앞에 그려지는 신비한 체험을 선사했다.  


페트라를 아직 보지 못한 당신에게 기록용으로 열심히 찍은 사진과 영상을 보여준들, 아무리 뛰어난 묘사를 동원한들 페트라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당신이 와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직접 와서 바위 앞에 서보기 전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바위의 색깔을 두 눈으로 보기 전에는, 뜨거운 바위를 손으로 어루만져 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느낌을. 언젠가 당신이 직접 오게 된다면 나의 이 글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으랴.


페트라는 BC 4세기경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이다. 페트라는 이집트, 페르시아, 다마스쿠스를 잇는 지리적 요충지였고 사막의 대상이 거쳐가야 하는 향료 교역의 중심지였다. 나바테아 왕국의 전성기에 페트라는 인구가 2만 명이 넘는 도시로 번성하였고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알토란 같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외부의 침입이 있었지만 페트라는 끄떡없었다. 페트라의 거대한 바위산과 협곡이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든든한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는 법. 내내 천하무적일 것 같은 페트라도 서기 106년 로마에게 예속된 후 쇠락의 길을 걷는다. 


협곡의 바위 아래 수로가 파져 있다.
물을 저장했던 댐.
수로 앞쪽으로 신상이 있었던 자리.

강수량이 적고 황량한 사막에 나바테아인들은 어떻게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을까. 중동지역을 주름잡는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바테아인들은 물을 다루는 기술로 인공적인 오아시스를 만들었다. 이 지역은 갑자기 내린 비로 홍수가 발생하는 지역이었는데 그들은 댐과 물탱크와 수로를 만들어 물을 관리했다. 이러한 혁신적인 물 저장 시스템은 가뭄을 견디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물이 귀했던 사막에서 요충지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수백 년 동안 사막이라는 환경의 한계를 극복했던 나바테아인들의 정교하고 수준 높은 건축 기술과 물관리 시스템은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있다.  


시크가 시작되는 입구.
양 옆의 바위에 나있는 선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다.

페트라로 들어가려면 ‘시크(Al Siq)’라 불리는 좁고 긴 협곡을 통과해야 한다. 모래사막에 우뚝 솟은 바위산 사이로 서로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열려있는 길. 시크는 지각변동으로 인해 거대한 바위가 갈라져 조금씩 옆으로 밀려나면서 생겨난 길이다. 양 옆 바위에 나 있는 선을 이어 보면 바위가 하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2 킬로미터에 달하는 협곡은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다. 어떤 지점은 폭이 2미터도 안될 정도로 좁다. 마차를 몰고 가는 베두인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2천 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을 두 발로 온전히 느끼며 걸었다. 협곡 사이로 펼쳐진 푸른 하늘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태양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협곡의 그림자는 찰나를 담으려는 여행자를 흔들어 놓곤 했다.  


한없이 이어질 것 같던 협곡의 끝에서 살며시 얼굴을 드러내는 알 카즈네(Al Khazneh). 외마디 감탄사 이외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몸은 돌처럼 굳어 발을 떼기 힘들었다. 미소를 띠며 차분히 말하는 알 카즈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어서 와.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햇빛을 받아 더 우아하게 빛나는 알 카즈네의 아름다움은 그리스 여신처럼 완벽했다. 알 카즈네는 바위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내고 다듬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건축물들처럼 기둥이 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안내를 맡아준 베두인은 알 카즈네가 내로라하는 세계 유적지 중에 노예를 동원하지 않고 만들어진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있는 알 카즈네의 표면에 수십 개의 총탄 자국이 보였다. 묻힌 보물을 찾겠다고 베두인족들이 쟁탈전을 벌인 흔적이라고 한다. 알 카즈네는 아랍어로 ’보물창고’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내부는 비어 있고 장식도 없이 단순하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알 카즈네는 나바테아 왕의 무덤이라고 한다.


갑자기 불어난 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만든 수로.
왕실 무덤군
무덤 또는 거주지였던 동굴

대부분의 관광객은 알 카즈네만 보고 페트라를 떠난다. 눈부시게 푸른 바다에 몸을 담가보지도 않은 채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 몇 장만 찍고 떠나는 사람들과 닮았다. 바다는 어디에든 있지만 페트라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알 카즈네를 기준으로 페트라의 시티 투어가 시작된다. 바위를 뚫어 만든 나바테아인들의 거주지와 수많은 무덤, 왕실 무덤을 보며 걸었다. 돌을 나무처럼 능수능란하게 다뤘던 나바테아인들의 손재주가 놀라웠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이름에 걸맞게 대부분의 건축물은 산과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원형극장.
로마시대에 지어진 유적.
로마시대 유적

8천5백 명이 앉을 수 있다는 원형극장 또한 바위를 깎아 만들었는데 암만의 로마 원형극장보다 크다.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어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아쉬웠다. 페트라는 서기 106년에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로마시대의 유적들도 남아있다.


 

원형극장 못 미쳐 산 쪽으로 나있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산당 제단(High Place of Sacrifice)이 있다. 길과 계단은 나바테아인들이 사용하던 원형 그대로라고 한다. 페트라를 내려다보면서 쉬엄쉬엄 올라가면 정상이 나타난다. 평평한 정상에 서면 7미터에 달하는 오벨리스크가 두 개 눈에 띈다. 이 또한 돌을 깎아 만들었으며 나바테아인들이 숭배하던 두 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단의 주변에는 제물로 바치던 동물의 피가 흘러내려갈 수 있게 만든 통로와 정화의식에 사용했던 물탱크가 있다. 성지로 여겼던 이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탁 트인 시야 사이로 페트라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졌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낙타가 개미처럼 보였다. 오르내리는 길가에는 음료수와 기념품을 파는 조그만 가게들이 있었다. 집요하게 호객 행위를 하는 아주머니들 틈에 어린 동생을 안고 액세서리를 파는 베두인 소녀의 눈썹이 낙타 눈썹처럼 길고 아름다웠다.  


페트라의 여름은 뜨겁다. 바람은 시원하지만 그늘이 없어 얼굴은 구릿빛으로 변해갔다. 더위를 먹기 전에 베두인이 운영하는 상점에 들러 차를 마시며 잠시 쉬어야 했다. 베두인족 중에 자신들을 페트라에 살았던 나바테아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베둘(Bedoul)족은 폐허가 되었던 페트라에 양떼를 몰고 다니며 동굴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1985년 페트라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요르단 정부는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이들을 ‘베두인 캠프’라 불리는 곳으로 이주하게 했다. 이들은 페트라 내에서 거주할 수는 없고 해가 지면 캠프로 돌아가야 한다. 관광객을 상대로 투어 가이드를 하거나 물건을 팔며 낙타, 당나귀를 태워주고 돈을 번다. 집요한 호객행위나 비용을 속이는 등 페트라에서 만난 베두인은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다.  


페트라의 탐험을 완성하는 것은 ‘밤의 페트라(Petra by night)”이다. 밤에만 진행되는 이벤트는 수천 개의 촛불로 밝혀진 고대도시를 걸어 다니는 환상적인 경험을 하게 해준다. 촛불과 별들이 고요하게 빛나는 협곡을 따라 걸으면 마치 2천 년 전에 이곳에 살았던 나바테아인이 된 것 같다.


촛불이 수를 놓은 알 카즈네 앞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조용히 돗자리 위에 앉는다. 베두인이 연주하는 음악과 노랫소리는 페트라의 바위에 반사되어 듣는 이의 가슴에 살며시 파고든다. 이곳에 누워 별을 바라보며 하룻밤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베두인이 따라주는 민트 티를 마시며 아쉬움을 달랬다.



* Petra by Night : 매주 월, 수, 목요일 밤 8시 30분에 시작하여 10시 30분에 끝난다. 입장권은 페트라 패스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페트라 방문센터나 호텔 리셉션에서 따로 구매해야 한다. 가격은 17 디나르이다.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던 페트라가 버려진 도시로 전락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곳을 점령했던 로마가 해상무역으로 교역로를 돌리면서 페트라는 급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또한 363년에 발생한 거대한 지진으로 많은 건축물들이 무너졌고,  페트라의 필수적인 물관리 시스템도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수입이 줄어든 페트라는 무너진 물관리 시스템을 재건할 능력이 부족했고 5백 년 대에 이어진 강진으로 도시는 폐허로 변해갔다. 633년 아랍인의 침입으로 얼마 남지 않았던 사람들은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  


페트라가 다시 세상에 알려진 건 1812년 스위스 여행가 부르크하르트에 의해서였다. 그는 아랍지역을 탐험하기 위해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아랍어를 배웠고, 시리아에 살면서 아랍어를 숙달하고 이슬람 전통을 익혔다. 어느 날 그는 잊힌 고대 도시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아랍어가 능통했던 그는 예언자 아론의 무덤에 제물을 바치고 싶다는 거짓말로 베두인 가이드를 설득하여 페트라에 들어가게 된다. 두려움과 흥분으로 시크를 걸어 들어가 알 카즈네를 마주했을 그의 감격이 어땠을지 가히 짐작이 된다. 그가 남긴 여행기를 통해 잊혔던 도시 페트라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수백 년간 번성했던 도시가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려졌다가 다시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여행객이 몰려드는 도시가 되었다. 우리네 인생이 그러하듯이 도시의 운명도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라비아 반도를 주름잡던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는 아직까지 유적의 20%밖에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페트라는 장미빛 도시라고 일컬어진다. 도시에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바위들이 붉게 물들기 때문이다. 페트라가 온전한 장미의 화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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