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이다. 무뚝뚝하지만 그 겉면의 속에는 따뜻함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주관적인 판단에서는? 직설적이지만 직설적인 것을 싫어한다. 판단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직설적인 것을 좋아하고, 감정적인 면에서는 직설적인 말을 피하는 편이다.
사실 간접적인 표현으로 마음을 돌려 전했을 때, 즉시 알아차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상대가 나중에서야 내가 전한 마음을 알아챘을 때 약간의 반전과 시차가 가져다주는 드라마틱함을 선호하고, 나는 그것이 더 마음을 강력하게 전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를 오랫동안 알지 못한 사람들과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관계에 있어 꽤나 수동적이어서, 상대가 나를 알아주지 못하면 어쩔 수 없고, 만약 이를 알아준다면 나는 무장해제되어버린다.
결국 표현에 인색하다는 말이다. 뭐 그리 구구절절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부럽기도 하다. 기쁜 일 혹은 슬픈 일이 있을 때, 진심을 담아 따뜻한 말 한마디를 전하는 사람들의 재능(?)이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울까 싶다.
하지만 무뚝뚝함은 내 감정이 쉽게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상대가 던지는 감정의 쓰레기들을 막아주기도 한다. 양날의 검이 아닌 양편의 방패인 셈이다. 나도 너에게 쉽게 감정을 쏟아내지 않을 예정이니 너도 나에게 그러지 말아 달라는 개인주의적 감정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기쁜 일에 쉬이 기뻐하지 않고, 슬픈 일에 쉬이 슬픔을 비추지 않는다. 삶을 어쩌면 참 피곤하게 사는 것 같다. 감정 전달에 있어 요령 있고 효과적인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정.
하지만 당장에 불쑥 튀어나오는 감정적인 모습은 다소 날 것들이 많아, 한 박자 멈춰 서서 잠깐 내 마음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가지는 편이다. 한 번의 체로 걸러진 감정은 상대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의 것으로 가공된다. 나는 그러한 가공이 상대를 위한 배려이고, 성숙한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인색한 감정 기제는 갈수록 견고해져만 가서, 가끔 상대가 상처를 받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근래 들어 친해진 친구가 있었다. 여행도 함께 다녀오고 유쾌한 대화가 오갔고 성정이 착해 보인다. 나를 잘 따르는 것이 싫지만은 않아 잘 지내고 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카페에서 눈물을 쏟으며 힘든 일을 토로했다. 어머니와 갈등이 있었고 속상했던 모양이다. 가족 문제는 참 뭐라고 왈가왈부할 수 없어 스스로 더 단단해져 보자며 본인의 태도에 대한 충고를 해주고 보내주었다.
그래 너무 힘들면 한 번쯤은 나를 깊게는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나무 숲에 토해내듯 말하면 풀리기도 하니까. 나는 그 친구에게 그 정도의 호의는 보일 수 있으니 한 처사였다.
하지만, 이후로 그 친구는 아직 꺼내지 않은 속에 비관과 슬픔들을 자꾸 내 앞에서 끄집어 내려했다. 나에게 쏟아져 나오는 슬픔과 비관의 감정들은 너무 날 것이었고 나는 거부감이 들었다.
물론 그 상황들을 자세히 풀 수는 없지만, 다분히 좋지 않은 상황임은 알았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친구에게 거리를 두고 말았다. 물러 터진 마음에 감정들이 새 나오는 것이 참 보기가 싫어서.
대개 상대의 슬픔을 자꾸 받아주다 보면, 상대는 자꾸 나에게 슬픔을 멈출 수 없이 쏟아내고, 나는 상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소진되어버린다. 나는 결국 나를 먼저 생각해버렸기에 친구와 약간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에 대한 거절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사이는 조금 서먹해져 버렸다.
또 하나의 생각은 시련은 셀프라는 것. 시작은 자의 혹은 타의겠지만 그를 결국 끝낼 수 있는 것은 나 스스로이니까. 아무도 너를 도와줄 수가 없다가 아닌 그 끝을 낼 수 있는 열쇠가 나인 것이다. 그 친구가 스스로 일어설 즈음 나는 다시 그 친구에게 다가가 보려 한다. 밥 먹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유쾌한 만남을 빌어 힘을 내어 일어선 그 친구에 응원이 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