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존재로 나아가는 나
나라는 사람에 대한 고민이 늘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본질을 꿰뚫어야 하는 질문은 쉬이 답하기가 어렵다.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에게 묻는다. 누구냐, 넌.
시드니에 오고 나서 나에게 붙는 꼬리표가 계속해서 바뀐다. 시드니 1년 차에서 6년 차.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하는 동양 여자애에서 그래도 대충은 알아듣겠는 영어를 쓰는 동양인 여자. 한국에 있을 때는 나에게 붙는 꼬리표에 지금처럼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때의 꼬리표는 그 종류도 다양했지만 쉽게 붙여진 만큼 접착력이 약해 쉽게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방인으로 서 있는 시드니에서는 내게 붙은 꼬리표가 나와 너무 밀접해서 꼬리표가 내가 되어 버린다.
내가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싶다면 시드니 노던 비치로 여행을 떠나면 된다. 온 마을 사람들이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눈길 하나로 알려준다. 고개만 돌려도 마주치는 눈이 수 십 개다. 내 등 뒤로 비틀즈가 환생해서 따라오는 줄 알았다. 그렇게 시드니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곳을 또 하나 지운다. 그런 일들이 멘탈을 회복하기도 전에 줄지어 뒤 따르면 그냥 그런 삶을 사는 게 내가 되어 버린다. 동양인이라는 사실은 바꿀 수가 없으니 그저 연필로 갈 수 있는 곳을 지우며 사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다. 그래서 또다시 고민한다. 나는 누구인가?
간혹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때 강인 해지라는 답변을 받을 때가 있다. 강인함. 내가 강인하지 않다는 사실을 돌려 말하는 촌철살인 혹은 소시오패스가 하는 헛소리이다. 어딜 가나 이상한 사람은 있다는 또라이 보존 법칙을 들먹이며 말하는 사람에게 말한다. 알고 있었도 상처받기 마련이라고. 인생에 강인했던 적이 없었던 건지는 몰라도 상처받을 일을 당하고 마음에 스크래치 하나 없이 지나 간 적이 일생에 없었다. 강인하지 않기에 더욱더 나라는 중심을 잡는 일을 갈망하게 된다.
자신의 부족한 점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 만약에라는 상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만약 내가 좀 더 영어를 잘했더라면. 만약 내가 모아놓은 돈이 좀 더 있었더라면. 만약에 그랬더라면 좀 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 끝에 남는 것은 지난날의 후회와 현재를 향한 부정이 반절 이상이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질문이 늘어다는 것은 길을 잃었음의 반증이다. 목적지를 잃어버렸거나, 방향을 찾지 못하거나, 내가 어디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 본다. 그러다 잘 못 든 길을 발견하게 되고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결국엔 나아가야 한다. 목적지를 새로 정하고, 방향을 찾고, 잘못 든 길에서 배운 것을 몸에 지니고 걸어가야 한다. 살아있는 한 끊임없는 여정이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나 일수는 없다. 그건 아마 한평생을 살아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존재로 나아가는 나인 것이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라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