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거두기 프로젝트」 프롤로그
브런치스토리의 첫 프로젝트는 '상실'입니다. 상실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담은 네다섯 편의 글들이 한 묶음이 될 예정이에요. 인생의 큰 사람을 잃고도 슬퍼할 기회가 없었던 저에게 지금이라도 울 수 있는 공간이 되어준 빈소 같은 글들입니다. 이 개인적인 기록은 앞으로 어떤 것에 대해 글을 쓰든지 그전에 반드시 먼저 채워야 할 필연적인 첫 단추입니다. 그래서 상실에서 출발합니다.
상실은 제가 처해 있는 현재 상태이기도 하고, 지난 몇 년 동안 주야장천 저를 쫓아다녔지만 애써 못 본 척했던 손님이기도 해요. 손님 '상실이'는 모른 척 당했던 것이 어지간히 서운했는지 언젠가부터 일상 구석구석에 조용히 훼방을 놓으며 화풀이를 하더라고요. 저러다 그만두고 가겠지 하며 참고 기다렸는데 잘못된 기대였어요. 일상의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헤집기 시작하더라고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억세게 돌려세워 얼굴을 마주했어요. '너 누구야!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사실 무서워서 도망 다닌 거였는데 막상 상실이의 얼굴을 마주하니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고요.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는 애처롭지만 파랗고 귀엽기까지 하던데, 상실이는 처참했어요. 차라리 울기라도 하지. 울 줄도 모르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멍한 표정으로 바라 보고만 있더라고요. 그 얼굴을 보고 도리어 제가 울음을 터뜨렸어요. 같이 울자고 저를 찾아왔는데 그동안 계속 외면을 당했으니 얼마나 외롭고 아프고 슬펐을까요. 마음이 찢어지도록 미안했어요. 이제는 상실이의 손을 잡고 나란히 가야 할 것 같아요. 「상실 거두기 프로젝트」는 상실이를 대면한 순간부터의 기록입니다.
명사 '상실'과 동사 '거두다'를 짝꿍으로 사용한 이유는 '거두다'의 두 가지 의미 때문이에요.
거두다
①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 염려 따위를 접거나 놓아두다
② 고아, 식구 따위를 보살피다
[참고: 표준국어대사전]
거두다는 '끝내다, 그만두다'의 뜻을 가지고 있어요. 과연 상실을 끝내거나 그만둘 수가 있는 건지 상실의 상태가 진행 중인 지금은 판단하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상실이가 일상을 휘젓는 일은 그만두게 해야 함이 분명해요. 그리고 상실이가 훼방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외면받는 손님이 아니라 자아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보살펴야 함을 알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상실을 거두려고 합니다.
프로젝트의 첫 번째 글은 《잃어버린 할아버지: 나를 위해 쓰는 부고》라는 제목입니다. 꼬맹이의 네 번째 생일날 새벽에 외할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받았어요. 타국에서 충분히 애도할 수 없어 시작된 자책과 무기력이 이후 수년간의 일상을 삼켜버렸어요. 제대로 상실하지 못해 따라온 자책과 무기력을 피해만 다니다가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어 마주하기로 결심했어요. 상실이를 처음 대면한 순간이었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할.아.버.지’를 글로 불렀어요. 누구에게도 말로 쏟아내지 못한 슬픔을 할아버지에게, 나에게, 그리고 상실 그 자체에게 글로 쏟아 내었더니 눈물이 함께 쏟아졌어요. 할아버지를 잃은 후 처음으로 슬픔의 크기와 얼추 비슷한 만큼 울었어요. 제대로 상실하지 못한 후에 찾아온 자책과 무기력은 이렇게 흘려보내야 했던 거였구나 그제야 알게 되었어요.
두 번째 글은 《오래 앓던 마음 고치기: 나를 위해 쓰는 처방전》이라는 제목입니다. 상실이를 대면한 후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그동안 외면했던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건네고 이제는 함께 살아가기로 약속했어요. 일상이 왜 헝클어졌는지, 감정이 왜 요동치는지 이유를 모른 채 오랫동안 앓았어요.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막막했어요. 커다란 이별에 걸맞게 크게 슬퍼하지 못해서, 상실과 슬픔을 피해 다니느라 모든 게 엉켜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났더니 이제는 앓던 마음을 고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어요.
그다음 글은 《상실하는 방법 배우기: 나를 위한 상실 수업》이라는 제목입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와 데이비드 케슬러(David Kessler)의 ‘상실수업(2014, 인빅투스; 「On Grief and Grieving」)’을 읽으며 쓴 글이에요. 이 책이 책장에 십 년 동안 꽂혀 있어야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안 괜찮은 이유도 모르고 괜찮아지는 방법은 더더욱 모른 채 오랜 시간 앓는 동안 누구에게든 물어보고 싶었어요. 도대체 내가 지금 왜 힘든 걸까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픔의 정체를 스스로 모르는 채 누구에게 어떤 조언도, 도움도 청할 수 없었어요. 상실이를 마주하고 한바탕 울고 났더니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분명해지더라고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십 년 동안 책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엘리자베스 선생님과 데이비드 선생님이 들려주는 상실 후에 대한 조언이 상실이를 거두는 과정의 담담한 마무리이자 약속 없이 찾아올 또 다른 상실이를 만날 준비가 되어 줄 거라 생각해요.
*글의 구성은 프로젝트가 진행됨에 따라 업데이트될 예정이에요.
저에게는 상실이 말고 '완벽이'라는 오랜 웬수도 있어요. 완벽이 덕에 얻은 것도 많지만 가끔은 너무 심하게 굴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들곤 해요. 하루 24시간을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던 싱글 시절에는 완벽이의 고집을 받아주어도 큰 문제가 없었어요. 하지만 돌보아야 하는 가족이 생기고 나서 나의 24시간이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되면서 완벽이는 괴로움으로 변해갔어요. 거기에 상실이까지 생기고 나니 더 이상 완벽이는 데리고 다닐 수가 없겠더라고요. 저는 사실, 눈알이 팽팽 돌 지경까지 퇴고를 하지 않으면 이메일 한 통도 못 보내는 종류의 인간으로 살아왔어요. 완벽에 가까워져야 하고 그럴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왔던 것이죠. 상실이 덕분에 알았어요. 완벽, 먹지도 못하는 거 어따 쓰냐. 상실이를 안고 완벽이까지 업고 가는 것은 불가능해요. 상실이는 버릴 수가 없으니 완벽이랑 멀어지려고요.
가끔 오타도 있고 줄도 비뚤어지고 주술호응도 안 맞고 틀린 내용도 있는, 불완전하고 모자란 상태의 글을 발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좀 어긋나고 부족해도 세상은 안 무너지고 나도 안 무너진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주어야 해서요. 읽으시면서 오류나 오자 등을 보시면 '이 사람 목표를 잘 달성해 내고 있구나'하며 칭찬해 주세요.
(2025년 2월 12일에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