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밝혀지다

책가게 일지 04

by 김혜민

공유서가를 이용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책가게 홈페이지에서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책바구니'에 담아요. 이제 '공유 신청하기' 버튼을 눌러 공유이용료와 배송료 결제로 넘어가면 되는데, 그전에 한 단계가 더 있어요. 바로 '공유를 위한 약속 (이후, '공유 약속')'을 읽고 확인하는 것이지요. 공유 신청 과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공유 약속을 문지기처럼 세워둔 이유는 이 약속이 실제로 공유서가를 드나드는 책과 공유회원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지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드릴게요.


공유를 위한 약속

첫 번째 약속, 공유회원은 '다정한 책 읽기'를 추구합니다.

책에게 다정합니다. 책이 다치지 않도록 마음을 씁니다.
서로에게 다정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공유서가를 이용하는 '동료' 공유회원을 배려합니다.
환경에 다정합니다. 포장을 재사용하여 불필요한 쓰레기나 자원 낭비를 최대한 줄입니다.

두 번째 약속, 최대한 공유 기간을 지킵니다.

기본 반납일에 책을 반납합니다. 어려운 경우에는 미리 책가게에 연락하여 7일 연장합니다.
연장 후, 최종 반납일에 책을 반납합니다. 어려운 경우에는 책가게와 함께 방법을 찾습니다.

세 번째 약속, 책가게와 다정하고 솔직하게 소통합니다.

책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난 경우, 특히 더 이상 공유가 불가능할 정도의 심한 상처나 분실의 경우, 공유회원이 대응 방안을 먼저 제안하거나 책가게와 함께 방법을 찾습니다.

네 번째 약속, 공유회원은 '행복한 책 읽기'를 추구합니다.

행복한 경험이 오래 이어지길 바랍니다. 책공유가 행복한 경험이어야 그 통로인 책가게도 지속될 수 있습니다. 공유의 선순환을 위해 모든 순간이 행복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요약하자면, '다정하게 소통하고 배려하면서 행복하게 책을 읽자'는 약속입니다. 어때 보이나요. 무시무시하죠. '보증금 몇 유로 먼저 내셔야 합니다, 늦으면 하루 당 몇 유로 연체료가 붙습니다'하고 무표정하게 말하는 문지기보다 '다정하게 소통하고 배려하면서 행복하게 책 읽으세요'하고 가만히 미소 짓는 문지기가 더 무시무시하죠. 앞의 문지기가 얼굴 없는 자동 응답기라면, 뒤의 문지기는 '얼굴'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책가게는 많은 부분이 '유인(manned)'으로 작동하는 '수동식(manual)'입니다. 공유 신청 수신 확인은 매번 직접 쓴 이메일로 공유회원에게 발송됩니다. 공유기간 날수도 손가락, 발가락으로 세어서 적습니다. 공유회원들도 직접 이메일이나 메시지로 반응을 주시지요. 공유의 모든 과정에 사람의 얼굴이 있어요.


공유 약속도 '수동'으로 작동합니다. '무시무시'라고 장난스럽게 표현했지만 사실은 그 의미가 무시무시하게 크다는 뜻입니다. 별다른 소통 필요 없이 그저 정해진 액수를 청구하고 받으면 관계가 끝나는 무인 키오스크 같은 과정이 아닌 거죠. 사람한테 가서 주문하고 사람한테 받아오는, 즉 대인 소통을 해야만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많은 것이 무인으로 바뀌어 가는 요즘입니다. 눈 한 번 마주칠 필요 없이, 말 한마디 주고받을 필요 없이 정말 많은 것들이 가능한 시대이지요. 그 와중에 책가게는 참으로 구식이고 번거롭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하고 소통을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공유회원들은 이 번거로운 소통의 과정을 기꺼이 함께 해주고 계십니다. 다정하고 솔직한 것은 기본이고 종종 명랑하고 귀엽기까지 하시죠. 지난 5년 간 소통의 흔적이 이메일 보관함과 편지 보관함에 차곡차곡 쌓여있어요. 지금 슬쩍 옆을 쳐다보니 '공유 약속'을 들고 서 있는 공유서가 문지기의 표정에 자부심이 가득하네요. 그럴만합니다.

IMG_1096.JPG 그동안 책가게가 받은 마음들이에요. 봉투에, 편지에, 메모지에, 카드에 손글씨가 꾹꾹 담겨 있어요.




지금은 가입비, 보증금, 연체료 3종 세트의 부재가 자연스럽지만 사실 기획하는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들락날락했어요. 보증금이 있다면, 보증금이 없다면, 연체료가 있다면, 연체료가 없다면, 가입비가 있다면, 가입비가 없다면. 선례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머릿속으로 이런 경우, 저런 경우를 가정해 보아도 딱 떨어지는 답을 찾을 수 없었어요. 결국, 밖이 아니라 안에서,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기대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돌고 돌아 '이 책가게는 왜 존재하려고 하는가'하는 근원적인 물음에서 다시 시작했어요.


책가게가 존재하는 이유는, 모국어 책이 고픈 타국의 여러 마음들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고픈 배를 채워주는 '밥집'처럼, 고픈 마음을 채워주는 '책집'이 되고 싶었어요. '고픔'은 내면에서 발생하는 감정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고픈 마음으로 공유서가를 찾아온 분들이 그냥 어쩌다가, 혹은 외부의 무언가에 떠밀려서 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글책이 그리운 마음을 네덜란드라는 타국의 환경에서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 이리 찾아보고 저리 찾아다니던 중에 공유서가로 이어지는 길을 보고 문 앞까지 오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만난 공유회원에게 공유책을 소중하게 읽는 것, 읽고 난 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것, 공유 과정에서 필요한 소통을 나누는 일이 강제적인 장치가 없으면 어려울 것이라고 도저히 생각되지가 않더라고요. 보증금이 담보로 있어야만, 연체료가 기다리고 있어야만 책과 책가게가 지켜질 거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 모인 실제 데이터들이 이 장밋빛 가설을 참이라고 증명해 버렸지요. 그저 희망적 사고가 아니었어요. 근거가 뒷받침하는 결론이 된 것이죠. 가입비, 보증금, 연체료 같은 강제적 장치가 없어도 문제없이 약속이 지켜질 수 있음을 충분한 기간 동안 무작위로 모은 충분한 표본들이 시원하게 증명해 버린 거죠.




이 증명의 핵심은 결국 '자발적인 마음'이더라고요. 이 증명에 힘을 싣는 또 다른 예도 있었어요.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어요. 한 공유회원께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인에게 응원의 선물로 공유서가의 책을 몇 권 골라 보내주고 싶은데 가능할지 물어보셨어요. 공유서가는 원칙적으로 공유회원 본인이 읽을 책을 직접 신청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기 때문에 이 문의에 대해서 조금 생각을 해봐야 했어요. 왜냐하면 불확실성이 높아지거든요. 책이 공유회원이 아닌 다른 분에게 가게 되면 잘 배달되었는지, 공유기간이 더 필요한지 등 절차적인 부분을 확인해야 할 때 직접 소통할 수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 의문도 들었어요. 직접 고른 책이 아니라는 점은 일단 접어두고 애초에 책을 공유해서 읽고자 하는 마음이 타인으로부터 비롯되었을 때, 과연 공유된 책들이 실제로 '읽힐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더라고요. 사실, 이 두 번째 불확실성은 책가게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에요. 책이 공유되어 나간 후부터 책가게로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은 오로지 책과 '보호자' 사이의 개인적인 영역이니까요. 그래서 두 번째 불확실성은 혼자만의 궁금증으로 남겨두고, 절차적 불확실성만 고려해 보기로 했어요.


사실, 이 문의가 오기 전에도 '책공유를 선물하는 상품이 가능할까'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있거든요. 누군가에게 '책을 읽는 시간'을 선물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 의미는 있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절차적인 불확실성 때문에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아이디어인데 마침 이 기회를 시범 사례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범 결과에 따라 '공유 선물'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로 했어요. 그리고 시범도 시범이지만, 무엇보다 문의하신 공유회원에 대한 신뢰가 있었어요. 그 신뢰로 절차적인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보았고요. 더불어, 책 읽는 시간을 위로와 응원으로 선물하고 싶어 하는 공유회원의 따뜻한 배려가 지인의 마음까지 전해지면 좋겠다는 바람도 컸고요.


고민 끝에 공유회원께 한 번 해보겠다고 답을 드렸고, 공유회원께서 몇 권의 책을 골라 공유신청을 하셨어요. 이번 공유신청은 책뿐만 아니라 마음도 담고 가는 거라 준비하는 기분이 조금 색다르더라고요. 타인의 마음에서 비롯한 책공유이지만 그 책들 속에 위로와 응원이 담겨있다는 것이 받는 분께 전해지면 스스로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과 비슷한 공유의 시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장밋빛 그림을 그리게 되더라고요. 책가게가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들고요. 그래서 예쁜 카드에 공유회원의 마음과 책가게의 마음을 적어 책과 함께 지인의 주소로 보냈어요. 마치 꽃 선물을 배달하는 꽃집 사장님이 된 기분이더라고요.


그런데 아쉽게도, 절차상 우려하던 부분이 첫 단계부터 실제로 나타나더라고요. 책소포가 이웃집에 맡겨져 있다는 알림을 받았지만 지인께서 잘 픽업하셨는지 신속하게 확인할 길이 없었어요. 그리고 이후에는 공유 기간이 지났지만 반납 일정에 대해 의논할 수가 없었고요. 책가게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과정에 대한 확인을 직접 소통으로 할 수 없다는 거리감 때문에 심리적인 에너지가 추가로 들었어요. 결국은 선물하신 공유회원이 중간에서 여러 번 연락을 전달해 주셔야 했지요.


이런저런 과정 끝에 공유 여행을 다녀온 책들이 책가게로 돌아왔어요. 상자에 담긴 책들이 어떤 시간을 보내고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선물하신 분의 바람대로 응원과 위로의 시간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만 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어요. 어쩌면 책가게에 '공유 선물' 시스템을 추가하지 않기로 결정한 상징적인 장면일 지도 모르겠어요. 돌아온 소포 상자에 책들과 책 목록, 그리고 메시지를 적어 함께 보냈던 그때 그 카드까지 그대로 들어있었어요. 어떤 사정으로 안부 카드도 함께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책가게의 입장에서는 그 봉투째 돌아온 카드가 주는 메시지가 있더라고요. 앞서 말한 것처럼, 공유 기간 동안 책과 보호자가 맺는 관계는 철저히 개인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온전히 존중합니다. 카드가 돌아오게 된 과정도 마찬가지지요.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장면을 추적할 필요도, 추정할 필요도 없지요. 하지만 눈으로 직접 본 장면에 대해서, 책가게의 기능과 존재와 연관이 있는 한도 내에서, 해석하고 판단할 재량은 있다고 생각해요. '돌아온 카드' 장면에 대한 책가게의 해석과 판단은 '자발적인 공유가 아닐 때는 그 의미가 중간에서 되돌아올 수도 있다'는 배움이었어요.


시범 사례의 절차적 측면을 평가해 봤을 때, 예상처럼 직접 소통의 어려움과 책 보호자와의 거리감이 책가게를 돌보는 입장에서 시간적, 심리적으로 큰 비용이었어요. 공유회원이 모든 책임을 자처하셨지만 그래도 매번 공유회원께 연락을 부탁드리기도 미안했고요. 공유회원들은 책가게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모든 과정에서 응답을 매우 잘해주십니다. 'responsive'와 'responsible' 모두에 해당합니다. 공유 과정이 대면으로 진행되지는 않지만, 서로의 '얼굴'을 인식하면서 소통하니까요. 하지만 '공유 선물'의 경우에는 책가게와 책 보호자 간의 직접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얼굴이 안 보이더라고요. 얼굴이 안 보이니까 소통도 어렵고 마음이 오가기도 멀고요. 그 과정에서 새어나가는 에너지도 많고요. 공유회원들은 책을 읽는 행위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책공유' 자체에 대한 애정이 크기도 합니다. 공유 과정의 모든 번거로움마저 기꺼이 품고 안는 애정이 있어야 쌍방이 순조로운 책공유가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결국, '공유 선물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샘플 하나로 결론을 내린 연구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항의하지 않으실 거... 죠? 책가게의 공유 신청 건수를 생각해 보면 한 건의 샘플이 가지는 대표성이 사실 커요. 특히나 이렇게 예외적인 경우를 대표하는 샘플은 하나가 전부일 수도 있거든요. 실제로 공유 선물에 대한 시범 사례는 위의 경우가 5년 동안의 유일한 경우이기도 했고요.


책가게는 '오래 존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승승장구나 입신양명이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최첨단이나 유행선도나 신속배달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오래 존재하기 위해서 공유 신청의 모든 과정이 공유회원뿐만 아니라 책가게에도 그저 편안하고 무탈하고 평화롭기만을 바랍니다. 웬만하면 늘 비슷비슷하기를 바라고,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기를 바랍니다. 굳이 혁신적이지 않기를 바라고, 별 거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최소한의 에너지 변동폭으로 최대한 안정적인 흐름으로 얇고 길게 '있을 수' 있으니까요.




가끔 초면 혹은 구면의 한국 지인들이 방문하실 때가 있어요. 공유서가를 보시며 '책이 많네요' 하고 궁금해하곤 하시요. 그러면 '사실은 책가게예요' 하고 짧게 설명을 드리지요. 그런데 설명만 드리지 홍보는 하지 않습니다. (자랑인가...) 근데, 저는 안 하는데, 저희 집 큰 짝꿍은 가끔, '오신 김에 책 하나 골라 가시죠' 하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제안을 할 때가 있어요. (아, 왜...) 그러면 손님들은 살짝 곤란한 기색을 보이곤(?) 해요. 그냥 책장이 보여서 한 번 가볍게 물어본 것뿐인데,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그렇고 애써 한 두 권 고르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괜찮으니 안 빌리셔도 된다고 말씀드려도 이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거죠. 그런 경로로 공유되어 나간 책들은 공유서가의 문지기와 자발적으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나간 책들이 아니라 대부분 중간 소통과 공유 약속 준수에 어려움이 있더라고요.


중학교 때 배운 조건 명제와 대우가 떠오르네요. 조건 명제, 'A는 B이다'가 참이면 그 대우인 'B가 아니면 A가 아니다'도 참이라고 배웠지요. '자발적 책공유는 약속을 지킨다'는 조건 명제는 참입니다. 책가게의 공유회원들이 이미 넘치게 참으로 증명해 주셨지요. 그러므로 대우인,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자발적 공유가 아니기 때문일 수 있다(매우 조심스러운 버전의 대우)'도 (거의) 참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개인적인 심리와 상황 등이 복잡하게 작용할 테니 이렇게 간단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요. 비단 책공유뿐만은 아니겠지요. 장미빛 안경을 끼고 봐서 그런가 했는데, 스스로 자라난 마음에서 진짜 장미꽃이 피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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