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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진문화연구소 Nov 27. 2019

[12호] 나루생활사_실패월간 시작




나루생활사



실패월간 시작



가을이 지나고, 이젠 공기도 차가운 게 정말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광진구에서 나고 자랐는데, 날씨가 쌀쌀해지면 어린이회관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기억이 난다. 20년도 더 되었다.어릴 때부터 운동을 잘하지 못했는데, 유난히 스케이트장에 가는 건 좋아했다. 스케이트를 탈 때 엄마는 멀리 떨어져있어야 했다. 혼자서 스케이트화를 빌리고, 끈을 졸라매어 신발을 신고, 빙판까지 살금살금 걸어가면 왠지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투명한 빙판에 처음 발을 내밀 땐, 언제나 떨렸다. 넘어질 것 같은 두려움과 재미있을 것 같은 설렘이 교차했다. 마음과 달리 이내 긴장해 온몸에 힘을 가득 실어 뜨거운 날로 투명한 빙판에 여기저기 자국을 내가며 스케이트를 탔다. 긴장하지 말고, 힘을 빼라는 선생님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한껏 스케이트를 타고나면, 발끝이 저릿저릿 추위에 무감각 해졌는데, 엄마는 어묵을사서 기다려주었다. 차가운 공기 아래 모락모락 김이 나는 어묵을 크게 베어 먹으면 그제서야 긴장이 풀어졌다. 어쩌면 어묵이 좋아서 스케이트장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땐 서른이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서른이 훌쩍 넘은 작년 드디어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혼자 큰 결정을 내렸다.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책방을 시작했다. 많은 것들을 책임져야 하는 두려움과 잘 될 것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쭈뼛쭈뼛 자영업이라는 빙판에, 처음 스케이트를 배우던 어린아이처럼 어색한 자세로 한발을 내밀었다. 두려움 보단 설렘과 자신감이 컸지만, 어느새 마음과 다르게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제서야 나의 자영업 과정,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소비자에게 콘텐츠를 제공하고, 가게의 운영체제를 구축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모든 일에 사소하거나 크게 실수하고, 실패했다. 야심차게 준비했던 신 메뉴는 상했고, 정해둔 매뉴얼과 다르게 기계는 어딘가 하나씩 고장이 났고, 계획했던 모든 일은 뒤바뀌기 일쑤였다. 동업하는 친구와 많은 시간 사소한 사안에 의견차이와 감정을 조율해야 했다.      


실수와 실패가 잦아지니 자신감이 사라졌다. 그렇게 자조 섞인 모습으로 차가운 현실의 빙판을 헤매다, 우연히 ‘작당모의’라는 광진구 지역모임에서 자영업 선배를 만났다. 비교적 일찍 시도해본 여러 실패 경험담이 공감이 가서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자영업을 하고 있는 모든 과정, 실패의 이야기가 스케이트장의 어묵같이 긴장이 풀리는, 그래서 기다려지는 위로의 시간 같았다. 어쩌면 실패에는 공감과 위안이라는 미묘한 응원이 숨어있었나 보다. 실패라는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일상을 모아보고 싶었다. 결과로 증명되거나, 나타나지 않아 의미 없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소한 일에 의미를 부쳐주고 싶었다. 그렇게 책방과 디자인 스튜디오의 협업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는 실수와 실패가 너무 많은 자영업자 생활을 잘 버티기 위해서이고, 가능하다면 평범한 사람들을 조명해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와 응원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같은 지역에서 만난 두 자영업자는 비애로 시작해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과정을 기록하는 ‘실패월간’이라는 간행지를 만들었다. 많이 넘어져 최대한 긴장하지 않고, 힘을 빼고 만들었다. 9월에 처음 창간해, 아직 4호밖에 나오지 않았다. 개인사업, 스타일링, 구매, 사랑실패 등 일상의 실패를 주제로 발행하고 있다. 커피한잔의 가격 3000원으로 성공을 지향하는 현실에서 잠시 쉬어가는 시간같이 쉽고 편하게 읽혀졌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실패를 소개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실패의 경험으로 언젠가 도전에 성공하기도 하고, 또다시 쉽게 실패가 재생산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능한 오랜 시간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실패담을 기록해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실패가 좌절의 상징이 아닌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보통 일이 될 수 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실패월간이 매달 간행에 실패하지 않도록, 사소한 관심을 부탁 드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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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동에서 책과 음료를 팔고 있습니다. 책방에선 크고 작은 실패를 반복하고, 실패월간을 통해 과정을 기록합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실패월간은 다른 분들의 실패사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패의 여정, 과정을 함께 기록해주세요.

· e-mail : openbookstore@naver.com
· Instagram : 책방열음 open_bookstore 실패월간 magazinef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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