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호 웹진 예술경영 편집장
최근 들었던 가장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 한 밴드가 코로나19 상황에서 예정되어 있던 공연이 취소되자, 유튜브로 온라인 생중계를 진행했다. 지인의 채널을 빌려 진행한 이 이벤트에는 평소 밴드의 공연을 보러 오던 관객보다 월등한 숫자가 참여했고, 이에 따른 수익도 높게 나타났다. 물론, 이런 일이 가능한 까닭은 평소에 관객이 워낙에 적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예술인들은 이 에피소드를 두고 맘껏 웃을 수 없다. 예년에도 이들은 공공예산이 본격적으로 집행되는 3월 전까지 ‘보릿고개’로 불리는 배고픈 시기를 경과해왔다. 그래서 적지 않은 수의 예술가들이 조금은 어리둥절한 뉘앙스를 담아 이야기한다. 코로나19로 어렵고 힘드냐고? 예전과 다를 바가 없는데? 위기는 역설적으로 본질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과연 이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니 끝이 있기는 한 걸까. 뉴 노멀(New Normal)이라는 말에는 달라진 세계에 대한 평가가 함축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새로운 표준, 코로나19로 달라진 삶의 양상은 코로나 이후에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조금은 우울한 전망이다. 코로나19가 아예 역사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제안마저 나온다. 예수의 탄생을 전후해 세계의 역사를 구분지었던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에 빗대 코로나 이전(BC : Before Corona)과 이후(AC : After Corona)로 역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화와 예술은 특별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고귀하고 유별나다 해도 삶 그 자체를 넘어설 순 없는 노릇이다. 재난지원금을 둘러싼 소동에서 배워야 한다. 예술인복지 도입을 두고 설왕설래 말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꾸준히 영역을 넓히고 있다. 도저히 이룰 수 없어보이던 고용보험마저 현실화됐다. 장기적으로는 보편복지에 포괄되는 방향을 고민하면서 자기의 자리를 잡아나가야 할 것이다. 예술인들을 위한 재난지원은 조금 더 이야기할 만한 점이 있다. 일부 지자체 출연 문화재단에서 이번 사태를 대하는 입장은 비상이라는 말에 걸맞은 태도였다. 경기문화재단은 기본재산 50억 원을 허물어 지원사업을 편성했다. 보통 기금이라고 이야기되는 적립금이다. 장기적인 활용을 염두에 두고 적립해 왔던 터라 이자 활용을 넘어선 사용은 어느 지역이나 조심스러운 것이었지만, 경기문화재단이 과감한 시도를 했다. 물론, 응급상황에 대한 판단이 자의적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기상황에서 적절한 판단과 대응이 뒤따른다면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해결의 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인천 연수문화재단의 사례다. 2019년 출범한 연수문화재단은 올해 추경을 통해 국제교류사업비로 책정되어 있던 5천만원을 예술인 긴급지원으로 전용했다. 역시 과감한 선택과 실행이다. 지원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프로젝트 지원이 아니라 예술인 당사자에 대한 지원을 한다. 대부분의 중간지원조직이 재난대비 사업으로 내놓은 것은 프로젝트 지원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신청과 심사, 정산 등 행정수요를 최소화하는 등의 노력이 돋보인 곳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활동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기회를 갖는 것도 당연히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연수문화재단의 이 사업은 예술인이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의 예술정책은 마치 정책이 예술가와는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운영되어 왔다. 예술인의 존재와 삶의 기반을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 채 몇 년이 안 된다. 이 같은 사례는 향후 긴급 상황을 맞이할 때 예술인 지원을 논하는 중요한 참고사례가 될 것이다.
앞에서 위기는 본질을 드러낸다고 썼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생계와 상관없이 자가격리 기간을 자기휴식과 자기성찰의 기회로 가질 수 있는 이들은 소수였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저개발국가의 피해가 우려되는 지점도 바로 이곳이다. 문화예술계 역시 공연과 행사의 잇따른 취소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회적 참사가 벌어지거나 감염병이 만연할 때 축제를 취소하거나 공연장의 문을 닫는 것은 많이 봤지만,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가 영업을 중단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물론, 축제가 셧다운되면 백화점도 함께 문을 닫으라는 주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뉴 노멀에 맞춘 기준을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축제나 공연 등 행사의 계약서 내용을 검토하고 천재지변에 해당하는 항목의 대급지급 기준을 변경해야 한다. 수많은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있지만, 신종플루, 메르스, 아프리카돼지열병, 세월호 사건 등 사회적 재난으로 인한 행사 취소에 대응하는 매뉴얼이 없다. 기관이나 지자체 입장에서는 천재지변을 이유로 취소하면 그만이지만, 예술단체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다. 일차적으로는 연기를 고려하되 여의치 않다면 일정 부분의 활동을 인정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지급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실제 행위가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런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기회비용을 예술단체가 모두 떠안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뉴 노멀 시대에는 공공의 인프라를 공유하는 데 적극적이어야 한다. 공공기관은 상대적으로 예술단체들이 갖추지 못한 인프라들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 최근 마포문화재단이 공연을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송출한 적이 있다. 재단 자체 장비로는 어렵겠다 생각했는데, 뜻밖에 마포구에서 갖추고 있는 장비를 협조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공공기관들이 자신들이 갖추고 있는 인프라를 민간과 적극 공유하려는 태도를 보게 될 수 있을까.
안태호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이사.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 웹진 예술경영 편집장.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활동가, <컬처뉴스> 편집장을 지냈고 부천문화재단, 제주문화예술재단에서 일했다. 함께 쓴 책으로 『나의 아름다운 철공소』, 『노년예술수업』 등이 있다. 스무 살 무렵 빼어난 재능들에 주눅 들어 창작에서 도망친 후, 예술 동네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문화 정책과 기획 관련 일을 해 왔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왕성한 문화 소비자가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