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사이 17호에서는 ‘기록’을 주제로 문자, 기호, 이미지 등 나만의 색깔로 일상과 지역을 기록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광진구에는 일과 작업 사이에서 산골 도서 벽지를 오가며 기록의 끈을 놓지 않은 사진가가 있다.
진심이 담긴 솔직한 사진 한 장을 위해 30년간 전국의 통폐합되거나 폐교된 분교들을 찾아가 촬영하며, 사라진 학교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사진가 ‘강재훈’. 그를 만나 소박하고 정겨운 교실 모습과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을 기록했던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먼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우선 본인에 대한 간략한 소개 부탁드린다.
1987년부터 신문사 사진기자로 활동했다. 약 45년간 사진을 찍은 셈이다. (웃음) 더불어 사진가로서 여러 개인전 및 단체전을 진행하고 책을 냈으며, 현재 ‘강재훈사진학교’ 전임 강사를 맡고 있다. 언론인으로 현직에 있다 보면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접하게 되는데, 1991년 당시 뉴스를 통해 시골의 작은 분교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안타까움이 컸던 것 같다. 이 마음을 계기로 분교를 찾아다닌 지 벌써 30년이 되었고, ‘분교사진가’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된 것 같다.
45년간 한 분야에 종사하신 전문가라니 감히 그 세월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사진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사진기를 처음 접한 것은 1975년 중학교 3학년 때다. 당시에는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이라 굉장히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사진을 처음 찍었을 때 피사체들이 온전히 그려져 나오는 것이 황홀하더라. 가족과 친구들을 찍어가며 재미를 붙였고, 고등학생 때에는 사진동아리 활동도 했다. 대학은 다른 전공으로 진학하게 되었지만 결국 사진으로 다시 돌아와 사진 전공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을 다니며 사진 찍는 것으로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신문사 사진기자로 취업하게 되었다.
사진기자를 업으로 삼으면서 사진가로서의 예술 활동도 놓치지 않으셨다는 점이 정말 존경스럽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시면서 힘들지는 않았는지
사진기자로서 책임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활동하지 못했다면 사진가로서의 활동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사진이라는 영역에 자부심이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전공을 사진으로 바꾼 것도 단순히 취업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앞으로 살아갈 나의 인생에서 무엇이 나를 즐겁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고심 끝에 진로를 결정했다. 실제 33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진기자와 사진가의 삶을 병행하느라 휴가를 제대로 간 적이 없는 것 같다. (웃음) 바쁜 일상 속에서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을 지키려면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혹자는 휴가를 못 가서 괴로울 수도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내 삶을 스스로 돌아봤을 때 너무나 즐거운 기억뿐이다.
작가님께 ‘사진’이라는 의미는 인생 전체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작가님이 ‘분교사진가’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30년간 분교를 기록하게 된 계기와 시작이 어떻게 되는지
1991년 당시 정부의 소규모 학교 통폐합 정책에 따라서 작은 분교들이 무분별하게 폐교되었다. 그 수가 엄청났는데 정부 정책의 근거는 교육비용의 문제였던 것 같았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출생 인구가 많아지며, 자연스레 학교가 많이 생겼었다.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어느 산골이든 외딴 섬 오지든 학교를 세워 교육받을 수 있게 했었다. 그러던 정부가 경제입국으로 전환하면서 아마도 아이들을 교육하는데 ‘이 정도의 비용까지 들여야 하나?’라고 생각한 것 같다.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웃음) 어쨌든 당시 뉴스를 접하며 내가 어린 시절 다녔던 시골 학교가 떠올랐고, 이렇게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분교 기록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분교를 찍으러 간 곳은 경상남도 밀양 천황산 사자평 고산 습지에 있는 ‘고사리 학교-사자평 분교’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해발이 높은 분교다. 해발 천 미터 고도에 세워진 학교다. 처음 분교를 마주했을 때는 옛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 학교가 사라지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 인가하는 불안함이 뒤따랐다. 이런 학교들이 천지에 많이 있겠다고 생각했고 마음 바쁘게 찾아다니면서 지금까지 촬영하게 되었다.
30년의 시간 동안 정말 많은 분교를 기록하셨을 것 같다. 몇 군데를 다녀오셨는지, 촬영하며 마음에 남아있는 장소가 있다면 어디인지 궁금하다.
열심히 다닌다고 다녔는데 약 100군데 학교 정도 찾아다닌 것 같다. 100군데라고 해서 횟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한 학교를 70번 넘게 다녀온 곳도 서너 곳 있다. 전라남도 땅끝마을 해남 장흥부터 강원도 평창 정선은 물론, 제주 마라도까지 전국을 누볐다. 단순히 들러서 학교만 찍고 돌아오는 것이 아닌 온전히 공간 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생활과 문화를 기록하고, 삶을 담으려 노력했다.
온전히 공간 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생활과 문화를 기록하고, 삶을 담으려 노력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분교는 경기도 화성 우음도에 있는 ‘우음분교’다. 시화지구 간척사업으로 섬이 육지화 되면서 주민들이 보상금을 받고 떠나기 시작해 폐교가 예정된 학교였다. 그곳을 찾아갔을 때 이미 학생들이 모두 떠나고 1학년 여학생 한 명이 유일하게 남아있었는데, 마지막까지 아이를 돌보며 함께 있었던 선생님과 그 아이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학생 한 명이 남은 분교라니 그 광경을 기록하시면서 마음이 참 쓸쓸하셨을 것 같다.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작가님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작품 활동을 하거나 사진전을 열 때 항상 갖는 마음이 있다. 나의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잠시라도 마음이 편해지거나 아주 조금이라도 착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나는 사진이 사회적 개념을 담고 있다고 본다. 사진이 누군가의 삶에 충분한 영향을 줄 것이라 믿는다. ‘찬 우물에도 눈이 쌓인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아주 미미하지만 지속해서 끊임없이 행하면 어떠한 방식으로도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분교 촬영도 같은 이치다. 나는 분교 통폐합 정책에 반대 운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 아이들이 집 앞의 작은 분교에서 공부해야만 하는 이유를 작품을 통해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었다.
사진은 태생적으로 기록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어떠한 기록을 남길 것인지, 어떠한 이미지로 남을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분교 촬영을 통해 연을 맺은 아이들과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 이제는 20대에서 30대 중후반으로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이렇게 아이들과 만나는 것도 나의 기록 활동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한다.
‘찬 우물에도 눈이 쌓인다.’는 말씀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화제를 바꾸어 질문하겠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광진구의 이미지가 궁금하다.
1993년 성동구였던 때부터(1994년에 광진구가 신설된 것으로 알고 있다.) 광진구에 거주하고 있는 광진구민이다. 광진구는 녹지와 강, 산까지 전반적으로 아주 환경친화적인 곳으로 마음이 참 편한 곳이다. 오랜 기간 이곳에서 지냈기에 젊은 시절의 추억들이 많다. 초등학생 시절 장한평 배추밭 황톳길을 걸어서 군자교 개울을 발 벗고 건넌 기억이 있다. (웃음) 중학교 1학년 때 ‘어린이대공원’이 개장하는 날 검정교복을 입은 채 개장 손님으로 갔던 기억도 있다. 지금도 광장동에 살면서 이따금 머리를 식힐 겸 ‘어린이대공원’을 방문한다. ‘어린이대공원’은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여러 의미가 깃든 공간이라고 느껴진다. ‘어린이대공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포괄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작업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서울 시내 안에 이만한 녹지 공간이 주민들 곁에 있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고 동물원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의미가 크다. 찾아보면 중학생 시절 찍었던 사진들도 남아있을 것이다. 고등학교나 대학생 때도 정말 여러 차례 사진기를 들고 찾았던 공간이다. 최근에 고민하는 주제와도 가깝기에 진지하게 고려해보면 좋을 것 같다.
어느새 인터뷰 마지막 질문이다. 작가님이 가지고 계신 사진가로서의 가치관이 궁금하다.
전 국민이 핸드폰을 들고 다니니 아마도 사진을 찍는 인구가 약 3천만 정도 된다 싶다. 사진을 기록하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남에게 보여줄 사진 혹은 자랑하고 싶은 사진의 유혹을 내려놓고 자신이 이야기가 담기고 진심이 담긴 솔직한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다. 사진이 나의 말을 대신한다고 생각한다. 기록한다는 것은 거짓이나 연출이 담겨서는 안 되기에 피사체를 배려하는 셔터를 누르길 바란다. 부디 길가의 풀 한 포기가 되었건 돌부리가 되었건 사진기가 폭력적으로 다가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나 사진보다는 사람이 먼저다. 좋은 사진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누가 봐도 좋은 사진이 아닐까? 모쪼록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싶다.
글 이슬기
사진 이기완
강제훈 작가
e-mail kangkhan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