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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진문화연구소 Sep 08. 2020

[17호] 소소한 기록 속, 소중한 기록들


Life | 소소한 기록 속, 소중한 기록들

홍석민



자양 3, 4동 사이에는 학창시절 우리들의 비밀 놀이터가 있었다. 더운 여름날이면 물을 내뿜던 배 모양의 분수대.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자주 그곳에서 놀곤 했다. 지금 그 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오로지 기억 속에만 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 배의 모습도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 그 배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주위에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저녁에 학원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반갑게 인사해 주시던 치킨집, 놀이터에 삐거덕 거리 던 그네, 친구들과 소꿉장난하던 아파트 뒷마당 놀이터. 없어지고 새로 생기는 것에 익숙해져, 오래된 것들이 사라져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사라진다는 것은 앞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기억 속에만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말하거나 끄집어내지 않으면 영원히 잊혀진다.     


나는 기억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모든 기억이 소중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 슬펐던 기억, 부끄러운 기억, 쓸모없는 기억과 같이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기억이 소중하다는 것은 기억하고 싶든, 기억하고 싶지 않든 지나온 ‘나만의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서 ‘나’라는 고유한 존재를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쁘고 슬픈 기억이 어우러져 하나의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좋았던 기억, 슬펐던 기억 모두 나를 만들어가는 소중한 기억이다. 때문에 마을에서(혹은 동네에서) 내 기억들이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친구들과 뛰놀던 놀이터, 자주 가던 식당과 같은 공간들이 사라지며, 그와 관련된 나의 기억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이 마치 나의 일부가 잊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친구들과 함께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자양동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네의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였다. 기록한 자료들을 한데 모아서 이야기도 나눴다. 잊을 뻔했던 나의 기억들을 다시 마주하는 것은 물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아파트는 내가 예전에 살던 아파트인데 어렸을 때는 되게 크고 웅장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담벼락이 내 가슴까지 올 정도로 작다고 느껴지네.”, “우리 동네에 이런 오래된 간판을 가진 가게가 있었구나!”, “이 건물은 처음 봤어!” 무심코 스쳐 지났던 간판, 벽돌, 건물 색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새로 보게 되었던 마을 곳곳에 누군가의 기억이 메여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기억들을 찾아보고, 또 기록하고 싶었다. 이는 자양동과 이웃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우리만의 방식으로 이어나가는 ‘자양5동’의 활동의 계기가 되었다.   

 

하루는 동네 이발관 사장님을 만나 뵌 적이 있다. 사장님께서 요즘 젊은 이발사가 없는 이유, 기억에 남는 손님, 마을에 있는 다른 이발관, 가지고 계신 오래된 이발 도구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셨다. 그분에게 마을이라는 공간은 이발관과 관련된 기억으로 메여 있었다. 사장님은 마을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 달리 이발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계셨다. 고추 방앗간 사장님도, 어라운드 자양 사장님도 모두 마을이란 공통된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기억을 가지고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나만의 소소한 방식으로 마을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우리 이웃들만의 서로 다른 삶의 이야기, 소중한 기억들이 담겨있었다. 어쩌면 잊힐 수 있던 그 기억들을 듣고 기록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느 동네든 정겨운 이발소, 맛있는 식당, 평범한 아파트, 나무들과 꽃이 있다. 하지만 이 모습들은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어, 서로 다른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자양5동에서 나만의 소소한 방식으로 마을의 모습과 일상사를 기록해왔다. 자양동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만들어내는 것도 맞지만, 쉽게 사라지고 변형되는 공간과 함께 잊힐 수도 있었던 이웃들의 일상적이지만 소중한 기억들이 나의 소소한 기록 속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소소한 기억 속 소중한 기억들, 이런 소중한 기억들이 잊혀지지 않게 지켜내고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석민 자양5동 (인스타그램 : @jayang.5dong)     

‘자양5동’은 어렸을 때부터 자양동에서 살고 있는 세 친구가 모여 시작한 마을청년 문화예술그룹입니다. 지금까지는 변해가는 우리 마을 자양동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나가기 위해서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현재는 함께 고민하고 활동하는 자양동 청년예술인들의 모임으로 발전하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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