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를 하면서 한 줄 한 줄 감정을 꾹꾹 담아 원고를 쓰던 시기도 있었고 다양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인터뷰 지를 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2년 차가 지나서였다. 막내 때도 글을 쓰긴 쓴다. 그때 쓰는 글은 '보도자료, 스크롤 자막, 예고 자막' 정도랄까. 요즘은 유튜브까지 생기며 유튜브 소개글까지 늘었다. 이놈의 일은 아무튼 줄지 않아. 그런데 작가 일을 하게 되면서 난 이런 글까지 쓰게 될 줄 몰랐다. 그 이야기를 차차 시작해보겠다.
나는 융통성이 아예 없지 않지만 '원칙주의자'였다. 때론 원칙이 발목을 잡을 때도 있지만 난 그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다. 목놓아 펑펑 울긴 했지만. 당시 메인 피디님은 작가들에게 업무 외적인 일을 많이 시켰다. 나는 최대한 싹싹하게 한다고 했는데 피디님 눈에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사건의 발단은 '가방'때문이었다. 피디님은 늘 집에 일찍 가고 싶어 했다. 퇴근시간 전에 말이다. 그리고 나에게 전화가 왔다. '나 로비인데 가방 좀 갖다 줘' 그때 나는 섭외 전화에 발등이 떨어진 찰나였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의 행동이 뻔히 보이기도 했고. '죄송한데 제가 지금 섭외 전화를 5시까진 마쳐야 해서요. 죄송해요' 결국 조연출이 가방을 갖다 줬고 메인 피디는 가방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 조연출이 나를 불러 너 찍혔다는 말을 전했다. 그 조연출은 나와 동문이었는데 메인 피디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애초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 나 왜?
- 아 몰라. 어제 네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노발대발하셔서는.
- 아.. 실은 내가 가방을 안 갖다 드렸거든.
- 야! 그것 좀 갖다 드리지
그나마 다행인 건 메인 피디가 뒤끝이 없다는 정도랄까.라고 생각을 했더랬다. 다음 날 부장은 평소처럼 나를 대했기 때문에 안심하기도 했고.
- 잠깐 내 자리 좀!
- 네! (어제 일을 이야기하시려나, 괜히 찔렸다)
- 아니. 내가 우리 아들 결혼정보회사에 가입을 시키려고 하는데 이거 어떻게 하는 거니..
- (아.. 부장.. / 메인 피디지만 부장이기도 했다.) 아. 이거요?
아놔. 내가 작가를 하면서 이런 글을 쓰게 될 날이 오다니. 내 소개도 아니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생판 남을 위한 소설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난 피디님 옆자리를 한시도 떠나지 않았고 아드님의 이력을 샅샅이 내 손으로 기입했다. 그 와중에 난 여성들에게 어필이 될만한 아주 멋지게 나온 사진까지 셀렉 완료.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이 정도면 어제의 실수 아닌 실수가... 만회됐겠지' 사회생활은 진짜 힘들다. 실수가 아니잖아 그건.
- 역시 젊은 애들이 빨라
- 아니에요. 필요하신 거 있으면 또 말씀 주세요.
그리고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모든 책상에 '감'이 올려져 있었다. 다른 메인 피디님, 오늘 출근하지 않은 메인작가님, 다른 팀 서브작가, 조연출, 편집기사까지. 내 자리에만 '감'이 없었다. 나만! 나만!!! '감'뿐이었다. 고작 '감'뿐이었는데. 깎아 먹을 수도 없는 감인데.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왜 이런 취급까지 받으며 일해야 하나 자괴감에 빠져든 순간이었다. 선배들에게 전화해 '감 에피소드'를 전했다. 이게 말이 되는 거냐고. 내가 진짜. 가방 한 번 안 갖다 드렸다고 이런 멸시를 받아야 한다니. 그 후로 난 '감'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됐다. 감을 보면 그때 그 피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피디는 그야말로 뒤끝 작렬이었다.
어쩌다 보니 피디의 정년퇴임까지 하게 됐다. 피디는 자리를 빼면서 테이블에 남아있던 '잡동사니'를 인심 쓰듯 작가들에게 나눠줬다. '이거 진짜 좋은 안개 미스트야''이거 도토루 알지? 부드럽다. 피곤할 때 꼭 마셔' '감사합니다.' 부장이 떠난 후. 옆 팀에 있던 작가가 말했다. '대박. 언니 유통기한 봤어?'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창 지났다. 그 미스트를 쓰면 피부가 뒤집어질 것 같았고 그 도토루를 마시면 위장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