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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05. 2022

영화 이야기 <지금 만나러 갑니다>

1.


그때가 언제든, 가장 좋아하는 일본 영화를 세 편 꼽으라면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 설명하거나 해석하는 일은 비로 그림을 그리는 일과 같습니다. 아무리 형체를 잡으려고 해도 모양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단지 젖은 자리뿐입니다. 이 영화를 몇 번째 보는지 모르겠지만 단 한 번도 마른눈으로 엔딩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이 영화는 장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비는 하늘을 가리고 땅을 솟아나게 합니다. 먼 곳에 있는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고 발 밑에 있던 것들을 자라게 하지요. 좋아하는 마음도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아주 멀리 있는 상대를 쳐다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어쩔 줄 몰라하는 자신의 마음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니까요.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다케우치 유코라는 여배우 때문이겠습니다만 그 외에도 이 영화는 일반적인 멜로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아이가 등장한다는 건데요. 사실 멜로에 아이가 등장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다만 이때 아이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인 남녀의 이야기 전개를 위한 보조 장치에 한정됩니다. 하지만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바로 그 아이, 유우지의 시점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대개 영화의 시점은 하나의 시점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보통은 3인칭입니다만 종종 특정 인물의 눈과 말로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합니다.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처럼 한 영화에 3개의 시점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 경우 각각의 시점은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시점은 아주 독특한 것이, 전반적으로 3인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이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남자의 이야기로 연결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여자의 이야기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성이 불러오는 가장 큰 효과는 바로 관객으로 하여금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먼저 영화의 시작과 끝만 본다면 이 영화는 죽은 엄마로 인해 자책감에 힘들어하던 아이가 기적처럼 엄마와 재회했던 한 때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중간은 7살이지만 시작과 끝은 18세라는 점에서, 전체적인 구성으로 본다면 이 18세 소년의 한가운데에는 마법처럼 엄마와 다시 만났던 7살의 아이가 들어 있는 셈입니다. 이 소년은 비록 몸은 컸지만 마음은 아직 그때 그 유년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죠. 마지막 장면에서 아빠가 생일 선물로 엄마의 다이어리를 주는 장면은 이 아이가 이제 아이에서 어른으로 나아가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아침에 받은 케이크 역시 엄마가 예약해둔 마지막 생일 케이크였죠. 말하자면 엄마는 7살에 떠났지만 이 유우지라는 소년이 엄마와 작별하게 되는 것은 바로 18세 생일인 오늘인 것입니다.


유우지가 엄마와 만났던 나이가 7살이라는 점에서 엄마와 작별하는 날은 곧 자신의 한가운데 있는 7살 아이와 작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작별이라는 건 더 이상 떠올리지 않겠다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는 게 아니라 열려 있던 서랍을 닫아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랍이 열려 있다는 건 늘 신경을 쓰이게 만들고 가끔은 발이 걸려 넘어지게 하지요. 이제 서랍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닫음으로써 유우지는 필요할 때 그것을 꺼내어 볼 수 있는 어른이 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바로 엄마와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자라는 아이의 성장담이 되는 것이지요.


영화의 중간을 본다면 이것은 남자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 남자는 여자를 고등학생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좋아한다는 말은커녕 내색조차 하지 못했죠. 대개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결국은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반대로 좋아하면 거꾸로 멀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휩싸이기 쉽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 남자가 바로 여기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옆자리 미오를 좋아하지만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내색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좋아하는 마음이 강해질수록 미오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육상에만 전념하게 되지요. 저는 이런 심리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자는 이 달리기의 골인 지점에 미오를 세워두고 있는 것이라고요. 즉 자신이 힘껏 달리고 달려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그것이 미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서 좋아하는 여자로부터 관심을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심리입니다. 하지만 이 남자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남자는 이미 지역 대표선수입니다. 장점은 충분히 드러나 있습니다. 여기서 더 달리나 덜 달리나 남자가 달리기를 잘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끊임없이 달리기를 연습하는 것은 단순히 성적 때문이 아닙니다. 남자는 바로 자신의 삶을 달리기로 압축시켜 버린 것입니다.


말하자면 남자는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자신감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가장 잘하고 돋보이는 어떤 부분을 스스로의 전부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부분을 더욱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확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여러 가지 부분을 모두 차단시키고 오직 달리기에만 집중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축소시키게 됩니다. 즉 스스로를 확대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은 더 작아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말하자면 장점 뒤에 스스로를 숨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장점을 통해 자신을 어필하는 것과 장점만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를 숨기는 것의 차이는 명확합니다. 그건 전자의 경우 장점도 보여주는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장점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남자가 끊임없이 달리기만 연습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화를 하거나 혹은 다른 무언가를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오로지 달리기 하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지요. 즉 남자는 장점 뒤에 숨은 것입니다. 여자를 만나는 것은 장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달리기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남자는 여자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런 남자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경에 나오는 아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선악과를 먹은 후의 아담이지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낙원에서 쫓겨날까 봐 두려워하며 숨습니다. 남자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남자 측에서 먼저 이별통보를 했지만 사실상 그는 헤어진 게 아닙니다. 그는 단지 더 이상 숨을 곳이 사라지자 이별을 통보함으로써 스스로를 여자로부터 숨긴 것뿐입니다. 실제로 그의 마음속에서 그와 여자는 여전히 하나로 묶여 있지요. 즉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쳤으되 여전히 낙원에서 쫓겨나고 싶어 하지 않는 아담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남자에게 여자가 먼저 다가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측에서 먼저 다가온 것이지요. 그래서 남자에게 여자는 바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가지고 있는 남성 판타지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가지고 있는 남자에게 여자가 먼저 다가와 구원해준다는 것이죠. 이것은 단순히 관심 있는 여자가 의외로 먼저 관심을 보였다는 행운 정도가 아닙니다.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가진 남자는 여자와 함께 살 수 있는 낙원을 그리워하면서 영원히 숨을 곳을 찾는 도망자가 됩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여성에 대한 태도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을 대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가진 남자는 바로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같이 여자 측에서 먼저 다가와 하나가 되는 모습은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도망자의 삶이 끝나고 잃어버렸던 삶을 회복하는 것이 됩니다.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일반적인 남성 판타지와 구별되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이러한 여성에 의한 구원 서사를 다시 한번 뒤집기 때문입니다. 시간 순서상으로 보면 영화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여자가 죽은 이후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비의 계절에 다시 돌아온 여자는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때 여자의 나이는 바로 스무 살이었죠. 그리고 스무 살은 남자가 이별을 통보하고 숨어버린 해였습니다.


즉 남자가 만난 여자는 결혼 후 죽은 여자가 아니라 달리기를 하지 못하게 되자 떠나버린 스무 살의 여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만남은 여자와의 재회인 동시에 바로 도망쳤던 자기 자신과의 재회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남자가 여자에게 이야기해주는 과거는 모두 그때 남자가 하지 못했던 말들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와 다시 만나 내가 너를 좋아했었다고 말하는 과정은 여자의 손에 이뤄진 일방적인 구원을 다시 원복 시키고 도망쳤던 스스로와 조우하여 마침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끄러움에게 말을 거는 행위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여성에 의한 구원이 스스로에 의한 자기 구원으로 전복되는 것이지요.


단 한 번도 너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는 말은 그래서 자신을 구원해준 여자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는 스스로를 향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너와 나에게 하는 속죄인 셈이지요. 그리고 이 속죄의 의식이 끝나자 여자는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여성에 의한 구원이라는 것은 없으며 결국 부끄러움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여성에 의해 낙원에 머물 수 있었던 시간은 여성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스스로의 부끄러움에 맞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즉 스스로에 의한 구원은 비록 혼자 남아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다이어리를 선물하는 남자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끝에 여자의 독백을 통해 이 모든 이야기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닌 여자의 선택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여자의 이야기가 됩니다. 시간을 넘어서 기억을 잃은 채 미래를 다녀온 여자는 자신이 남자를 만나면 불과 10년도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자가 미래를 다녀왔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것이 미래라는 것을 알면서도 미래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궁금해합니다. 사주나 타로카드 등 역학 관련 아이템이 번성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요. 미래를 알려고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좋은 일이 있는지 기대하기 위해서이고 나쁜 일이 생기기 전에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 기대나 예방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대하는 것도 예방하는 것도 미래의 나가 아닌 지금의 나일 테니까요. 그리고 이 기대와 예방의 궁극적인 목적은 삶을 보다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멜로가 아닌 층위에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묻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미래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과연 더 나은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까. 두렵고 어려운 일을 피하고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는 방향으로만 가는 것이 과연 더 좋은 삶인가 라는 질문에 영화는 여자의 선택을 빌어 말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나뉘어 있는 것 아니라 어느 쪽을 쳐다보느냐의 문제라고. 여자는 보다 가까운 죽음이 아니라 남자와 아이를 낳고 함께 사는 삶을 쳐다봄으로써 자신의 삶을 정한 것입니다. 즉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정해진 것이지요.


이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선 미래에 일어날 수많은 일을 짐작하거나 맞춰볼 수는 있어도 그 일이 가지는 의미를 확인할 수는 없다는 것. 가령 똑같은 일이 일어나도 누군가에게 그것은 행복한 일인 반면 누군가에는 불행한 일이 될 테니까요.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의미이며 그 의미는 바로 자기 자신이 정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여자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경우에 의미를 정한다는 것은 곧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며, 이 의미는 미래에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결정했다는 점에서 결국 우리가 만나야 할 대상은 언젠가 올지도 모를 미래가 아닌 지금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지요. 즉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지금(을) 만나러 갑니다>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본 느낌에 대해서 쓰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분석적인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훈련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겠지만 나중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읽어도 그 영화의 느낌을 떠오르게 하는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영화를 보는 이유도, 그 영화에 대한 글을 읽어보고 싶은 이유도 다름 아닌 느낌 때문이니까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지만 그 사실을 모릅니다. 사적인 이야기지만 저도 지금 좋아하는 여자분이 있습니다. 물론 그분은 제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전혀 모르지요. 다만 언젠가 그분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누구를 좋아하고 있으면 상대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요. 저는 그분이 절 좋아한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그때 그분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그분도 날 좋아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비에 젖는 기분이 듭니다. 축축해진 겉옷은 모두 벗어버리고 알몸인 마음 하나 따뜻한 물속에 담그고 싶어 집니다. 그분의 다정한 말투와 웃는 얼굴, 초승달로 가늘어지는 눈가가 제 마음에 물기가 되어 어느새 마음도 눈도 젖어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느끼는 온기가 저만의 것이 아니길 마음속으로 바라봅니다. 참 이런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그분께 갈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하는데 말이죠. 실컷 자기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써놓고 또 도망치는 말로 마무리를 짓네요.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겠죠.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2022년 3월 19일부터 2022년 3월 19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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