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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06. 2022

영화 이야기 <스윗 프랑세즈>

1.


제목만 보면 어쩐지 매력적인 프랑스 여자를 의미하는 말 같지만 여기서 스윗은 Sweet이 아닌 Suite입니다. 저도 잘 몰라서 기사를 찾아보았는데 음악에서 Suite는 모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제목에 스윗이 붙어 있으면 모음곡이라는 뜻인 거지요. 그리고 프랑세즈는 춤곡을 말합니다. <스윗 프랑세즈>는 말하자면 <춤곡 모음>인 셈입니다.


춤이라는 건 몸의 움직임을 말합니다. 멈추고 움직이는 일련의 몸짓과 그 몸짓의 연계가 춤이지요. 따라서 춤이라는 것은 몸으로 보여주는 삶의 표정이기도 한 셈입니다. 신날 때는 환해지고 가라앉을 때는 어두워지지요.


실제로 현대무용이나 고전무용의 예술적 가치는 바로 움직임이 표정이 될 때 살아납니다. 몸짓이 단지 몸짓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승화될 때 그것은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진동이 됩니다. 그러니 춤곡 모음이라는 건 삶의 모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겠죠. 나아가 춤곡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동적인 것은 흔들리는 것을 말하고 흔들리는 것은 변화를 뜻합니다. 가령 전쟁처럼요.


그러니 <스윗 프랑세즈>라는 제목은 전쟁이라는 음악 소리가 날 때 사람들이 추는 여러 가지 유형의 몸짓들을 모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멜로 영화로 알려져 있고 그게 완전히 틀린 소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단지 멜로 영화라고만 이야기한다면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을 날려버리는 셈이 됩니다. 이 영화는 제 기준대로 호명하자면 멜로가 아니라 드라마입니다. 그것도 발자크 식으로요.


영화의 배경은 1940년대입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후 프랑스로 진격, 마지노 선을 우회하여 파리를 점령한 이후가 영화의 시작이 됩니다. 파리의 피난민들은 뷔시로 내려오고 그들을 따라 독일군도 함께 내려오지요. 그리고 뷔시는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의 새로운 수도가 되어 뷔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독일군과 섞여 살게 됩니다.


버리고 간 집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도 독일군의 숙소가 됩니다. 루실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시어머니와 살고 있는 루실의 집을 찾아온 것은 남편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독일군 장교입니다. 이름은 브루노라고 하지요.


루실은 시어머니의 눈도 있고 특히 전쟁 중인 군인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에 당연히 브루노와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밤마다 들려오는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떠난 후 유일한 위안이던 피아노는 아들 생각이 난다는 이유로 시어머니가 봉인해버렸죠. 하지만 군인이 되기 전 원래 작곡가였던 브루노는 밤마다 피아노를 치면서 새로운 곡을 씁니다. 그 소리는 악보와 루실의 마음에 새겨지기 시작하죠.


서사의 중심이 루실과 브루노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영화의 핵심 소재인 것도 분명하고요.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는 전쟁 중에도 피어나는 사랑이라든가 적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 같은 낭만주의를 지향한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사랑하는 법에 대해 말해주는 영화입니다.


독일군이 뷔시에 들어오면서 도시는 기묘한 활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젊은 여자 사이에서는 오랜만에 보는 남자에 성적 활력이 돌기 시작합니다.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어머니는 독일군을 증오하고요. 남편이 있는 여자를 탐내는 독일군도 있고, 남편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독일군을 사랑하게 된 여자도 있지요. 말하자면 독일군의 입성은 뷔시라는 도시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변화는 증오나 욕망 혹은 사랑이거나 혐오 등 매우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변화는 물론 그 자체로 동적인 것이지만 그것과 다르게 전쟁이 불러온 이 변화는 전쟁 그 자체의 성격을 닮습니다. 그건 바로 격정입니다. 격정이란 감정의 격렬한 움직임을 말합니다.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사랑으로 누군가에게는 증오로 나타납니다만 사실 보여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기존의 자기 자신을 뒤흔들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자신과 조우하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면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을 고발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만약 루실이 브루노와 시어머니 몰래 사랑을 이어나갔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불명확한 상황 속에서 과연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킬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기호가 아니라 신념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킬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은 존재하지요. 기호나 취향으로 만들어진 자기 자신은 허상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브루노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루실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루실 역시 브루노와 얼마든지 격렬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죠. 실제로 셀린느 같은 여자는 독일군과 연애를 하기도 합니다. 자신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하면서요. 하지만 브루노와 루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브루노는 자신의 사랑이 결코 욕망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루실은 스스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욕망을 참아내죠.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감정의 정제라는 것.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스스로의 욕망을 억제하고 그 가치를 지키는 것. 그럼으로써 시대나 상황에 휩쓸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온전히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브루노와 루실은 서로의 마음을 끝내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럼으로써 사랑이 욕망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고 그들의 사랑을 숭고한 것으로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죠.


격정은 사람을 흔들어서 사람이 원래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던 무언가를 아주 간단하게 깨버립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자기 자신이 무참히 조각난 것을 보고도 새로운 자기 자신에 다시 적응해가지요. 이 과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없고 흔들림에 무력한 인간의 마음만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만약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지켜야 할 것이 있고 참아내고 보호해야 할 것이 있었다면 격동에 흔들려도 그렇게 쉽게 부서지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영화 <스윗 프랑세즈>는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격동을 멈출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해 전쟁이 끝나지 않는 것이라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흔들리는 감정과 싸울 수 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옳은 길로 나아가고 그것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브루노가 루실에게 선물한 <스윗 프랑세즈>가 그렇지요. 브루노의 마음이 담긴 그 곡은 단지 곡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브루노가 보여준 스스로를 지켜내는 모습으로 인해 루실에게 영원한 사랑의 기억이 되는 것이니까요.


사랑이 가진 격정을 전쟁의 격정에 비유하고, 사랑의 격정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떻게 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작가 이렌 네미로프스키의 답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수용소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움에 대해 고민했던 치열한 흔적이기도 하지요. <스윗 프랑세즈>는 분명 사랑에 대한 영화입니다. 다만 아주 어려운 사랑에 대한 이야기지요. 많은 견딤 끝에 그 어려움에 닿기를. 그리하여 언제나 누군가에게로 나를 데려다주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022년 4월 17일부터 2022년 4월 22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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