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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08. 2022

영화 이야기 <킹메이커>

1.


전작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에서도 그랬거니와 이 감독의 색은 흐릿하지가 않네요. 색이 뚜렷하다는 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흐릿한 색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것처럼요. 단지 색이 뚜렷하다는 건 숨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중언하지 않고 부언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모호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해를 사기 쉽습니다. 그러나 모호한 것과 다른 것은 결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기란 할 말이 있다는 것. 변성현 감독은 분명히 자기 할 말이 있는 감독 같습니다.


영화 <킹메이커>는 서두에 실화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말처럼 실제 있었던 일을 소재로 삼고 상상의 인과관계를 구축한 영화입니다. 실제 있었던 일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이것은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상상의 인과관계란 그 역사에 빗대어 자기 할 말을 하겠다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이 영화에 대한 첫 번째 물음이 생깁니다. 그 할 말들은 왜 역사에 빗대어서 말해져야만 했는가. 다른 설정이 아니고 꼭 근대사를 가져와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실성입니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는 그 인과관계, 즉 플롯이 아무리 허구적인 것이라고 해도 사실성을 획득하기가 쉽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건 터무니없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를 보고 저게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저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당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사실성입니다.


사실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사실성의 획득은 반드시 현대를 기반으로 한 영화에서만 가능한 게 아닙니다. 저 먼 우주의 이름 모를 행성에서 일어나는 일도 사실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럼 사실성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바로 관객으로 하여금 이것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를 끌고 나가는 서사의 구조가 우리의 삶의 구조와 같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지요. 관객이 영화로 들어가는 입구, 즉 공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킹메이커>의 역사적 배경은 1960년대부터 시작합니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떠나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 독재를 시작했을 무렵이지요. 영화는 주인공을 야권의 인물로 설정했습니다. 즉 군부 독재라는 거대한 힘 앞에 도전하는 야인이라는 것이죠. 다윗과 골리앗부터 내려오는 이 설정은 신선하지는 않아도 언제나 피를 끓게 만드는 전율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실이라는 기반에 힘입어 사실성 즉 공감을 획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한 마디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무너뜨리는 일은 신화나 상상이 아니라 충분히 현실적인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이지요. 가령 터무니없는 설정을 보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영화니까. 그러나 이 영화가 가져온 소재 앞에서는 그런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재는 모두 사실이니까요. 김대중이라는 한 정치인이 목포에서 이긴 것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것도 그리고 연이은 고배 끝에 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것도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엮고 있는 구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역시 사실성을 얻는 것이죠. 많이 돌아서 왔습니다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거대한 벽을 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


이 한 마디를 위해 영화는 역사를 빌려왔습니다. 하지만 단지 이 말만을 위해서라면 영화보다 역사가 하는 말이 더 커져 버립니다. 영화는 무슨 소재를 쓰더라도 그 소재에 빚을 져서는 안 됩니다. <킹메이커>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역사를 빌려온 것은 바로 진짜 할 말을 하기 위해서지요. 그것은 영화 속 대사를 빌어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 이기는지가 아니고 왜 이겨야 하는지가 중요한 법이요.


역사는 이미 누가 이겼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러니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은 누가 이겼는가가 아닙니다. 영화는 이미 이긴 싸움을 복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대사에서와 같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HOW인가 아니면 WHY인가 라는 물음을 던지기 위해서지요. 번복합니다만 영화 <킹메이커>는 이미 이긴 싸움을 역사에서 빌려와서 거대한 적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했습니다. 그러니 영화가 묻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진정으로 이기기 어려운 상대와 싸울 때 중요한 것은 방법인가 아니면 명분인가. 명분이 있다면 어떤 방법을 써도 좋은 것인가 아니면 방법에 의해 명분은 흐려져 버리는가. 싸움이라는 구조에서 늘 만나게 되는 니체의 말 ‘괴물과 싸울 때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여기서도 피할 길이 없습니다.


2.


이 영화의 두 주인공, 김운범과 서창대는 그 성격상 상반된 인물로 보입니다. 김운범은 대의와 명분을 중요시하는 반면 서창대는 일단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고 봐야 한다는 주의지요. 실제로 영화는 이 둘은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로 분리해놓고 있습니다. 김운범은 빛 그리고 서창대는 그림자로요. 이런 구도에서 보면 <킹메이커>는 서로 상반된 성격을 지닌 두 인물의 협력과 적대를 통해 긴장을 만들어낸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단 현실이든 영화든 단일한 캐릭터라는 것은 외려 공상적인 것입니다. 하나의 성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가 있는 것이고 일관성이라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가운데 지킬 것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운범이 빛이고 서창대가 그림자라는 구도는 설령 그것이 영화 속 지문으로 등장하는 것이라고 해도 두 인물을 너무나 평면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김운범의 경우 분명 대의와 명분을 중요시하는 인물이며, 정치를 시작한 이유 역시 그의 말대로라면 엄한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서 핍박받지 않는 세상, 자기 목소리 내는 데 겁먹지 않고 국가한테 희생을 강요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영화 속 소개대로라면 그야말로 이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 빛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사용한 것은 바로 서창대라는 그림자입니다. 서창대가 사용한 것이 술수나 협잡 혹은 속임수 및 마타도어라면 그것을 승인하고 용인한 것은 바로 김운범이지요. 만약 알고도 모르는 체했다면 그건 더 우스운 일입니다. 김운범이 빛이라면 그 속에는 그늘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서창대는 분명 이기기 위해서라면 부모 위패도 팔아먹을 수 있는 인물로 나옵니다. 사용하는 책략을 보면 정말 머리가 좋구나 하는 감탄과 동시에 어쩐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불쾌감도 듭니다. 그건 단지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극단적인 목적주의가 싫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점점 그에게 설득당하면서 그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한 인간적인 가치들이 훼손되는 느낌이 불편해서겠지요. 말하자면 이기지 못하면 아무 대의도 소용없다고 말하는 그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가 정말 이기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긴다는 것은 목적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그의 목적이 세속적인 것이어서, 많은 돈과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뿐이었다면 그를 두고 악인이라고 말해도 딱히 불편할 건 없었겠죠.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막대한 부와 지위를 보장해주는 현 정권의 요청을 3초 만에 거절해 버립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마음속에 대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은 김운범이 상징하는 그 빛, 그 빛의 실현을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그림자 속에는 빛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김운범과 서창대는 둘 다 단일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빛과 그림자가 반복되면 나타나는 것은 어지러움입니다. 이 어지러움은 당연히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기인한 것이겠으나 문제는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역시 그 혼란과 무관한 곳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김운범이든 서창대든 이들은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선택을 하도록 강요당하게 마련이지요. 김운범이 서창대의 방식을 승인한 것이 그렇고, 서창대가 결국 현 정권의 편에 붙게 된 것이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결국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함께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 흔들리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사람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김운범이 빛으로, 서창대가 그림자로 표상되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이 그들이 속성이 아니라 바로 빛과 그림자가 오가는 어지러움 속에서 출구를 어디에서 찾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빛과 그림자는 존재의 여부가 아니라 선택의 여부라는 것입니다.


김운범은 서창대라는 인물을 쓰면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선거 때 쇼를 제안한 서창대의 의견을 단 칼에 묵살한 것은 바로 그가 무엇을 위해 이 싸움을 하는지 그 싸움의 이유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선 길에서 혼란한 세상에 발맞춰 함께 어지러워지면서도 끝내 초심을 버리지 않은 것이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빛으로 남은 것입니다.


반대로 서창대는 김운범의 대의에 공감하고 그랬기 때문에 김운범을 이기게 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그 수단과 방법에 먹혀버린 인물입니다. 앞서 언급한 니체의 말처럼 그는 괴물과 싸우기 위해서 괴물이 되어버린 자인 것이죠. 이기기 위한 술수 때문에 주위로부터 욕을 먹으면서도, 현 정권으로부터 그림자라는 말을 들으며 포섭당할 때도 그는 아직 그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림자가 된 것은 바로 마음속에 있는 대의를 지키는 대신 자신의 이용가치를 부각하기 위해 스스로를 수단으로 바꿔버린 순간입니다. 현 정권을 승리시킨 대가로 돈가방을 받고 길거리로 나온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수많은 그림자들에 섞여버리죠. 지켜야 할 것을 버리고 얻은 승리는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그림자의 승리라는 것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킹메이커>는 결국 선택에 관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라는 것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와중에도 자신을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무언가를 지켜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이기지 못한 김운범은 신념을 지킴으로써 끝내 이겼고, 그때 이겼던 서창대는 신념을 버림으로써 끝내 잊혀졌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문장, 서창대는 그곳에 없었다 라는 말은 그래서 신념을 버린 자의 패배를 말하는 동시에 그림자로 오인받았으되 사실은 그림자가 아니었던 자가 최후의 선택에서 실패함으로써 결국 역사의 그림자로 남게 된 쓸쓸한 비감으로도 읽히는 것입니다.


최근에 본 <스윗 프랑세즈>도 그렇고 <킹메이커>도 그렇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수록 볼수록 새롭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 자기 자신은 내부의 확신을 위해 두려운 걸음을 걸어 나가는 신념의 일기라기보다는 그저 무작위로 쏟아지는 수많은 기호의 취사선택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떡볶이는 밀떡이어야 해라는 것은 기호의 선택이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죠. 바뀔 테고, 바뀌지 않더라도 굳이 지킬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요.


<킹메이커>는 서로 다른 듯 닮은 듯한 두 사람이 최종에서 빛과 그림자로 갈라지는 순간을 보여주며 캐릭터라는 것은 속성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영화에서 만의 일이 아니겠지요. 저는 만화나 영화 혹은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지켜야 할 것’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요. 과연 저는 제 안에 지켜야 할 것들을 잘 지키고 있는지 새삼 감시하게 됩니다.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걷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도 방향을 잃어서는 안 되겠지요. 누군가 용기의 반대말은 겁이 아니라 순응이라고 했던 게 기억납니다. 언제나 겁먹은 자기 방향으로 갈 수 있기를. 그렇게 기원합니다.



                                                                                     2022년 4월 30일부터 2022년 5월 1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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