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May 18. 2022

영화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영화의 주제는 영화를 보는 사람의 수만큼 다릅니다. 그래서 좋은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서로 이야기를 하게 만듭니다. 좋은 영화는 이야기하기를 넘어 대화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너무나 할 말이 선명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싶어도 자꾸 그 말이 걸리게 됩니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도 그렇습니다. 입시 문제나 카르텔을 지적하고 있지만 영화가 진정으로 하려는 말은 바로 ‘소외된 자들의 연대’입니다.


영화 속에 ‘사배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사회적 배려 대상자’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배려 대상자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배려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이들은 그저 사회적 약자입니다. 이 약자들은 학교의 필요에 의해 필요해지고 학교의 불필요에 의해 불필요해집니다. 약자와 강자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약자는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한지우(김동휘 분)가 처한 상황도 그렇습니다. 갈등의 정점을 찍는 수학 문제 유출 사건에서 한지우는 전산실에 들어갔었다는 이유만으로 범인으로 지목됩니다. 선생님은 전학을 권유합니다. 죄를 덮어 씌우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게 꼭 한지우여야 하는 이유는 그가 전산실에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라 사배자이기 때문입니다.


이학성(최민식 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만 가설을 증명한 세계적인 수학자로 나오지만 북한에서 그의 연구는 모두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아무 권한도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북을 탈출한 이학성은 남한에서 연구에 매진하지만 그 결과 아들을 잃고 맙니다.


두 사람은 얼핏 필요에 의해 만난 것처럼 보입니다. 한지우는 누구보다 수학 성적의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었고 이학성은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이학성이 한지우에게 수학을 가르쳐주는 대신 한지우는 이학성의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는 일종의 거래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연대가 가능했던 것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둘 다 같은 것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감입니다.


한지우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수학이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좋은 대학에 가고 많은 월급을 주는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한지우는 잘못된 답을 설명하는 선생님의 풀이에 항의해서는 안 됐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결국 이 사회의 답이라는 것은 출제자의 의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한지우가 출제자에게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수학 실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지우는 이학성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언제나 혼자였던 이 학교에서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없이 홀가분할 때 싸우는 게 아닙니다. 지킬 것이 생겼을 때 비로소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라는 것은 말하자면 벼랑 위에서 잡고 있는 손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놓아버리면 상대는 벼랑 밑으로 떨어집니다. 따라서 상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나 자신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거꾸로 읽으면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다면 지켜주고 싶은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영화 초반에 한지우가 반 친구들의 잘못을 뒤집어쓰는 것은 소외의 공포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배자라는 이름으로 혼자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은 마음의 발로이기도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지우가 무엇보다도 원했던 것은 수학 성적의 상승이 아니라 유대입니다. 사실 수학 성적의 상승도 그렇습니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그들'과의 유대를 만들기 위해서이지요. 다만 한지우는 좋은 대학을 다니는 이들과의 유대나 좋은 직장을 다니는 이들과의 유대가 아닌 탈북한 경비원과의 유대를 통해 유대에는 계급이 없음을 덤으로 알게 됩니다. 어떠 위치에 올라가도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인 것과 마찬가지로요.


사람은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사람과 연대하는 게 아니라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연대한다는 것. 이 말은 동질감에 대한 말이기도 합니다. 같은 것을 원할 때 나와 너는 수많은 오류를 뛰어넘어 비로소 서로를 마주 보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원했던 것은 결국 너였으며 나아가 너의 눈 속에 비친 나였음을. 결국 언제나 원했던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자각이었음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언제나 나와 다른 것만을 선망하게 만드는 이상한 나라에서 비록 허수에 허수를 거듭하더라도 끝내는 나라는 상수에 닿기를.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2022년 5월 7일부터 2022년 5월 8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킹메이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