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May 29. 2022

영화 이야기 <오만과 편견>


외모는 언니보다 못하고 지는 것을 싫어하며 잘못된 일은 꼭 한 마디를 해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 가진 이라고는 단지 자기 자신 뿐인 아가씨와 빼어난 외모에 넉넉한 재산까지 갖춘, 냉정한 성격이지만 자기 여자에게는 순정파인 상류층 남성. 적고 나니 한때 소설과 드라마의 소재를 점령했던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들 같습니다. 얼핏 떠오르는 작품만 <꽃보다 남자>, <상속자들>, <파리의 연인> 등이 있군요. 현실적인 인과관계없이 상류층 남성에 의해 우연히 일어나는 여성의 계층 이동을 그린 서사를 흔히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신데렐라 이야기’라는 말에는 분명 얼마간의 조롱이 있습니다. 그건 대개 본인의 어떤 변화나 노력 없이 행운이 찾아오기만을 바라는 허영심에 대한 조롱이지요.


말하자면 주제 파악을 하라는 겁니다. 허나 누군가는 통쾌할지 모르지만 이 조롱에는 잔인한 면이 있습니다.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무엇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신데렐라입니다. 바로 가난하고 헐벗고 가진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 뿐인 여자. 이런 여자가 있는 곳은 허영심의 세상이 아니라 교육과 취업 그리고 경제 참여의 기회가 여성에게 보장되지 않은 사회입니다. 말하자면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신데렐라는 태어납니다. <오만과 편견>이 신데렐라 이야기의 시초처럼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명랑한 아가씨들의 로맨스처럼 보여도 엄연히 이 이야기는 여자들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는 잔인한 현실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오직 남성만이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말은 여성에게 있어 결혼이 곧 생존이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여자는 살아남기 위해 결혼을 해야 합니다. 영화 초반부에 베넷 가의 안주인이 그토록 열성적으로 딸들을 시집보내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딸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얼마만큼의 재산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여성의 삶이 결정되므로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는 기준은 경제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속물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선택입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남성이 경제권을 독점하고 있고 여성은 생존을 위해 결혼을 해야만 하는 세상이라면 대체 사랑이라는 건 왜 중요한 것일까요. 영화 초반에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에게 묻습니다. “사랑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제인과 엘리자베스는 무도회를 다녀온 날 밤 이렇게 소곤거립니다. “재산이 결혼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돼.”, “진정한 사랑 없이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야.” 이런 말을 보면 마치 재산보다 사랑이 결혼의 중요한 조건인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을 경시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가령 여성이 스스로 경제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라면 굳이 남성에게 경제력을 의존할 필요가 없으니까 결혼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조건으로 사랑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영화의 배경은 19세기이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아무런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던 시대입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없이는 결혼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여성의 수가 남성의 수보다 적은 경우입니다. 이 경우 일대일 대응을 가정하면 결혼하지 못하는 남성이 발생합니다. 즉 한 여성에게 둘 이상의 경쟁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여성은 결혼하지 못해서 생존에 실패할 확률이 매우 낮아집니다. 개중에는 외모라든가 혹은 다른 매력적인 요인으로 여러 명의 경쟁자를 확보한 여성도 있겠죠. 사랑이 결혼의 우선 조건으로 꼽혀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실제로 동명의 원작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 말은 재산이 있는 남성에게 결혼은 일종의 의무와도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 혼자 살 생각을 하는 남자들이 많다면 여자는 사랑을 결혼의 조건으로 삼을 경우 결혼이냐 죽음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됩니다. 이런 경우라면 아무래도 사랑이 결혼을 선택하는 우선 조건이 되기는 어렵겠지요.


결혼을 하려는 남자들이 많을 때 여자는 비로소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생존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제인은 재산이 결혼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재산은 양적 개념이지 존재 여부가 아닙니다. 재산이 얼마나 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지 재산이 없어도 된다는 건 아니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 재산은 선택 조건이 아니라 필수 조건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선택 조건이지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사랑이 결혼의 우선 조건이 되는 것은 바로 그 결혼의 성사 여부를 여성이 선택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모든 결혼은 남성의 요청 다음에 여성이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성립됩니다. 만약 남성이 결혼을 선택하는 경우라면 어떨까요. 경제권도 선택권도 모두 남성에게 있다면 아마 그 사회에서 여성은 사람이 아니라 남성의 부속물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격하되겠지요. 경제권이 남성에게 있으니 남성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데 거기에 남성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마저 없다면 남성은 여성을 존중할 어떤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겁니다.


따라서 사랑은 겉으로는 낭만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재산의 정도로만 선택한다면 그건 사실상 여성의 선택이 아니라 남성이 선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성들은 경쟁자들 중에서 누가 재산이 더 많은가를 입증하기만 하면 여자 쪽에는 사실 아무런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셈이니까요. 그리고 남성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여성을 선택하는, 다시 말해 여성을 동의를 구해야 하는 존재가 아닌 선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것을 두고 영화의 제목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만’이라고요.


엘리자베스가 콜린스나 다아시의 첫 번째 프러포즈를 거절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오만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콜린스의 경우 베넷 가문의 상속자이며, 다아시는 상류층 남성이지요. 엘리자베스의 입장에서 보면 콜린스의 프러포즈는 가문의 재산을 볼모로 한 인질극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다아시의 경우는 더 모욕적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언니의 결혼을 망쳐놓고도 자신에게 구혼할 수 있는 동기는 바로 자신을 재산이 있으면 가질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으니까요.


이런 연유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히 낭만적이고 추상적인 미적 지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을 선택당하는 대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치환하는 사회적 요건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정치적인 것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것입니다. 경제권을 박탈당한 여성은 사실상 아무런 사회적 지위가 없는 대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결혼의 조건으로 재산이 아닌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여자들은 스스로를 재산만 있으면 가질 수 있는 대상에서 남성과 대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존재로 끌어올리는 것이죠. 물론 사랑의 그 달콤 씁쓸한 감정은 덤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오만과 편견>이 꼭 로맨스를 빙자한 여성 인권 서사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재산만 있으면 여성을 선택할 수 있다는 남성의 오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남성을 사람이 아닌 재산으로 보는 여성의 ‘편견’도 들어가 있으니까요. 앞서 인용한 원작 소설의 다음 구절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위 구절에 따르면 여자 입장에서 남성은 ‘감정이나 생각을 알 필요가 없는 재산’인 셈입니다. 이것은 재산을 배경으로 여성을 살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남성의 오만과 마찬가지로 특정 성별이 경제권을 독점한 사회적 구조로 인해 발생하는 편견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영화 <오만과 편견>은 사랑이라는 가치를 통해 이런 오만과 편견을 관통해 남성과 여성이 대등한 자리에서 만나는 자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사랑은 마치 어떤 사회적 모순도 관통하는 창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히려 그것이 관통해야 하는 대상만큼이나 정치적인 것이지요.


사랑은 남녀 사이에 발생하는 에로스로 한정지었을 때 지극히 자연 발생적인 감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원초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정치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에서처럼 그것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될 때 여기서 사랑은 원초적인 사랑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오만과 편견>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순수한 에로스는 없다는 것. 하지만 그게 나쁠 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2022년 5월 8일부터 2022년 5월 18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