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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by 다시

코인세탁소를 운영하는 중년여성 에블린은 위기다. 국세청에서 탈세로 가산을 압류하겠다고 나섰고 하나뿐인 딸은 동성애자인데다 미국에 처음 온 할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커밍아웃하겠다고 난리다. 남편은 쭈뼛거리면서 이혼신청서를 내민다. 이 정도면 고객이 찾으러 온 세탁물을 못찾거나 기계가 잔돈을 제대로 거슬러주지 않았다는 컴플레인 정도는 애교다. 여기까지가 현실의 문제이고 추가로 비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세금 신고를 위해 국세청을 방문한 에블린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갑자기 안경을 벗고 목소리가 중후해진 남편 웨이먼드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이 세상에는 여기와 다른 수많은 우주가 있고 그 모든 우주를 동시에 살아가는 악당 조부 투파키가 바로 에블린을 잡으러 오고 있다는 것이다. 에블린은 비웃지만 곧 웃을 수 없게 된다.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이 세상은 하나의 우주가 아닌 다중우주이며 각각의 우주에는 각각의 우리가 존재한다. 가령 이곳의 에블린이 코인세탁소 사장이라면 다른 우주의 에블린은 유명 영화배우이고 또 다른 우주의 에블린은 피자가게 점원인 식이다. 다중우주를 발견하고 다른 우주에 있는 자기 자신과 일시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사람들을 ‘알파’라고 부르는데, 에블린에게 다중우주를 설명해 준 웨이먼드가 바로 알파 웨이먼드다.


알파 웨이먼드가 있다면 알파 에블린도 있다. 알파 에블린은 다른 우주에 있는 자기 자신과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인물이지만 동시에 조부 투파키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다른 우주에 있는 자신과 접속하면 뇌에 부하가 걸리는데 이 부하를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자신의 딸인 조이에게 실험하다가 조이의 정신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로 인해 조이는 일시적으로 다른 우주의 자신과 접속하는 게 아니라 영구적으로 모든 우주의 자신과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한 사람 안에 무한한 인격이 들어가게 됨으로써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결국 모든 것의 끝은 절대적인 공허밖에 없다는 혼돈과 허무의 괴물이 되고만 것이다. 적당히 조절했다면 유능한 알파가 되었을 것을. 자식이 잘하면 어디까지 잘하는 지 확인해보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아마 어느 우주에서나 비슷한 모양이다.


조부 투파키는 알파 에블린을 죽였고 다른 우주를 찾아다니면서 수많은 에블린을 살해하고 있는 중이다. 에블린만이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부 투파키의 공포는 곧 알파의 희망이라서 알파 웨이먼드가 이곳으로 온 이유도 에블린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곳의 에블린이 다른 우주의 에블린에 비해 뭔가 특출나거나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웨이먼드의 표현에 의하면 이곳의 에블린은 더 좋은 가능성과 선택을 거절하고 실망만 남은 인물이다. 전 우주의 에블린 순위를 매기면 거의 꼴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가 가진 모든 가능성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조부 투파키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모든 가능성과 선택의 결과를 보고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상대와 달리 에블린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거절과 실망이 만든, 이젠 어쩔 수가 없게 되어버린 이 삶뿐이다.


그러나 만약 더 좋은 삶을 살고 있었다면 상황이 나아졌을까. 지금보다 몇 가지가 더 낫다고 해도, 가령 세탁소가 아니라 마트를 운영하고 있었다거나 딸이 이성애자이고 문신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차피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조부 투파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에블린이 일부의 최선을 고를 때 조부 투파키는 모든 것을 최선으로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부 투파키가 허무와 혼돈의 상징, 즉 결국 모든 것은 끝난다는 냉소주의의 화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허무 앞에서는 끝내 무력할 뿐이라는 말로도 읽힌다. 예를 들어 에블린이 본 자신의 다른 삶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결혼하지 않고 쿵푸를 배워 배우로 성공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 에블린을 이 우주로 불러오는데 성공해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반대로 자기가 그 우주로 넘어가도 잡고 싶던 행복을 잡을 수는 없었다.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더 나은 결과를 얻게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All Or Nothing이라고 하지만 사실 All과 Nothing은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모든 가능성과 선택권을 손에 넣은 후에 조부 투파키가 내린 결론은 허무였으니까. 그러나 거절과 실망으로 만들어진 에블린의 삶은 반대로 항상 불우했던 것만은 아니다.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미국에 와서 세탁소를 개업했을 때, 딸을 낳았을 때 카메라가 보여주는 에블린의 얼굴은 찬란히 빛난다. 배우가 된 에블린에게 쏟아지고 있던 것이 캄캄한 밤의 스포트라이트였다면 삶의 소중한 순간마다 에블린의 얼굴에 쏟아지고 있던 것은 한낮의 햇볕이었다. 물론 좋았던 순간만 있던 것은 아니다. 남편을 선택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의절해야 했고 세탁소를 운영했기 때문에 잠시도 쉬지 못하고 바쁘게 살아야 했다. 사랑스러운 딸은 문신을 한 동성애자가 됐다. 빛났던 순간과 어두웠던 순간이 모두 섞여서 에블린의 삶은 All도 아니고 Nothing도 아닌 Everything이다. 가장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에블린이 모든 것을 가진 조부 투파키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조부 투파키가 가진 것은 모두 빛나는 것이지만 에블린은 어둠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빛나는 것보다 어두운 것이 더 많기 때문에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가 갖지 못한 단 한 가지 기술을 배운다. 바로 어두운 삶을 끌어안을 줄 아는 다정함이다.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웨이 백>에서 스미스는 야누즈에게 말한다. 네게는 쓸모있는 약점이 있다고. 그게 뭐냐고 묻자. 스미스는 말한다. “친절.” 스미스는 탈출 도중 자기가 쓰러지면 버리지 않고 데려갈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말대로 고비사막에서 스미스가 쓰러지고 두고 가라고 해도 야누즈는 포기하지 않고 그를 데려간다. 그러나 이것은 야누즈가 단순히 정에 약한 인간이라서, 스미스의 말처럼 약점을 가진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야누즈가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거짓증언한 아내를 용서하기 위해서인데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아내를 죄책감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즉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야누즈는 알고 있는 것이다. 친절과 다정함은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약점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삶을 붙드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냉소는 삶의 의지를 불어넣지 못하지만 다정함은 살고 싶은 마음이 꺼지지 않게 만드는 장작과도 같기 때문이다.


같은 이야기를 이 영화에도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가진 조부 투파키가 허무주의에 빠진 이유는 가장 좋은 것으로만 삶을 채운다고 해도 그 삶이 반드시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동시에 괴상하기 짝이 없는 조부 투파키의 외면은 바로 좋은 것들로만 채운 삶의 단면과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을 포용할 줄 아는 다정함인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인생의 좋은 일과 나쁜 일의 비율은 다르지만 확실한 건 인생을 좋은 일로만 채우려고 할 때 삶이 그만큼 납작해진다는 사실이다. 다중우주가 실제로 존재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개념이 우리가 살지 못한 삶에 대한 아쉬움에 기인한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말하자면 현실의 삶이 납작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다중우주라는 광대한 공간을 상상함으로써 삶을 다시 풍부하게 상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상상한다고 해도 그게 현실의 나쁜 일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한 방편이라면 현실의 삶은 쪼그라든다. 삶을 원래대로 되돌려놓기 위해 필요한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다정함이라고 이 영화는 말한다.


예전에 법정 스님은 한 인터뷰에서 최고의 종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친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종교가 삶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결국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 것은 타인과 스스로에 대한 친절, 즉 다정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정해지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만 할까. 영화 속에서 다른 우주에 있는 자신과 접속하는 방법을 일러 ‘버스 점프’라고 하는데 이 버스 점프는 신발을 거꾸로 신거나 남이 씹던 껌을 다시 씹는 등 이색적이고 낯선 수법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이건 아마도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라도 다른 우주에서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타인이다. 타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일은 다정함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영화가 말하는 다정해지는 일이란 이런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고 믿는 것.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손가락이 핫도그인 인간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자에게 죽은 아내가 쓰던 향수를 뿌려주는 것. 엉덩이를 맞으면 쾌락을 느끼는 남자는 엉덩이를 때려주고 여자를 만나고 싶어하는 여자는 여자를 만나게 해주는 것. 비록 새로운 것이 밝혀지면 기존에 알고 있던 모든 게 하찮아진다고 해도 이곳에 있겠다고 결정하는 것. 이곳에 있기 위한 이유를 만드는 것. 그 이유가 비록 한줌의 시간밖에 견디지 못한다면 그 한줌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겠다고 다짐하는 것. 우리가 계속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래서 소중한 것이 있는 사람이 부럽다. 좋은 것이 아니라 정말 소중한 것을 가진 사람이 부럽다. 사랑의 가치가 퇴색되는 시대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사랑을 찾는 이유는 아마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직역하면 ‘모든 것 모든 곳 함께’ 라는 뜻이다. 비어있는 주체의 자리에 들어갈 것은 아마도 ‘당신’일 것이다. 비록 이 생이 고되고 힘들 지라도 나와 함께 있어주는 당신이 있다면 이 생은 살아갈 만한 곳이 된다. 당신과 함께 모든 곳에 가서 모든 것을 누릴 때 삶은 비로소 감동적인 투쟁이 되지 않을까. 싸우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유가 필요하다. 누구나 살아가기 위해 각자의 싸움을 한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2025년 1월 21일부터 2025년 1월 2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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