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에 대해 말하는 영화 중에 독일을 비판하지 않는 영화를 찾기는 어렵다. 나치라는 단어는 그래서 조심스럽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후자는 상황이 개선될 여지를 없애버린다. 그래서 <랜드 오브 마인> 같은 영화는 귀하다. 포로로 잡힌 독일 소년병을 지뢰 제거에 사용했다는 이 이야기는 얼핏 잘못을 저지른 건 나치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치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까지 전쟁에 동원한 잔인함. 이것이야말로 21세기가 되어서도 나치가 끊임없이 소환되는 이유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덴마크가 해방되자 독일이 해안가에 매립한 지뢰를 제거하는데 독일 소년병 포로를 이용한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덴마크 장교는 소년병을 지뢰 제거에 이용하고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등 가해자로 나오고 반대로 독일 소년병은 학대를 당하거나 지뢰가 터지는 바람에 죽는 등 피해자로 나온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전을 통해서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양비론이 아니다. 적이라고 생각하면 인간의 자격을 얼마든지 박탈할 수 있는 잔인함이야말로 영화의 진짜 표적이다.
흔히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인간애를 떠올리기 쉽지만 원래 서양 휴머니즘에서 인간은 전인류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황종연 평론가의 <탕아를 위한 국문학>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휴머니즘은 통속적인 생각에서처럼 모든 인간에 대한 차별없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로마의 문화적 유산에서 발원하는 인간성에 대한 옹호와 그 인간성의 보편화를 위한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내용에 따르면 휴머니즘에서 인간이란 그리스-로마의 문화적 유산을 함양한, 소위 말하는 교양이라는 것을 갖춘 인간만을 가리키는 용어다. 바꿔말하면 그리스-로마의 문화적 유산을 갖지 못한 인간은 계몽의 대상이거나 아예 인간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로마의 문화적 유산의 정체가 아니라 인간에게는 자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발상이다. 바로 이 발상으로 인해 독일은 아리안족이 아닌 인간을 열등하다고 생각했으며 유대인을 학살할 수 있었다. 덴마크의 장교가 포로가 된 소년병을 지뢰 제거라는 위험천만한 작업에 강제동원할 수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은 소년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단지 덴마크를 침공한 나치일 뿐이다.
영화는 초반에 기울어진 인식의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 나치는 전범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관객은 칼 상사가 저항하지 않는 포로를 무자비하게 구타해도 심지어 소년병에게 지뢰 제거를 시킬 거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게 그렇게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덴마크 해안에 지뢰를 설치한 건 다름아닌 독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년병의 시점으로 카메라를 옮겨서 그들이 지뢰를 해체할 때의 긴장과 불안을 고스란히 체험하게 되면 비로소 관객은 이들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영화는 일부 소년병의 해체 작업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소년병의 해체 작업을 보여주는데 그 작업이 끝날 때쯤이면 관객의 머릿속에서 덴마크(피해자)-독일(가해자)라는 겉옷은 벗겨지고 학대하는 자와 학대당하는 자의 알몸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영화가 가장 먼저하는 일이란 다름 아닌 관객에게서 나치는 인간이 아니라는, 이른바 인간의 자격이라는 프레임을 벗겨내는 일이다. 나치가 악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인간의 자격을 정하고 자격이 없는 자들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치라는 이유로 소년병을 지뢰 제거에 몰아넣은 덴마크 역시 인간의 자격이라는 프레임을 갖고 있던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자격이라는 것은 왜 이다지도 협소한가. 우리는 왜 더 많은 인간을 인간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여보낼 수가 없는 것일까.
칼 상사는 덴마크 국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저항하지 않는 독일 포로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말리는 사람까지 때릴 만큼 독일에 깊은 적의를 품은 사람이다. 지뢰 제거 임무를 맡고 소년병을 감독하게 되었을 때도 그는 소년병들이 아프거나 굶주림에 시달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배가 고파 쥐똥을 훔쳐먹었다가 배탈이 난 소년병들을 비웃는 농장 여자를 보면서 처음으로 묻는다. “뭐가 그렇게 웃기죠?”
민간인이 군인을 비웃어서가 아니다. 칼 상사는 농장 여자의 얼굴에서 고통받는 자를 조롱하는 인간의 혐오스러운 표정을 보았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다. 그가 나치에게 그토록 적의를 품었던 것은 바로 나치가 고통받는 자를 조롱하고 학살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표정을 동족에게서 발견할 때 나치와 덴마크라는 이분법은 부서지고 그 자리에 남는 건 고통받는 자와 조롱하는 자의 얼굴뿐이다. 칼 상사가 고통받는 소년병의 얼굴에서 독일군이 아닌 아이의 얼굴을 발견한 것도 이때였다. 지뢰가 터져서 빌헬름의 두 팔이 날아갔을 때도 태연했던 칼 상사는 다음 날 처음으로 빌헬름을 찾아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배급 외에 음식을 가지고 돌아와 소년병에게 나눠준 것은 빌헬름에 대한 조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후 칼 상사는 밤중에 숙소의 문을 잠그지 않거나 휴일을 만들어 운동경기를 하는 등 소년병들의 편의를 봐준다. 이러한 장면은 일시적으로 칼 상사가 더 이상 소년병을 지뢰 제거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마치 아이들을 돌보는 아버지가 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소년병들이 더 이상 지뢰를 해체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는 마치 칼 상사가 아이들을 이용해 지뢰를 찾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하지만 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수행하는 입장이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지뢰를 모두 제거했다고 보고받은 해변에서 기르던 개가 지뢰를 밟고 죽자 칼 상사는 남은 지뢰 여부를 몸으로 확인하라며 소년병들로 하여금 지뢰밭 한가운데를 걷게 만든다. 아이들을 다시 나치로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장면은 인상 깊다. 인간의 자격이 왜 이다지도 협소한지 알려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칼 상사가 소년병들에게 지뢰밭 한가운데를 걷게 한 이유는 기르던 개가 죽었기 때문이다. 개가 아무리 중요해도 인간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게 나의 개라면 어떤 인간보다는 중요해진다. 가족이 없거나 혹은 잃은 것으로 추정되는 칼 상사에게 개는 가족이나 다름없었을 것이고, 소년병들이 지뢰를 제대로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가 죽었다는 생각은 곧 소년병들이 개를 죽였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 순간 소년병들은 국가에 동원된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해친 진짜 나치가 된다. 그들이 아이가 아니라 나치이기 때문에 지뢰밭 한가운데를 걸으라고 칼 상사는 명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자격이라는 것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권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천부인권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소년병이 아이인지 나치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칼 상사다. 개가 죽은 것은 안됐지만 만약 인간의 자격이 타고난 권리여서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면 칼 상사는 소년병들에게 지뢰밭 한가운데를 걷게 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인간의 자격이란 모두의 자격이 아니라 힘을 가진 누군가가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부여하는 권리다. 왜 인간의 자격이란 이토록 협소한가. 바로 모두가 가져야 할 권리를 특정한 누군가가 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끔찍한 이유는 사람들이 다치고 죽기만 해서가 아니다. 싸움에서 이기면 상대가 가진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흔히 목숨을 빼앗는다는 표현을 쓰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목숨은 빼앗기지 않는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였다가 다시 살릴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러니 죽인다는 것은 빼앗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이다.
돈이나 금품 같은 건 빼앗을 수 있지만 사람에게는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목숨이 그렇고 존엄이 그렇고 타인에 대한 동정심 같은 것이 그렇다. 그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고 착각할 때 인간의 자격은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 모두에게서 사라진다. 천부인권이라는 말처럼 그것은 하늘이 부여한 권리이므로 인간이 누군가로부터 인간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위임하려고 할 때 하늘은 그 권리를 회수하는 것이다. 소년병에게 지뢰를 찾으라고 시키는 자든 지뢰밭을 기어가는 소년병이든 우리는 그곳 어디서도 인간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인간의 자격을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 자격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자격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거래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주거나 혹은 누군가로부터 빼앗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양편 모두 인간이 아니었다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 양편 모두 인간성을 회복하는 영화의 결말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의 자격 없음을 지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인간의 자격을 주거나 빼앗을 권리가 없다는 것을.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의 제목은 직역하면 지뢰밭이다. 이 보이지 않는 위험은 우리가 뭔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위험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수천만 명의 인간이 서로 죽인 야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인간 문명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여긴 20세기 벽두였다. 인간이 가장 빠른 속도로 걸어가고 있다고 믿었던 때에 어떤 아이들은 엎드린 채 기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균형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리가 스스로의 자격과 권리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때 저울은 기운다는 사실을.
2025년 1월 23일부터 2025년 1월 24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