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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날씨의 아이>

by 다시

우리가 하나의 세계를 분할하는 이유는 하나로 보았을 때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부분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어른과 아이의 세계를 나누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어른도 사람이고 아이도 사람이지만 둘을 똑같이 대하면 오류가 일어난다. 누군가를 대하기 위해서는 기준이라는 게 필요한데 어른의 기준으로 아이를 대하면 아이는 무능력자가 되고 아이의 기준으로 어른을 대하면 어른은 타락한다. 사람이라는 집합 안에 어른과 아이라는 부분 집합을 나누는 것은 결과적으로 어른과 아이를 모두 최선의 방식으로 대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선의 방식이 거꾸로 최악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호다카와 히나는 모두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위험한 상황에 내몰린다. 가출해서 도쿄로 온 호다카는 나이 제한에 걸려 취업을 거부당하는 바람에 노숙자가 되고 같은 이유로 히나 역시 위험한 일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미성년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거꾸로 미성년자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가 최선의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기 위해 경계를 나누었어도 실제로는 한쪽 세계에 온전히 속한 사람보다 경계에 위치한 사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호다카와 히나의 경우도 법적으로는 미성년자지만 두 사람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해있다. 어른이 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현실은 두 사람을 아이의 세계 바깥으로 밀어붙이는 한편 어른의 세계는 완강히 두 사람을 밀어냄으로써 호다카와 히나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이방인이 된다.


이방인은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은 자의 명명이다.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든 곳에서 소외당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에 있는 동시에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은 세계를 낯설고 위험한 곳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영화 <날씨의 아이>는 바로 그런 세계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벌써 몇 주째 비가 내리는 도쿄는 영화 속 극단적인 대사를 빌리면 “미친 세상”이다. 이것은 비가 그치지 않는 비일상적인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인 동시에 어른과 아이 양쪽에도 속하지 못해 이방인이 되어버린 호다카와 히나가 느끼는 세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날씨가 좋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 말을 반대로 하면 날씨가 좋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확실히 그 말대로 어디서도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세계가 기분이 좋은 곳일 리는 없다.


어른도 아이도 되지 못해 갈 곳을 잃은 두 주인공이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호다카의 경우는 총이고 히나의 경우는 날씨를 맑게 하는 초능력이다. 총은 아이의 세계로 강제 편입시키려는 어른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고 초능력은 어른의 경계 바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다. 우연히 얻게 된 것치고 총과 초능력은 효용성이 높아서 두 사람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하고 일자리 없이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우연히 얻었다는 말은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은 것이어서 어른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발사했던 총은 경찰을 불러오고 생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초능력은 히나를 소멸시킨다. 영화는 그것을 두고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식으로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동아줄이 끊어진 것뿐이다. 경찰을 불러오게 될 걸 알았다고 해도 총을 발사하지 않을 수는 없었고 소멸된다는 걸 알았다고 해도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오래 전에 험악한 상황에 처했을 테니까. 총과 초능력은 우연히 얻게 된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 설령 썩었다고 해도 붙잡을 수밖에 없는 동아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그것을 대가라고 말하는 이유는 비일상적인 세계 속에 있다고 해서 비일상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비가 그치지 않는 이상한 세계라고 해서 총과 초능력만을 이용해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아랫지대가 물에 잠기면 위로 생활터전을 옮긴다. 이 당연한 일이 일상이다. 살아가는 일이란 당연하지 않은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당연한 일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오히려 당연하지 않은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당연하지 않은 삶을 살아갈 때 삶은 이상한 것이 되고 만다.


이상한 세계와 이상한 삶은 다르다. 비가 그치지 않는 세상은 확실히 이상하지만 비가 그치지않는 세상에서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말하자면 우리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할 때에도 서로에게 속할 수는 있는 것이다. 호다카와 히나는 어른의 세계에도 아이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서로에게 속했기 때문에 비록 우여곡절을 겪었어도 이방인의 시절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때 삶을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영화의 처음에 도쿄로 오는 배 위에 있는 호다카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다. 짐작컨대 호다카가 집을 나와 도쿄로 온 이유는 아마도 그 상처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말미에 히나를 찾으러 가는 호다카의 얼굴도 경찰로부터 도망치고 철조망을 넘느라 상처투성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집을 나온 호다카가 상처를 무릅쓰고 히나를 구하러 간다는 이야기의 결말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진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건 바로 우리를 상처입히는 이상한 세계에서 삶을 이상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상처를 무릅써야 한다는 진실이다.


상처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삶이 올바른 목적지를 향해 망설임없이 질주할 때 상처는 그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표식이기도 하다. 영화 속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도쿄는 원래 만이었다. 그러니 비가 그치지 않는 세상은 이상한 세상이 아니라 원래 세상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를 어디에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도 특별히 이상한 세상이 아니라 원래 세상일지 모른다. 이 이상한 원래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하지 않은 삶을 만들어왔고 지금도 만들고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기작에 속하는 영화 <초속 5cm>의 첫 에피소드는 좋아하는 소녀를 만나러 가는 소년의 이야기인데 이 소년은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폭설로 인한 지연과 연착 때문에 끝내 약속 장소에 늦고 만다. 말하자면 소년이 탄 기차는 예정보다 일찍 출발했어도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는 이상한 세계이다. 그러나 바람과 눈이 몰아치는 이 이상한 세계는 서럽지도 않고 춥지도 않다. 그건 바로 약속 시간이 지났어도 끝까지 소녀를 만나러 가는 소년과 아무리 늦어도 소년이 올 거라고 믿고 기다린 소녀가 있기 때문이다.


비가 그치지 않는 세계에도 맑은 표정은 있다. 영화 속 표현대로 “인생을 걸고” 히나를 찾으러 가는 호다카의 얼굴은 눈물과 피가 흐르는 와중에도 빛난다. 히나가 돌아오면 세상은 다시 비가 그치지 않게 될 거라는 걸 알지만 호다카가 알고 있는 건 그것만이 아니다. 그건 바로 네가 없는 맑은 세상보다 네가 있는 비가 그치지 않는 세상이 낫다는 것. 백석 시인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고 했다. 세상을 버리기 위해서는 세상이 필요하다. 너라는 세상이.



2025년 1월 27일부터 2025년 1월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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