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소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뚜렷하게 재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외로 시의성이다. 그때 있었던 일을 아무리 그때와 똑같이 재현해도 지금이라는 맥락과 호응하지 않으면 영화나 소설은 희미해진다. 영화 <모가디슈>는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 외교관이 공조하여 소말리아를 탈출한 이야기다. 내게 이 영화는 뚜렷해보였다.
1991년의 사건은 2020년대에 어떻게 뚜렷해질 수 있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남북이 분단되어 있어서가 아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안기부와 보위부가 각국의 인사를 보호하고 감찰하는 반공주의와 주체사상이 여전히 서슬 퍼런 시대여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때에 비하면 남북 상호간의 경계심은 느슨해졌다. 20세기 남북한이 서로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21세기 남북한은 서로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도 아니고 이제 북한 사람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서 만약 이 영화가 남북의 공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영화는 흐릿해졌을 것이다. 분단 상황이긴 하지만 결국 우리는 한민족이라고, 20세기의 오래된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순간 시의성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탈출이다. 이 영화에서 총알은 남한이나 북한만을 향해 날아오지 않고 국가와 이데올로기를 관통해서 사방으로 날아다닌다.
영화 <모가디슈>에서 남북의 공조는 생존을 의한 상생이지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민족의 화해가 아니다. 한국 대사가 이탈리아 대사관을 방문하고 북한 대사가 이집트 대사관과 접촉하는 모습도 정치적인 게 아니라 기능적인 것에 가깝다. 이집트든 이탈리아든 비행기를 탈 수만 있다면 이데올로기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북한 대사가 한국 대사관을 찾아왔을 때부터 이 영화가 표방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생존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살아남는가가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영화 <모가디슈>는 시의성을 가질 수 있었다.
한국은 1인당 GDP가 2014년에 3만불을 넘었고 현재 4만불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사는 생존이다. 국내총생산이 20위권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지만 빈부격차는 심하고 취업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프리터는 물론이고 아예 구직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은행에서는 30대에 희망퇴직을 받고 마흔을 넘어서 퇴사하면 새로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다.
자기계발서가 유달리 많이 팔리는 것도 이런 세상에서 잘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전략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다. 인문학과 철학은 자아와 이상을 연결하는 다리에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심리 치료의 영역으로 내려왔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사람들이 주식에 많은 돈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꼭 일확천금을 노려서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주가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신의 상황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 즉 내전과 이데올로기 속에서의 생존이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의 생존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표면적으로는 모호하지만 실제로는 공통점이 있다. 소말리아 내전에서 정부군과 반군이 원하는 것은 모두 달라이다. 정부군은 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교공관의 경호를 풀고 철수하고 반군은 돈이 될 만한 건 뭐든지 긁어모으기 위해 민가를 약탈한다. 정부군과 반군은 독재와 자유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다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생활을 보전하기 위해 싸운다.
정부군이나 반군이 그토록 무자비하게 민간인을 학살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들이 한정된 물자를 함께 소비해야 하는 소비주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민간인은 적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물자를 소비하는 적이기 때문에 죽는다. 음식과 기계 그리고 돈은 생존에 필요하지만 사람은 물자를 소비하기만 할 뿐이라 가장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방아쇠를 당기는데 별로 망설임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영화의 진짜 대립주체는 정부군과 반군 그리고 남한과 북한이 아니라 소말리아와 남북한이다. 생존하기 위해 싸운다는 전제는 똑같지만 소말리아 정부군과 반군이 서로를 죽이는 데 반해 남한과 북한은 같이 살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접어두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 지 모른다는 상황은 마찬가지지만 그속에서 상대를 향해 총질을 하느냐 아니면 문을 열고 맞아들이냐는 다르다. 생존이 최우선이라고 말할 때 방법론은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방법 없이는 생존도 없다. 그래서 생존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생존율을 결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방법론은 곧 주체론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모든 물자는 한정되어 있다. 돈도 음식도 물건도 심지어 비행기조차 더 구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소말리아 정부군과 반군은 제한된 물자를 서로 갖기 위해 싸우지만 남한과 북한 사람들은 한 대의 비행기를 함께 타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포기한다. 전향서 때문에 주먹이 오고가고 등 뒤에서 총알이 날아오는데도 망명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시대에 이데올로기는 생명에 준하거나 어쩌면 그 이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 대사는 비행기를 함께 타기 위해 북한 사람들이 전향했다는 거짓말을 하고, 북한 대사는 전향의 오해를 무릅쓰고 비행기를 탄다.
남한 대사와 북한 대사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스스로 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함께 있는 모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생명이 다치거나 힘겹게 쌓은 커리어를 모두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두 대사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이데올로기보다 생명이 중하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어떻게 사느냐보다 사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의견에 두 사람은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생존전략은 공동체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기이한 생존전략이라는 점에서 두 대사가 선택한 생존은 다시 어떻게 사느냐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생존은 주어가 아니며 비어있는 주어의 자리에 들어갈 것은 개인이 아니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모가디슈>의 시의성이란 이런 것이다. 모두가 생존을 위협당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어떻게 사느냐는 더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소말리아 정부군과 반군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인 생존법을 택하는 순간 생존확률은 더 낮아지기 때문이다. 소말리아 내전에서 보듯이 혼자 살아남기 위해 못할 짓이 없을 때 역설적으로 세상은 살아남기 힘든 곳이 된다. 그래서 1991년의 소말리아는 세상은 원래 적자생존이며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다는 말이 윤리성마저 띠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은유로도 읽힌다. 말하자면 영화 <모가디슈>는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신자유주의에 우리는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에 대한 절박한 하나의 답변을 내놓은 셈이다.
영화 속에서 남북한 대사 일행은 총을 들고 싸우면서 탈출로를 만들지 않는다. 그들이 선택한 전략은 책과 모래주머니로 방탄성을 높이고 그 사이로 싸울 뜻이 없다는 백기를 흔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총이 아니라 백기를 드는 쪽을 택했다. 총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담보로 거는 것이라면 백기는 생명 외에 아무것도 지키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묻는다. 국가와 이데올로기, 재산과 지위 그 모든 것의 끝에서 결국 생존하기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삶이 우리를 난처하게 할 때마다 주먹으로 길을 열어왔던 충무로의 액션 키드는 이번 영화에서 주먹 대신 빈손을 들었다. 주먹이 스스로 채우는 손이라면 빈손은 다른 사람의 손으로 채우는 손이다. 살기 위해 필요한 건 불끈 쥔 두 주먹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른이다. 누군가가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감격스럽다. <모가디슈>가 그걸 알게 해주었다. 이 남자는 이제 키드가 아니라는 것을.
2025년 1월 28일부터 2025년 1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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