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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Oct 07. 2022

영화 서간 <호우시절>

잘 있었나요. 지금 창 밖에는 비가 오고 있습니다. 비는 어제부터 왔습니다. 소리가 요란해서 나가보니 생각보다 많은 비는 아니었습니다. 내리는 것과 부딪히는 것의 질감은 꼭 같지는 않나 봅니다. 누군가의 건네는 마음이 누군가의 받는 마음과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는 시간의 단락 같습니다. 비가 오면 봄이 오고 비가 오면 여름이 됩니다. 비가 그친 후의 세상은 비가 내리기 전의 세상과 다르고 비의 한가운데를 걸을 때는 영문 모르게 길 잃은 기분이 되곤 합니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엄마가 돌아오는 것도 비의 계절이었지요. 비는 시간의 바깥에 막을 치고 시간의 안쪽에 불을 피웁니다. 저는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시간과 공간은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미디어의 소재로 타임 슬립을 많이 사용합니다. 하지만 같은 말을 사용하고 같은 공간을 쓰며 같은 시간 흐르는 그곳이 과연 모양이 달라졌다고 하여 다른 곳일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본 것입니다. 타임 슬립의 세상, 흔히 말하는 이세계는 꼭 우주의 건너편이거나 조선시대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일 것이니까요.

 

영화 <호우시절>은 비행기 속 동하(정우성)의 모습부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땅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땅과 땅 사이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발밑이 사라질 때 사람의 마음은 방향을 잃게 됩니다. 그 속에서는 이제까지 걸어왔던 길은 사라지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동하는 공항에 도착하기 전 안내방송을 듣고 손목시계의 시간을 수정합니다. 도착한 곳은 한국과 가깝지만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청두라는 곳입니다. 여기서 동하는 한국어가 아닌 중국어와 영어를 사용합니다. 낯선 시간, 낯선 공간 그리고 낯선 언어까지. 동하는 지금 이세계에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세계에 도착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당신은 익숙한 것들을 발견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가령 청두라고 한다면 고등학교 때 배운 한자를 필사적으로 떠올리려 할지도 모르지요. 누구나 그럴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세계란 완전히 모르는 곳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곳과 자기가 모르는 곳의 사이입니다. 낯익은 풍경도 이따금은 낯선 풍경이 되고 모르는 사람에게서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것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의 안과 바깥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영화 <호우시절>에서 두 남녀도 사이에 있습니다. 그곳은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과거와 서로 사랑하길 바라는 미래의 사이입니다. 시간이 중첩된 곳에서 그들의 언어는 시제가 없습니다. 널 좋아했었다고 말하는 동하의 말은 과거형이지만 현재를 겨냥하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메이(고원원)의 말은 현재형이지만 미래를 가로막습니다. “널 사랑했다는 걸 지금이라도 증명한다면 달라지는 게 있을까”라고 묻는 동하의 말은 순식간에 시간을 건너뛰고,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 걸까,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라고 대답하는 메이의 말은 원인과 결과가 아닌 현재만이 중요하다고 암시하며 시간의 허들을 높입니다.

 

그러나 중첩되건 엇갈리건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이 두 사람만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흐릅니다. 동하는 메이가 보낸 엽서에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묻는 메이에게 동하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는 게 바빠서 시간이 없었고, 나중에 시간이 생겼을 때는 여자 친구가 있었어.” 여기서 말하는 시간이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닌 바로 우리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떨어져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을 때는 우리의 시간이 없어서 너에게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가, 여자 친구가 생겨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다시 우리의 시간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리하여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은 결국 우리의 시간은 흘러가버린 것이 아니라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김동률의 <답장>이라는 곡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다만 당신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메이는 동하에게 키스를 해보자거나 내기의 경품으로 동침을 암시하거나 하는 식으로 둘 사이의 관계를 빠르게 과거로 회복하려는 뉘앙스를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동하를 밀쳐내고 자리를 피하지요. 어떻게 보면 상대를 희롱하는 것 같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여자가 정말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건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메이가 보이는 얼핏 이중적인 모습은 비유하자면 구심력에 의한 것입니다. 메이는 사랑하는 남편을 지진으로 잃었습니다. 그 기억이 메이를 붙잡고 놔주질 않는 것이지요. 생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아갑니다. 안은 뒤돌아볼 수 있을 뿐 그곳으로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억에 붙잡힌 메이는 아무리 바깥을 향해 걸어도 중심을 따라 구를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리하여 지구가 자전을 하면서 낮이 되고 밤이 되듯이 메이의 양상도 한껏 가벼워졌다가도 다시 무겁게 침잠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랑했던 기억을 잊으려는 메이의 모습은 사랑이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수단이 될 때 얼마나 스스로를 무너뜨리는지 보여줍니다. 무언의 약속을 하고 호텔까지 들어갔다가 상대를 거부하고, 키스를 한 뒤에 느닷없이 결혼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결국 운전대를 놓치고 혼절하는 것과 같이 삶의 방향을 상실한 사람 그 자체입니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은 곧 상대마저 기만하는 일임을, 그리하여 버틸 수 없는 죄책감을 불러올 뿐이라는 걸 이 영화는 보여주는 것이지요.


<호우시절>이라는 제목은 두보의 시 <춘야희우>에서 따왔습니다. 때를 알고 내리는 비는 좋다라고 씌어 있지만 사실 정말로 좋은 것은 이 비가 그친 뒤에 꽃이 피기 때문일 것입니다. 메이가 겪고 있는 이 상실의 상처와 자기기만의 고통이 비라면 그녀는 지금 비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앞서 빗속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사라진다고 부끄럽게 적었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에서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뿐입니다. 그곳은 움직일 수 없는 곳이어서 앞을 볼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는 있는 곳입니다. 비의 한가운데서 메이는 과거의 사랑도 상처도 함께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호우시절>은 단지 비를 맞기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메이는 동하와 함께 많이 걷습니다. 걸음이라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연습이지요. 메이가 동하와 함께 걸었던 시간은 그녀가 과거에 갇혀 움직이지 못할 때 바깥으로 나와 걸을 수 있게 만든 연습이기도 합니다. 다치고 넘어지는 건 걸음마를 배울 때 아기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그녀는 아기가 아니지만 너무 오랜만에 걸었으니까요. 이제 걸음마를 다시 배웠으니 환한 태양 아래로 나아갈 차례입니다. 동하가 엽서의 답장과 함께 자전거를 선물해주는 것은 이 때문이겠지요. 걷기가 앞으로 갈 수 있게 해주는 거라면 자전거는 멀리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멀리 나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동하와의 시간 속으로요. 또 쓰겠습니다.



2022년 10월 2일부터 2022년 10월 3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당신을 생각하며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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