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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Oct 10. 2022

영화 이야기 <서유쌍기>

희극지왕이라는 말은 꼭 이 남자를 위해 만들어진 말 같습니다. 그의 코미디를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의 영토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양조위가 성이라면 주성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는 마을 같습니다. 그곳에서는 계급도, 성도 없고 오직 감각만 있습니다. 울다가 웃으면 변덕스러운 거지만 원래 사람은 변덕스러운 것입니다. 체면을 차리고 눈치를 보고 거짓말을 하면서 쌓아가는 숱한 의미들이 이 마을에는 무화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성치는 슬픈 장면에서나 웃긴 장면에서나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됐어, 그래도 돼.”


시리즈라고 해도 영화는 편당 이야기하는 것이 온당하지만 <서유기-월광보합>과 <서유기-선리기연>은 분절이 불가능한 시리즈입니다. 두 편의 영화는 각각 하나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단어를 모아 만드는 문장이야말로 이 영화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이 됩니다. 꽤 복잡한 사연이 얽히고설키지만 결국 이 이야기는 손오공이 다시 손오공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신이 다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다는 말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로부터 떠나 오랜 방황을 한 경험이 있고 마침내 돌아왔거나 혹은 돌아오는 중이니까요.


먼저 <서유기-월광보합>의 단어부터 찾겠습니다. 영화는 손오공(주성치)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관세음보살에게 겁 없이 대들던 손오공은 즉결되어야 마땅하나 삼장법사의 희생 덕분에 인간 지존보(주성치)로 환생하게 됩니다. 지존보는 삼장이 환생하길 기다리는 요괴 백정정(막문위)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우마왕(육수명)의 방해로 백정정을 잃게 됩니다. 지존보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물 <월광보합>을 사용해 백정정이 죽기 전으로 돌아가지만 매번 실패하고 마침내 500년 전 과거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월광보합이라는 말은 사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습니다. 바로 시간을 돌려주는 기물이지요. 그런데 이 기물은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시간으로 돌려주는 게 아닙니다. 지존보는 정정의 죽음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월광보합을 사용하지만 끝내 정정을 구하지 못하지요. 말하자면 월광보합이라는 것은 과거로 돌아갈 수는 있지만 과거를 바꾸는 데는 매번 실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굳이 기물이 아니라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지요. 바로 후회입니다.


후회란 이렇습니다. 과거를 쳐다보고 어느 시점으로 끊임없이 돌아가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고개를 뒤로 돌리고 앞으로 걷는 것과 같아서 멀어지는 과거를 무력하게 쳐다보는 눈에는 눈물만 고이고 앞을 보지 못하는 몸은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원래 가려고 했던 길과는 전혀 다른 낯선 곳에 떨어뜨려 놓지요.


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후회 없이는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성과 갱신이라는 것은 결국 상처 입은 후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월광보합은 문자 그대로 달을 의미하고, 달의 반대편에는 태양이 있습니다. 달이 뒤를 상징한다면 태양을 앞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달을 보지 않는 인간은 태양을 향해 직진하게 되어 끝내 타 죽고 말겠지요.


<서유기-선리기연>에서는 이런 내용을 우마왕과의 싸움을 통해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하 선사(주인)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간 손오공은 우마왕과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리게 되는데 우마왕은 파초선을 꺼내 부침으로써 손오공을 태양에 던져 넣으려고 합니다. 파초선이 일으키는 것은 바람입니다. 흔히 바람 들었다고 혹은 바람났다는 말을 하지요. 이 말은 바로 관세음보살을 향해 덤벼들었던 손오공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말하자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바람이 든 채 앞으로 가기만 하다가는 뜨거운 불길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편의 서유기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뒤를 돌아보는 것의 의미인 것이지요.


월광보합이 후회를 뜻하는 것이라면 선리기연이 뜻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선리기연은 한 글자씩 읽으면 신선이 행한 기이한 인연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화에서 신선은 한 명뿐입니다. 바로 자하 선사지요. 따라서 선리기연이라는 것은 자하 선사가 행한, 즉 스스로 만든 기이한 인연이라는 뜻이 됩니다. 영화 속에서 자하 선사가 만든 기이한 인연은 바로 손오공과의 사랑입니다.


손오공과 자하 선사는 월광보합을 사용한 지존보가 500년 전 과거로 떨어지면서 만나게 됩니다. 문제는 지존보가 월광보합을 사용한 이유는 바로 정정을 살리기 위해서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자하 선사가 애정을 드러내자 지존보는 자기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단칼에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지요.


하지만 나중에 혼절하여 반사동으로 돌아온 지존보는 잠결에 정정의 이름보다 자하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게 됩니다. 정정을 구하기 위해 자하가 들고 있는 월광보합을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하와 동행한 지존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하를 사랑하게 된 것이지요. 반사동에서 우연히 만난 과거의 정정이 지존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본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자하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존보는 정정을 구하기 위해 과거로 와놓고는 자하와 사랑에 빠져버린 셈이지요. 그가 정정을 구하지도 그렇다고 자하에게 돌아가지도 않고 춘삼십낭(남결영)의 칼에 순순이 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존보는 그토록 확신했던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변해버렸다는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이른바 영원한 후회의 굴레가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사의 정을 포기하고 금강원을 머리에 착용함으로써 마침내 바람난 원숭이에서 윤회의 바깥에 있는 불법의 제자 손오공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치 이 두 편의 서유기가 코미디라는 숲에 허무주의의 나무를 심은 영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간은 후회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니 속세를 벗어나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분명 그런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실로 이 두 편의 서유기가 말하는 것은 허무주의가 아닌 카르페디엠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아래 대사에서 명확해집니다.


전 과거에 사랑을 앞에 두고 아끼지 못하고 잃은 후에 큰 후회를 했습니다.
인간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후회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겠소.
만약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이 대사가 말하는 것은 후회가 주는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후회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하지 못한 일이 후회가 되고, 이 후회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는 것. 지존보는 두 명의 여인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정정은 죽어서, 자하는 정정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말하자면 지존보는 항상 그때 했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뒤를 돌아보느라 ‘지금’을 놓친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리하여 만약 하늘에서 기회를 준다면, 즉 다시 한번 ‘그녀와 함께 하는 지금’을 준다면 그는 반드시 사랑한다는 말을 하겠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화의 말미에 손오공은 성 위에 대치하고 있는 두 남녀를 보게 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원하지만 여자와 달리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그녀를 멀리하려 하지요. 이른바 정정에 대한 마음 때문에 자하를 외면했던 지존보와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이에 손오공은 도술을 부려 남자가 여자와 강제로 입맞춤을 하게 만듭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또 한 명의 손오공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겠지요. 현재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대한 미련으로 현재를 외면하고 그로 인해 다시 과거를 돌아보는 악순환을 끊는 길은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현재에 모든 것을 다하는 것뿐이니까요.


월광보합이 후회를, 선리기연이 사랑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 마지막 장면에는 지존보를 닮은 남자와 자하를 닮은 여자는 있지만 월광보합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월광보합이 없는 선리기연, 즉 후회 없는 사랑이라는 뜻이 됩니다. 처음에 말했던 두 편의 영화가 만드는 문장이란 바로 이 후회 없는 사랑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두 편의 영화를 함께 이야기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속세를 떠나지 않는 한 후회의 굴레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이 들어 불에 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뒤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그것을 끝없이 되풀이하지 않는 방법은 오직 현재에 집중하는 것뿐이지요. 마크 트웨인은 지금부터 20년이 지나면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로 인해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다면 절뚝거리는 한이 있어도 앞으로 걸으시길. 어쩌면 우리가 후회라고 생각했던 덫이 사실은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지 않게 잡아주는 추일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지나간 상처는 흉터가 됩니다. 그리고 흉터는 웬만해서는 다시 다치지 않는 법이지요.



2022년 10월 3일부터 2022년 10월 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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