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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Oct 10. 2022

영화 이야기 <미쓰백>

이 영화는 가까이에서 찍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러닝 타임 내내 등장인물이 프레임 안에 온전히 들어오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장면마다 머리의 일부분이 가려져 있거나 다리가 안 보이거나 팔이 안 보입니다. 이 정도면 근접 촬영이 아니라 거의 코앞에 들이대고 찍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풍경은 최대한 멀리서 보여줍니다. 미쓰백(한지민)과 지은(김시아)이 월미도에서 바라보는 바다나 호텔에서 내려다본 도심은 너무 멀어서 다 보여주고 있는데도 오히려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말하자면 <미쓰백>은 사람은 근경으로 풍경은 원경으로 찍은 영화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세상의 틀에 온전히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미쓰백은 편모로부터 버림받은 전과자이고, 장섭(이희준)은 가정을 이루지 못한 남자이며, 지은은 부모로부터 학대당하는 아동입니다. 이들은 악이 아니지만 악역을 맡은 일곤(백수장)과 미경(권소현)만큼이나 세상에서 소외당한 인물들입니다. 사회가 제안하는 바람직한 표본, 즉 윤리적 틀은 그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학대당하는 지은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서로 간 미쓰백이 전과자라는 이유로 오히려 의심받는 상황이나 지은을 찾아서 문을 두드리는 미쓰백을 ‘소음’으로 치부하는 이웃,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에게 ‘귀찮은 일’이라고 말하는 슈퍼 주인의 모습은 미쓰백이나 지은이 온전하게 담길 수 있는 세상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알려줍니다. 세상은 그렇게 너무 가까이 붙은 편견이거나 너무 멀리 떨어진 무관심입니다.


등장인물의 모습이 온전히 담기는 것은 사진 속에서 입니다. 놀이공원에서 유년의 미쓰백이 엄마와 찍은 사진은 단란한 모녀의 일상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날은 엄마로부터 미쓰백이 버림받은 날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가정이라는 것은 일상이 아니라 박제된 관념인 것입니다. 관념과의 거리는 곧 윤리적 올바름의 척도가 됩니다. 그 누구보다 아이를 위하고 사랑해도 편모로부터 버림받고 전과까지 있는 미쓰백은 이 관념과의 거리를 좁힐 수가 없습니다. “내 인생에 누구 마누라, 누구 엄마는 없다고 했지”라고 장섭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미쓰백의 말은 “나 같은 게 엄마가 되어도 괜찮은 거야”라는 자기 연민에 기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마가 될 수 없을 거라는 모성의 부정은 성의 부정으로 이어집니다. 미쓰백은 세차장에서 일하고 일한 뒤에는 국밥집에서 깍두기를 소리 나게 씹으며 소주를 마십니다. 팬티가 보인다는 장섭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 많은 식당에서 다리를 의자에 올려놓습니다. 말하자면 미쓰백은 소위 말하는 여성성이라는 것을 무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성성의 무화 그 자체가 아니라 무화의 이유입니다. 미쓰백이 스스로의 여성성을 없애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엄마가 될 수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이를 거꾸로 뒤집으면 여성이란 곧 모성이라는 공식이 미쓰백에게 내재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여자는 엄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성은 적어도 엄마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내재되어야 할 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자가 곧 엄마라는 것은 조금 다른 갈래입니다.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 모성은 엄마의 성정이지 여성의 성정이 아닙니다. 엄마가 되고 싶은 여성을 존중해야 한다면 반대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여성도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성과 여성을 동일시하는 것은 여성을 잠재적 엄마로 생각하는 일종의 강박입니다. 그리고 영화 <미쓰백>은 이 강박의 기원을 부계 사회에서 찾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미쓰백의 엄마가 알코올 중독에 빠진 것은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이후로 묘사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아내와 아이를 버렸기 때문에 가정은 해체되고 아이는 고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악의 화신으로 보이는 미경조차 아이가 죽기 바란 이유를 그러면 일곤이 정신을 차리고 가정을 돌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미쓰백과 지은의 불행은 부계 사회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아버지들로 인해 발생한 셈입니다.


단 한 번도 남성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곧 모성이라는 부계 사회의 가치관을 짊어진 여자들의 삶은 기구합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여성의 보호자이기는커녕 가해자 혹은 방관자로 묘사됩니다. 미쓰백의 엄마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고 미쓰백은 학생인 나이에 성폭행을 당할 뻔했으며 지은은 게임중독인 아버지로부터 방치되고 학대받습니다. 심지어 공권력을 상징하는 남성들은 가해자 남성의 편을 들거나(“부모 없는 보육원 출신 날라리 기집애랑 애비가 서창건설 대주주에 매부가 의정부 지방 판사야. 성립이 되겠냐?”) 피해자 여성을 보호할 때조차도 소리를 지르거나 주변을 맴돌 뿐 중심으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미쓰백의 보호자를 자청하고 있는 장섭조차도 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엄포를 놓거나 사건이 끝난 뒤에 분주하게 움직일 뿐 직접적으로 지은을 구출하고 보호하는 일은 오직 미쓰백의 외로운 싸움으로만 전개됩니다.


이 외로운 싸움을 통해 <미쓰백>이 겨냥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부계 사회가 만든 가족관입니다. 이 가족관의 이름은 바로 혈연주의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의 피로 이루어진 가족관계가 되겠지요. 아버지의 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떠나는 순간 가족은 구심점을 상실해 버립니다. 학대하는 아버지, 무능력한 아버지라도 부계 사회에서 아버지는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상 아이를 구출했더라도 미쓰백은 아버지로부터 아이를 뺏은 유괴범, 즉 제도를 거스른 범죄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심지어 미쓰백이라는 이름조차 그녀의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성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이런 부계 사회의 틀은 강력합니다. 아이를 위험에서 꺼내고 보호하고 아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모두 미쓰백이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든 것은 마지막에 나타난 장섭의 손에 달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미쓰백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주변인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최후의 싸움은 아이와 단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은 두 여자의 결투라는 점 그리고 결국 지은이 지내게 된 곳은 미쓰백의 집이 아니라 장섭의 집, 즉 외형상 부모와 아이의 형태를 갖춘 가정이라는 점에서 미쓰백의 투쟁은 끝내 부계 사회의 울타리를 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끝내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울타리 너머에 있는 수평의 선일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미쓰백과 지은이 마주하는 장면은 모두 종이 아닌 횡으로 묘사됩니다. 즉 두 사람은 비록 어른과 아이, 보호자와 피보호자, 엄마의 역할을 맡은 여자와 아이의 역할을 맡은 여자로 구분되어 있어도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서로 다른 계단이 아니라 같은 높이의 땅입니다. 끝내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릴 수밖에 없어도 쳐다보는 것은 울타리 위의 하늘이 아니라 울타리 너머의 대지라는 것. 말하자면 닿고 싶은 곳은 아버지라는 하늘이 아니라 연대라는 이름의 땅이라고 이 영화는 말합니다. 영화의 말미에 같은 높이의 땅에서 서로를 쳐다보는 두 사람이 온전히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아마도 그런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요.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에서 연대를 강조하기 위해 무리하게 나쁜 아버지를 연출하고 있는 듯한 뉘앙스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 비극의 출발은 분명 가족을 버린 아버지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술을 마시고 아이를 폭행한 어머니를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하는 방식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게임에 빠져 아이를 학대하는 것이나 술을 마시고 아이를 학대하는 것은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맨발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모습이나 경찰서에 가서 잡아가라고 울부짖은 모습 등을 보여주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윤리적으로 우위에 서는 길인지 가르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말하자면 부계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 부계만큼이나 부정한 모계를 편애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이 영화의 출발지가 학대받는 아동에 대한 고발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학대받는 아동은 미쓰백이라는 캐릭터의 각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전에 이동진 평론가는 <7번 방의 선물>을 두고 캐릭터를 학대함으로써 관객을 울리는 영화라고 평한 적이 있는데,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미쓰백>에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불필요할 정도로 아이를 학대하는 장면이 반복되어 나오는데 이 장면들은 아동학대의 끔찍함을 고발하는 단계를 넘어 미쓰백이라는 인물을 연출의 의도대로 각성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령 놀이공원에서 아이가 미쓰백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던지 혹은 미쓰백의 눈앞에서 아이를 학대하는 장면 같은 것은 자연스럽다기보다는 분명히 의도된 것이지요. 말하자면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캐릭터를 과하게 소모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이라고까지는 말하기 어려워도 지나치다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정도까지 캐릭터를 몰고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그들이 처한 당금의 현실이 빛이 보이지 않는 다리 아래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말미에 다리 아래에서 마주한 미쓰백과 지은은 서로에게 검은 그림자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미쓰백의 입장에서는 고아로 살았던 어둠의 유년을 의미하고 반대로 지은의 입장에서는 빛이 없는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두 사람 중 미쓰백이 먼저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다가오기 때문에 먼저 빛에 얼굴이 드러나는 것은 미쓰백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움직이지 않는 지은 즉,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어둠이 아니라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설령 피투성이가 될 지라도요.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에서 병균을 배양함으로써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수많은 사람을 죽인 켄지의 누나는 죄책감에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의 딸인 칸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칸나, 있는 힘을 다해 행복해져라.” <미쓰백>이 하는 말도 아마 같은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가까이에서 찍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목적 이전에 가까이서 보라는 것이겠지요.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매일 같이 아동학대, 가정폭력의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 살지만 단 한 번도 그것을 가까이서 본 일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런 잔인하고 슬픈 기사들은 어느새 세상을 이루는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미쓰백>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먼 도심이나 바다 너머가 아니라 바로 우리 집 골목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러니 가까이서 보아야 한다고.



2022년 10월 8일부터 2022년 10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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