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Oct 14. 2022

영화 이야기 <말모이>

한글날이어서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내세울 명함은 아직 없지만 글쓰기는 천직이라고 감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서 최은영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생에서 진실로 하고 싶었던 일은 이것뿐이었다. 망상이고 환상일지 모르지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을 살고 싶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모두 글자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글이란 저자의 생각과 글자가 서로 의기투합해서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글자는 단순히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 이상입니다. 머릿속에 분명히 떠오른 생각도 막상 글자로 적어보면 난해한 경우가 많습니다.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모호했던 것입니다. 글자는 생각의 흐릿함과 분명함 그리고 모호함과 정확함을 가려주는 스승입니다. 나는 분명한 것이 있는가. 글자로 써보면 알 수 있습니다. 확고한 것은 막힘이 없고 스스로 믿을 수 없는 것은 떨리고 멈추게 됩니다. 모르는 것을 쓸 때는 가벼워서 날아가고 아는 것을 쓸 때는 묵묵히 나아갑니다. 올바른 것에 대해 쓰는 일은 두렵고 어려운 일이지만 시간이 흘러 뒤돌아보면 거기에는 고치지 않아도 될 글자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싸워온 흔적들입니다.


반대로 저자의 생각은 사라진 글자를 찾아내고 잃어버린 뜻을 회복시킵니다.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글도 좋은 글이지만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는 글도 좋은 글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늘 일상을 잃어버리지요. 일상의 단어가 특별해지면 일상도 특별해집니다. 생각은 글자를 발견하고 찾으며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인도합니다. 글자는 아이와 같아서 어디에나 있고 익숙하고 항상 말을 듣지 않지만 반드시 찾고 지키고 올바른 곳으로 인도해야 할 대상입니다. 워즈워스가 무지개라는 시에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한 연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글자는 아이이면서 스승입니다.


영화 <말모이>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사투리를 수집하던 류정환(윤계상)은 김판수(유해진)에게 소매치기를 당하지만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김판수는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 작업을 함께 하게 됩니다. 김판수는 문맹이지만 조선어학회를 다니면서 글자를 깨치고 세상을 보는 눈을 깨치면서 마침내 사전을 지켜내는 데 성공하게 되지요.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관계의 전도에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를 다루는 텍스트는 민중과 지식인의 관계를 수직관계로 설정하기 쉽습니다. 일본인이나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고 대중을 계몽해야 한다는 독립지사 측도 민중을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지식인은 스승이고 민중은 아이로 계층을 나누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 집단의 관계는 주체와 대상이 됩니다. 앞서 <양들의 침묵>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대상은 주체에 의해 소집되고 해체됩니다. 지식인이 주체가 되고 민중이 대상이 되면 민중은 지식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영화 속에서 대개의 일본인이나 친일파가 선생으로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류정환의 아버지 류완택(송영창)은 고등학교 이사장이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우에다(허성태)는 총독부 문화부 소속입니다. 덕진(조현도)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선생도 일본인으로 나오지요. 말하자면 20세기 초 경성에서 가르치는 자는 친일파나 일본인이고 배우는 자는 조선인입니다. 이것은 계몽주의의 탈을 쓰고 있어도 착취와 강요를 통해 소수 지배층의 이상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의 일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김판수와 류정환의 관계는 다릅니다. 김판수는 분명 류정한으로부터 공부를 배우지만 일본이 조선에게 사상을 주입하는 것과 달리 김판수가 직접적으로 배우는 것은 글자뿐입니다. 일본의 창씨개명이나 조선어 금지 같은 교육 정책이 억지로 길을 만드는 것이라면 조선어학회의 교육은 신발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방향은 없고 오직 헐벗은 자의 아픔을 위로하는 위무만 있지요. 자국어가 없는 민족은 사라진다. 영화 속에서 조선어학회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 민족의 방향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그 자체를 지키려는 것입니다.


김판수가 상징하는 민중이란 생존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살기 위해서 소매치기도 할 수 있고 배만 부르면 도시락이라고 부르든 벤또라고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아닌 살아남는 것 그 자체입니다. 하여 그들은 때론 조선인이고 때론 친일파이며 때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에서 수집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말입니다. 말하자면 사전에 담기는 것은 지식인의 관념이 아니라 생존의 언어입니다. 지식인은 가르치기 위해 말할지 몰라도 민중은 살기 위해 말합니다. 추구하는 관념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도 생존의 추구는 무변합니다. 역사는 관념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삶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어학회에서 자신들이 정한 언어가 아닌 공청회를 통한 언어로 사전을 만드는 것은 결국 이 사전의 목적이 관념이 아니라 생존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바로 민족의 생존 말입니다.


사투리를 수집하기 위해 각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데려오거나 공청회의 장소를 극장으로 눈속임하는 등 김판수를 통해 류정환이 배우는 것은 곧 생존의 방식입니다. 김판수의 이 같은 전략이 없었다면 아마 조선어학회는 진작에 문을 닫았겠지요. 그러니까 영화 <말모이>에서 보여주는 관계의 전도란 이런 것입니다. 지식인도 민중으로부터 배운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배우는 것은 술수나 책략이 아닌 바로 살아남는 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이 중요하다면 생존의 방식 역시 중요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배운 자는 배우지 못한 자를 가르칠 의무가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겠지요. 영화 <변호인>에서 말한 것처럼 가르친다는 행위의 본질은 곧 나눠주는 것입니다. 민중은 자신이 아는 것을, 지식인은 자신이 배운 것을 나눠줍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김판수가 나눠주는 것이 생존력이라면 류정환이 나눠주는 것은 생존의 목적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류정환은 이 말을 가르치지 않고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가 보여주는 것은 아버지와의 대담에서 말한 것처럼 독립이 언제 될지 몰라도 끝까지 조선어를 사수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올바른 길이라면 목적지가 보이지 않아도 걸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신념의 영역입니다. “벤또든 도시락이든” 상관없다는 김판수가 “공동체 정신”을 말하는 김판수로, 살기 위해 소매치기를 마다하지 않던 김판수가 총을 맞으면서까지 사전을 지켜내는 김판수로 변하게 한 것은 가르친 관념이 아니라 보여준 신념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지식이란 이정표가 아닌 발걸음이란 것입니다. 입으로만 걷는 자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지만 발로 걷는 자의 뒤에는 누군가가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신발까지 사주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이 영화는 픽션이지만 서울역 창고에서 말모이 원고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말모이는 사전을 지칭하는 말이며 사전은 민중의 살아남은 말들로 만들어졌습니다. 서울역 창고라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이 원고는 말하자면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도 우리말과 글을 보존한 지식인과 민중 그 자체나 다름없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사람들의 목숨과 노력으로 글자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시 쓸 차례입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말하기 위해서.



2022년 10월 9일부터 2022년 10월 10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미쓰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