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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Oct 03. 2022

영화 이야기 <양들의 침묵>

이야기가 캐릭터를 만드는 영화가 있고 캐릭터가 이야기를 만드는 영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는 전자에 속합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지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잘 없으니까요. 하지만 <양들의 침묵>은 명백히 후자에 속하는 영화입니다. 선명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세 명의 등장인물이 각각의 기둥이 되어 이야기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먼저 버팔로 빌(테드 레빈)입니다. 사실 이 영화의 시발점은 클라리스(조디 포스터)가 아닌 버팔로 빌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기 때문에 클라리스가 호출되기 때문이죠. 버팔로 빌은 여성만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마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살인을 하는 이유입니다. 성전환 수술에 실패한 그는 여성이 되기 위해 여성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여성의 피부를 재봉해서 마치 옷을 입듯 여성의 피부를 입으면 여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호랑이 가죽을 입으면 호랑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냥 광인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버팔로 빌의 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에게 성이란 본질적인 것이 아닌 옷을 입고 벗듯이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버팔로 빌에게 있어 성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거죠. 여자든 남자든 이미 사람을 죽인다는 자체에서 버팔로 빌의 윤리성은 재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성을 자신의 욕망에 의해 바꾼다는 것은 그와 별개의 윤리적인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바로 기독교 세계관에서 말이죠.


기독교 세계관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입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나거나 여자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결정인 셈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바꾼다면 이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됩니다. 실제로 버팔로 빌이 전라로 춤을 추는 장면을 보면 그의 가슴에는 빈 갈비뼈를 상징하는 문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지요. 말하자면 그는 신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이브를 만든 것처럼 스스로 상상의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의 지위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광인의 프레임을 씌우면 그저 미친 살인마가 되겠지만 그의 행동에는 어쩌면 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이 가진 가장 대표적인 능력은 바로 생명의 창조와 파괴입니다. 그는 여자들을 죽임으로써 파괴를 행하고 죽은 여자의 피부를 모아 스스로 여자가 되려고 함으로써 여성을 창조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고 모두들 그가 어디 있는지 알기를 원하며 또 모두가 그를 두려워합니다. 


연쇄살인마와 신이 닮았다니. 제 생각에도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정확히 이 영화가 의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클라리스가 한니발과 나누는 대화 중 꿈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때 클라리스는 자신이 목장에서 도망친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그건 바로 목장주가 어린 양을 살해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클라리스는 목장 문을 열고 양들을 도망치게 하려고 하지만 양들은 소리만 지를 뿐 도망치지 않습니다. 결국 클라리스는 어린 양 한 마리를 품에 안고 도망치지만 이내 경찰에 붙잡히고 양은 도살되고 말지요.


양과 양을 보호하는 목자 그리고 도망친 작은 양까지. 이 장면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마태복음 18장 12절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본 이야기, 바로 아흔아홉 마리의 양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은 이 구절에서 여러 마리의 양을 남겨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사례를 들면서 단 한 사람의 약자도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교훈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지요. 그리고 <양들의 침묵>이 의도한 것은 바로 이 구절의 전도입니다.


영화 속에서 신은 도축하는 살인자가 되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은 볼모가 되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도망친 양이 됩니다. 이 전도를 통해 영화가 말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대상이 사실은 우리를 죽이고 있는 살인마일지도 모른다는 경고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의 지위를 차지한 살인마인가. 이것은 죽이는 자와 죽는 자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죽어나가는 것은 바로 여자들입니다. 그리고 여자를 죽이고 있는 살인마는 버팔로 빌입니다. 이상한 것은 버팔로 빌이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라는 점입니다.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가 여자를 죽인다니. 예컨대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가 여자를 죽인다면 윤리적 입장을 떠나 납득은 됩니다. 하지만 여자가 되고 싶어 하면서 여자를 죽이는 것은 누가 봐도 모순적인 행동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여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위해 그가 그려놓은 설계도입니다. 그는 여자를 옷으로 생각하고 있고, 살아 있는 여자를 그 옷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에게 여자란 목적이기 앞서 수단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를 전체가 아닌 일부로 생각하는 그의 사고는 문신에서 알 수 있듯 바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성경에서 기인합니다. 즉 <양들의 침묵>에서 신, 혹은 신을 가장한 살인마란 곧 여자를 남성의 일부분 혹은 도구로 생각하는 기독교적 여성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어떤지 가늠할 수 있는 지표는 많습니다. 일단 주인공인 클라리스의 경우 FBI 훈련생 중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음에도 그를 쳐다보는 남자들의 시선은 그야말로 똑똑한 애완동물을 바라보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특히 그의 아버지 역할을 맡고 있는 크로포드(스콧 글렌)는 목적을 알려주지 않은 채 그를 한니발(안소니 홉킨스)에게로 보내는데 한니발은 이를 두고 “미인계”라고 딱 잘라 말하죠. 말하자면 외견상 클라리스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던 크로포드조차도 클라리스를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만 다를 뿐 클라리스에게 정액을 던졌던 믹스와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남자들은 같은 시선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클라리스의 꿈속에서 양들의 비명이 그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목자가 살인자이고 양들이 피해자라면 여기서 양의 역할을 맡은 것은 바로 여자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영화 속에서 목적을 위해 죽거나(버팔로 빌) 성욕을 해결하거나(믹스) 계책의 일환이거나(크로포드) 하는 철저히 수단의 대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적 여성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자는 문이 열려 있어도 탈출하지 못한 채 그저 비명만 지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탈출한 양이 끝내 붙잡혀 죽는 것은 목장을 도망친 클라리스가 다시 붙잡혀 기독교적 여성관 속으로 강제 편입되는 것의 은유인 셈이지요. 그래서 그녀의 귀에는 여전히 양들의 비명이 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살인마는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도 버팔로 빌과는 완전히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수준의 살인마지요. 바로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입니다. 버팔로 빌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혐오와 증오입니다. 이것인 살인마에게 느낄 수 있는 정당한 감정이지요. 하지만 한니발 렉터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외경과 공포입니다. 이것은 신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버팔로 빌을 보면서 혐오와 증오를 느끼는 것은 바로 그가 기독교적인 여성관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현시점에서 우리는 종교적 관습으로 여성을 이해하는 사고에서 탈피하고 그것을 악습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클라리스가 버팔로 빌을 죽일 수 있는 것도, 그 징벌에 대한 포상에 의문을 갖지 않는 것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종교적 여성상은 이제 이 사회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점에서는 한니발 렉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을 하기에는 망설여집니다. 만약 클라리스가 한니발 렉터를 죽였다면, 과연 우리는 납득할 수 있었을까요.


한니발 렉터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정신 분석을 하는 사람이죠. 다만 정신 분석이라는 것이 마치 인간의 정신을 해석하는 단 하나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 분석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일종의 스토리텔링입니다. 플롯만 다를 뿐 종교 역시 인간의 정신에 대해 말하는 스토리텔링이지요. 차이가 있다면 종교의 플롯은 신학적인 반면 정신 분석의 플롯은 과학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니발 렉터가 가지고 있는 위엄. 단 몇 마디 말로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가는 카리스마는 바로 그가 과학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종교를 밀어내고 현대 지식 기반을 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과학이니까요. 마블 유니버스에서 타노스를 끝장낸 것이 닥터 스트레인지가 아닌 아이언맨이었다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한니발 렉터는 정말 이 사람이 살인을, 그것도 이빨이나 손톱을 사용해서 식인을 한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지적인 인상을 줍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그가 지닌 방대한 지식, 세밀한 관찰력, 핵심을 파악하는 판단력, 요점 외에 사족을 붙이지 않는 화술 등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폭력과도 무관한 인상을 줍니다. 말하자면 그는 거의 이성의 화신으로 보일 지경이지요. 그러나 분명히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과학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적이고 이성적인 동시에 야만적이고 기만적인 것. 과학은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학문이지만 동시에 이 합리성의 가장 큰 배신자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과학보다 많은 사람을 죽인 적이 없으니까요. 


다시 말해 과학은 종교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신이면서 살인마입니다. 분명 클라리스의 시점으로 전개되기는 해도 <양들의 침묵>은 클라리스가 한니발 렉터를 이용해 버팔로 빌을 잡는 이야기라기보다 한니발 렉터가 클라리스를 이용해 버팔로 빌을 잡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기존에 양들을 이끌던 목자, 즉 종교적 여성관의 자리를 과학적 여성관이 차지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종교적 여성관과 과학적 여성관의 가장 큰 차이는 이것입니다. 전자가 여자를 수단으로 보는 반면 후자는 여자를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죠.


정신 분석을 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 정신이란 여러 가지의 복잡한 사고가 결합된 콤플렉스의 형태여야 합니다. 그래야 분석이라는 걸 할 수 있으니까요. 말하자면 수단으로써의 여자는 정신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단순히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게서 정신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이 말을 뒤집으면 정신 분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곧 도구가 아닌 하나의 완전한 정신을 갖춘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는 뜻이 됩니다. 즉 과학이라는 목자 아래에서 여자는 수단으로써의 지위를 탈출해 인간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기만적인 것입니다. 한니발 렉터는 클라리스에게 길을 알려주는 척하면서 결국 자신이 그 길로 빠져나가 버립니다. 말하자면 그 역시 클라리스를 일종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대상이라는 단어의 성격 또한 그렇습니다. 대상이란 말 그대로 어디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상입니다. 그것은 분명 도구가 아닌 하나의 정신이되 스스로 온전한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만 온전해집니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온전해진 것은 누군가에 의해 다시 해체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영화의 말미에 한니발 렉터는 클라리스에게 묻습니다. “양들의 비명은 멈췄나?” 양의 목자이면서 살해자였던 버팔로 빌이 죽었으니 그의 질문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클라리스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양들은 해방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목자에게 인도되었을 뿐이니까요. 말하자면 양들은 평안에 이른 것이 아닌 단지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쫓지 말라는 한니발 렉터의 말에 클라리스가 “약속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목자가 언제 칼을 빼어들지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2022년 9월 24일부터 2022년 10월 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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