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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Oct 02. 2022

영화 이야기 <러브 앤 드럭스>

‘사랑과 약’이라는 제목을 쓰고 있지만 어쩌면 더 어울리는 제목은 ‘두 종류의 약’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사랑도 일종의 약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약을 구분해 둔 것은 두 약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러브 앤 드럭스>에서 사랑은 치료제이며 약은 진통제입니다. 사랑과 약은 둘 다 고통을 잊게 해 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사랑은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거하고 약은 고통의 증상만을 제거합니다. 이 영화는 섹스 코미디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 묻는 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치료할 것인지 아니면 외면할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사랑의 대상인지 아니면 약의 대상인지 묻는다는 점에서 너무나 쉽게 벗어버리는 겉옷과 달리 복잡한 내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대를 중퇴한 제이미 랜들(제이크 질렌할)은 전자기기 매장에서 일하다가 매니저의 여자와 바람을 피운 게 발각되어 화이자 영업 사원으로 이직합니다. 여자를 사로잡는데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 제이미 랜들은 병원에 있는 여자들의 호감을 사면서 의사와 가까워지는 데 성공하고, 진찰실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매기 머독(앤 해서웨이)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둘은 급격히 가까워지지요.


<러브 앤 드럭스>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명확한 영화입니다. 전반부에서 이 영화가 겨냥하는 것은 섹스와 약의 동일성입니다. 화이자 워크숍에서 마카레나에 맞춰 치어리더 복장을 하고 춤을 추는 여자들과 그 뒤에 있는 대형 화면에 송출되는 약의 이미지는 두 개의 상관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건 바로 섹스와 약이 고통을 잊게 만드는 진통제라는 것이지요. 매기 머독이라는 캐릭터는 바로 이 진통 효과를 극대화한 인물입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그녀는 프로작이라는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으며, 술을 마시고 성적으로 방종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데서 오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지요.


중요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매기가 앓고 있는 파킨슨병은 분명 치료제가 없는 불치병이지만 당장 견딜 수 없는 통증이나 마비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그녀의 증상은 신경 쓰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손떨림 정도입니다. 말하자면 그녀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 증상이 더욱 심해질 거라는 절망감, 즉 정신적인 것이라는 점이지요. 하지만 그녀가 이 정신적인 고통에 대응하는 수단은 약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섹스를 하는 등 온통 육체적인 것들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정신적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정신적인 수단을 쓰는 게 아니라 육체적인 수단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우울증이나 절망감 같은 정신의 문제를 약이나 섹스 같은 몸의 자극으로 대응하는 것은 정신의 문제가 몸에 귀속되어 있다는 생각에 기인합니다. 말하자면 정신의 영역과 몸의 영역이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몸의 문제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이런 생각은 일리가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플 때 혹은 지칠 때 운동을 해서 땀을 내고 샤워를 하면 어쩐지 기분이 전환되는 느낌이 들지요. 운동과 샤워는 마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마음의 문제를 달래줍니다. 그러니 몸의 영역과 정신의 영역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생각의 함정은 정신과 몸이 일종의 상하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 같은 뉘앙스를 준다는 것입니다. 몸에 자극을 가해서 정신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녹초가 되어서 더 이상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을 때라도 기다리던 소식을 듣거나 즐거운 일이 생기면 누구나 순식간에 몸이 회복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처럼 정신의 영역도 얼마든지 몸의 영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지요.


몸의 영역과 정신의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뭐라고 답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몸의 영역과 정신의 영역이 어느 한쪽에 귀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지요. 이 영화의 전반부가 보여주는 것처럼 약과 술 그리고 섹스 같이 육체적 자극에만 의존하는 해법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라 일종의 도피인 것입니다. 쾌락을 느낀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쾌락은 고통의 증상을 없앨 뿐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쾌락이 사라지면 고통은 다시 찾아오지요. 쾌락과 고통의 반복은 치료가 아니라 스스로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마약은 고통을 없애주지만 그 누구도 마약으로 치료할 수는 없는 것처럼요.


그렇다고 해서 약이나 술 그리고 섹스 같은 육체적 자극이 무의미하거나 완전히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이미가 버린 프로작을 먹은 노숙자는 우울증을 개선해서 면접을 보러 가고, 제이미와 매기가 파트너가 아닌 연인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 역시 오르가슴으로 표현됩니다. 단지 어느 한쪽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파킨슨병은 불치병입니다. 하지만 지금 매기의 문제는 파킨슨병이 아니라 파킨슨병으로 인한 절망감입니다. 다만 파킨슨병이 몸의 문제라면 파킨슨병으로 인한 절망감은 정신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절망감은 남의 도움 없이 생존할 수 없게 된다는 불안과 역설적으로 그럼으로 인해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을 거라는 외로움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됩니다. 육체적 자극으로 이러한 절망감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영원히 소외될 거라는 불안은 오직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으로만 치료할 수 있지요.


<러브 앤 드럭스>는 전반부에 불치병에 의한 절망감을 육체적 자극으로 외면하려고만 하는 한 여자와 삶을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고 쾌락으로 회피하기만 하는 한 남자를 보여줌으로써 정신의 영역과 몸의 영역이 균형을 잃었을 때 삶의 무게가 얼마나 가벼워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을 보여주지요. 


다만 전반부의 문제 제기에 비해 후반부의 해결책은 너무나 관습적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말하자면 신선한 문제를 던져놓고 게으른 답변을 제출한 것이지요. 게다가 전반부에서 약(육체의 영역)을 다루는 방식과 후반부에서 사랑(정신의 영역)을 다루는 방식이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어 마치 육체의 영역을 정신의 영역의 하위로 내려놓은 것 같은 뉘앙스를 주기도 합니다. 이래서는 자칫 선후 관계만 바뀔 뿐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 덜 중요하다는 인상을 남기기 쉽습니다.


사랑은 물론 중요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사랑에는 분명 섹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에로스는 쾌락이고 플라토닉은 사랑이라는 식의 이분법은 진통제로 고통을 외면하는 방식만큼이나 편협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스포츠카로 달리는 것 같은 전반부에 비해 지하철을 탄 것 같은 후반부가 그래도 나른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두 주연 배우의 매력 덕분이겠지요. 용두사미라고 하면 그래도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지만 이 영화는 분명 머리와 꼬리를 저울에 놓았을 때 추가 팽팽해지는 영화는 아닙니다. 스포츠카 튜닝을 해놓고 트랙에서 50km로 달리는 차는 어쩐지 맥이 풀리는 법이니까요.



2022년 9월 20일부터 2022년 9월 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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