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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24. 2022

영화 이야기 <작전명 발키리>

답을 알고 있는 문제만큼 긴장이 풀리는 것도 없습니다. 하물며 시험 시간이 2시간이라면 긴장이 풀리다 못해 지루할 지경일 겁니다. 발키리 작전이라는 이름은 생소할지언정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 중간에 암살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작전명 발키리>는 이미 유포된 시험지로 시험을 치려고 하는 영화입니다. 이 시험에 외우지 못해서 틀리는 문제는 있을지언정 몰라서 틀리는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답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답을 쓸 수가 없습니다. 역사의 행보를 알고 있는데 앞서 걸을 수가 없습니다.


브라이언 싱어의 눈에 2차 세계대전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쟁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아닌 무엇으로 바뀌게 만든 전쟁입니다. <엑스맨>에서 매그니토의 능력이 발현된 것은 수용소로 끌려가는 철문 앞에서였지요. <작전명 발키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눈에서 광선이 나오고 손에서 칼날이 튀어나오는 돌연변이는 없지만 여기에 있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간들입니다. 특정 민족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자행하고, 독재 정권에 충성하며,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고는 별장에서 차가운 술을 마시며 품평합니다. 말하자면 나치 정권 하의 독일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되 인간이 아닌 무엇이 되어버린 자들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은 바로 ‘소돔’인 것이지요.


절대악의 설정은 그것이 실제든 아니든 주인공을 절대선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행보에 동의하는 것이 윤리적 우위를 점하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좀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지요. 똑같은 제품을 사도 매출액의 일부를 기부하는 제품을 사면 왠지 좋은 일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냥 앉아서 영화를 보는데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면 나쁠 건 없지요. 하지만 이런 윤리적 우위의 확정은 갈등의 요소를 원천 봉쇄함으로써 스릴러가 가져가야 할 최우선 요소를 상실하게 만듭니다. 바로 서스펜스지요.


그러나 <작전명 발키리>에는 서스펜스가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로 삼은 것도 모자라 절대악까지 설정해 놓고도 이 영화의 서스펜스는 러닝 타임 내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는 히틀러 암살 작전의 성패에 대해 말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전혀 다른 작전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작전이란 다름 아닌 인간이 아닌 무엇이 되어버린 자들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는 작전입니다. 이 작전의 성패는 히틀러의 죽음 여부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전의 성패는 누가 죽고 사느냐가 아닌 어떻게 죽고 사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한쪽 눈과 팔을 잃은 슈타펜버그 대령(톰 크루즈)는 베를린에 귀환해 히틀러 암살 계획 이른바 ‘발키리 작전’에 참여하게 됩니다. 발키리 작전이란 히틀러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예비부대가 베를린을 점령하는 작전이었죠. 슈타펜버그 일행은 히틀러를 죽인 후 이 예비부대를 이용해 나치를 몰아내고 독일을 장악할 계획이었습니다. 수뇌부 회의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데 성공한 슈타펜버그는 베를린에서 발키리 작전을 개시하는 데까지 성공합니다. 하지만 폭발 속에서 히틀러는 살아남았고, 예비부대의 총끝은 나치가 아닌 슈타펜버그를 향하게 되어 결국 암살에 참여했던 모두는 사형당하고 말지요.


폭발은 많은 것을 무너뜨리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것을 가리기도 합니다. 굉음과 먼지, 연기와 화약 냄새는 이명과 착시를 불러옵니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들리지 않고 어떤 길이 광기 속에서도 인간을 향해 뻗어있는지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발키리 작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히틀러가 죽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탄이 터지는 순간 그전까지 스타트 포지션을 취하고 있던 서스펜스는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연기와 먼지가 가린 것은 히틀러의 생사가 아니라 기존까지 나치의 부역자로 살아온 길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폭탄이 터질 때 슈타펜버그를 비롯한 발키리 작전의 일당은 모두 자신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돌아갈 길이 없을 때 서스펜스는 극대화됩니다. 원래 서스펜스란 무지의 궁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궁지에 몰린 자는 모르는 답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영화에서 선택의 기준은 당연히 히틀러의 생사에 달려 있습니다. 이때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히틀러는 죽지 않았어. 하지만 등장인물들은 히틀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생사가 분명했다면 가야 할 길도 분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사가 모호하기에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됩니다. 


<작전명 발키리>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여기에는 다양한 길이 있습니다. 끓어진 길로 되돌아가려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바꾼 방향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직진하는 자도 있습니다. 갈림길에서 움직이지 않는 자도 있고 방향은 정했으되 출발하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프롬(톰 윌킨슨)이 전자라면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빌 나이)는 후자에 속합니다. 이들은 기회주의이거나 보신주의입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자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자들이지요. 반대로 슈타펜버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와 다른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틀러의 생사와 상관없이 그는 발키리 작전을 시작하지요. 인간이 아닌 무엇에서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 히틀러 암살이라는 간판에 숨겨져 있어도 진짜 작전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발키리는 북유럽 신화에서 주신 오딘을 수호하는 여전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의 임무 중 하나는 라그나로크에 대비해 오딘과 함께 싸울 전사를 모집하는 일이지요. 이 영화가 발키리 작전을 제목으로 삼은 이유는 명확합니다. 악에 속해 있었던 수치심을 자신의 목숨으로 씻고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로 직진했던 그들은 사형당한 것이 아니라 바로 발키리에 의해 소집된 거라는 것. 즉 그들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한 것이라는 말이지요. 바로 신이 선택한 인간이 되는 것에 말입니다.


궁지에 몰려서 선택을 강요당할 때 불편함, 즉 서스펜스를 느끼는 이유는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이로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버튼 중 하나만 누를 수 있고 그중 하나는 폭탄이라면 누구나 서스펜스의 극한을 경험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작전명 발키리>에 따르면 어느 버튼이 폭탄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에 폭탄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튼을 누르러 왔다는 것.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찰나의 선택이 아니라 신념의 유무입니다. 진정한 삶이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수치의 양으로 측정하는 것이니까요.



2022년 9월 17일부터 2022년 9월 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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