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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20. 2022

영화 이야기 <우리 집에 왜 왔니>

사람은 말이야. 그렇게 일방적으로 어떻게 안 되는 거야.


러닝 타임 내내 한 눈 판 적이 없는데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영화가 있는 반면 우연히 예고편만 봤을 뿐인데도 잊히지 않는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 집에 왜 왔니>가 그렇습니다. 예고편인 만큼 여러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와중에 주연 배우인 박휘순 씨의 내레이션이 들렸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마음에 내려앉은 것은 ‘일방’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일방이라는 것은 하나의 방향이라는 것이고, 하나의 방향이라는 것은 본래 여러 방향으로 왔다 갔다 해야 할 마음이 제 뜻과 무관하게 억지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은 일방이 생기는 순간부터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립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어쩌면 저는 제 뜻과 무관하게 마음이 한쪽 방향으로만 끌려갔던 기억을 떠올렸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우리 집에 왜 왔니>는 등장인물만큼이나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영화의 이야기가 놀랄 만큼 작위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작위성을 잘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서사는 필연이 아닌 우연에 의해 전개됩니다. 탈영한 군인에 의해 ‘우연히’ 아내를 잃은 병희(박휘순)는 집에서 자살하려던 찰나 ‘우연히’ 집에 들어온 수강(강혜정)을 만나게 됩니다. 집을 점거한 채 첫사랑인 지민(이승현)을 감시하던 수강은 집에 불이 나서(이 역시 지민의 말에 의하면 우연히) 질식한 지민을 구하지만 지민이 자신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지민을 생매장하려던 수강은 ‘우연한’ 주민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히게 되고 병희는 그 뒤로 수강을 본 적이 없다가 어느 날 ‘우연히’ 경찰로부터 수강의 사망 사실을 전해 듣게 됩니다.


영화에는 플롯이라는 것이 있고 이 플롯은 결국 사건과 사건 사이를 연결하는 방식, 즉 인과관계를 말합니다. 만약 이 인과관계가 설득력이 없다면 플롯은 추진력을 상실하고 관객은 영화의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지 바다로 가는지 알 수 없게 되지요. 프랑스의 작가 모파상은 “사람이 우연히 떨어지는 간판에 맞아 죽을 수는 있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굳이 이 말에 기대지 않더라도 영화의 모든 전개가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면 어떤 관객도 그 이야기를 납득할 수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 왜 왔니>가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영화가 우연에 기대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연과 싸우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 왜 왔니>에서 우연이란 두 손 놓고 있었는데 저절로 일어난 버린 사건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했는데 그것과 전혀 무관한 혹은 완전 반대되는 결과가 나와버린 무엇입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우연은 모순입니다. 잘 나가는 회사의 에이스였던 병희는 우연에 의해 아내를 잃으면서 파멸하고, 세상 바깥에서 미친 여자 소리를 들으며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수강은 우연히 사랑에 빠지면서 세상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둘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납득할 수 없어서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하지만 그럴수록 삶은 점점 더 수렁에 빠져듭니다.


인상적인 것은 병희가 수강에게 했던 말. 사람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은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죽기 전까지 병희의 인생은 그를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온도와 습도까지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적합한지 알고 있는 그는 직장도 투자도 가족도 모두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지요. 말하자면 그의 인생은 그가 생각하는 하나의 방향으로 정확히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탈영병에 의해 아내가 죽으면서 그의 삶에는 그가 생각하지 않은 방향이 생겨버렸습니다. 그 뒤로는 모두 자신의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었지요. 회사를 그만두게 되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심지어는 뜻하지 않게 노숙자를 만나 자기 집에 감금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되지 않는다는 말은 스스로는 모르고 있어도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병희는 우연에 의해 자신이 파멸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아내와 탈영병이 내연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최소한의 필연이라도 찾아내려고 애쓰지요. 그러나 그 대가는 망상과 공황장애로 인한 자기 파멸이었습니다. 수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끝난 인연을 평생 단 하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산을 내려와 지민을 찾아 도시를 헤매던 끝에 노숙자로 전락합니다. 말하자면 이 둘의 공통점은 자신의 인생에 느닷없이 찾아온 우연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연을 인정할 수 없어서 필연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좇을수록 그들의 삶은 점점 비참해지지요. 특히 우연히 겹쳐진 수배지를 잘못 보고 자신을 인도 혼혈이라고 생각하는 수강의 모습을 보면 마치 우연은 예상하지 못한 방문객 정도가 아니라 무심히 찾아와 집에 폭탄을 던져 넣은 테러범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삶에 존재하는 우연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인 것일까요. 비록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내 삶을 난도질해도 그저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는 회의가 이 영화의 메시지라는 것인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 집에 왜 왔니>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연에 의한 체념이 아니라 비록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생의 모든 노선을 만들 수는 없지만 탈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본인을 예상치도 못하게 데려다 줄 또 다른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래 수강의 대사를 보면 이 영화의 의도가 무엇인지 뚜렷해집니다.


아저씨는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기는 글렀고, 난 누군가에게 사랑받기는 글렀다는 말. 그 말은 아저씨가 맞는 것 같아. 그치만, 그 반대는 어때? 나는 다시 누구를 사랑하게 되고 아저씨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게 되는 거. 그럼 우리도 완전 실패작은 아닌 거잖아. 


수강의 말은 이렇습니다. 모든 걸 다해 사랑했던 아내를 우연에 잃은 병희는 자신의 무력함에 짓눌려 이제 더 이상 누구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무리 누군가에게 진심을 다해도 그것이 단지 상대를 괴롭히는 일이 되어버리는 수강은 이제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필사적으로 생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모순에 빠져버리는 인간의 무력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강은 여기서도 포기하지 않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에게 꼭 맞는 조각을 찾을 수 없어서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이 비틀거리고 있다면 차라리 우리에게 남은 조각으로 타인을 완성시켜 주는 건 어떠냐고. 우리의 생은 실패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끝내 실패는 아닐 거라고. 수강의 말은 결국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은 자신의 조각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의 조각이 되어주는 것임을 말합니다.


생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연과 싸울 때 인간은 매번 패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생을 이끌어가는 것은 그런 싸움의 흔적이 아니라 다치고 상처 입은 자들이 서로의 상처를 돌보아주는 사랑의 흔적이라고 <우리 집에 왜 왔니>는 말합니다. 수강은 산을 내려와 도시에서 모든 상처와 패배를 껴안고 다시 산으로 돌아가지만 이내 쓸쓸하게 죽습니다. 말하자면 그녀의 생은 나온 곳에서 다시 나온 곳으로 들어가는, 어떻게 생각하면 차라리 나오지 않는 것만 못한 생이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출발지로 되돌아가는 그녀의 궤적이 아니었다면 병희는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생은 누군가의 위로가 됩니다. 평생 사랑받기만을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수강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은 길거리에서 죽더라도 인간이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일러주는 가장 분명한 화살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사랑받길 원했던 한 여자가 끝내 사랑받지 못하고 사멸하는 결말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막막함을 견디기 어렵게 만드네요. 에밀리 디킨슨의 짧은 시로 맺겠습니다.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주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제목 미상>, 에밀리 디킨슨



2022년 9월 15일부터 2022년 9월 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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