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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17. 2022

영화 이야기 <퍼펙트 게임>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한 영화입니다”라는 문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상당수는 실화와 다릅니다. 나무위키를 보면 우선 박만수(마동석)라는 캐릭터는 가공인물이고 롯데와 해태 경기 후에 성난 부산시민이 해태 선수 차량에 화염병을 던졌다는 것 역시 사실무근입니다. 실제 있었던 야구 경기를 소재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내용 역시 실제와 다릅니다. 이는 아마 9회 말 박만수의 동점 홈런을 넣기 위해서라고 생각되는데요. 말하자면 <퍼펙트 게임>에서 실화는 그라운드가 아니라 변화구입니다. 실화를 이야기의 기반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마케팅으로 사용한 것이지요.


사실 실화라고 해서 단 하나의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쿠타카와의 소설 <덤불 속>을 보면 하나의 사건을 두고 목격자와 당사자들이 모두 제각기 다른 말을 하고 있지요. 게다가 실화는 그대로 영화 속으로 옮겨온다고 해도 일단 각색이라는 1차 편집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사실 그대로의 영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영화에서 실화는 마케팅이라고 하는 이유는 실제 있었던 경기 내용마저 ‘하고 싶었던 말’을 위해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은 이렇습니다. 머릿속에 그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자꾸 대화를 그 방향으로 몰고 가게 됩니다. 원래 말에는 방향이 없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맨 처음 말하던 주제는 온데간데없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자꾸 말의 방향을 틀다보면 말은 자연스러움을 잃고 작위적인 것으로 변하고 맙니다. 마침내는 정작 하고 싶었던 그 말까지 작위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지요.


실제 경기 내용을 바꾸면서까지 영화를 밀고 나갔다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이 분명했다는 뜻입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정치인은 악으로, 양대 세력을 대표하는 두 영웅의 악수는 선으로. 밤새 술을 마시고 노는 행위는 추문으로, 새벽 러닝은 귀감으로 삼는 이분법적 인식은 윤리적 기준의 타당성 재고 이전에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미지가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퍼펙트 게임>은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말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어떻게 보면 그다음에 할 말을 하기 위해 마련한 일종의 예시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말하느냐와 무엇을 말하느냐 중에 이 영화가 선택한 것은 후자입니다. 말을 하기 위해 상황을 만들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는 답이라는 것이 생겨버립니다. 왜 선동열(양동근)은 최동원(조승우)과 싸울 수 없는가에 대한 답도, 왜 김용철(조진웅)은 홈런을 치는데도 기사에 한 줄 밖에 나오지 않는가에 대한 답도 모두 마련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문제를 만들고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답을 정해놓고 문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말이 있고 할 말이 있음으로 해서 수많은 자기표현의 양식들이 생겨납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지요. 할 말을 하기 위해, 자기가 본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그 할 말도 이 정도로 노골적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경직성이라는 게 생기게 됩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차리면 대화는 생기를 잃고 상대가 하고 싶은 말에 도착할 때까지 언어를 소모하게 됩니다. 그러면 정작 할 말에 도착했을 때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약간은 민망해지기 마련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물기를 잃지 않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이 차가운 것이 아니라 뜨거운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퍼펙트 게임>은 말을 하기 위해 장면을 만들지만 그 말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은 영화의 러닝 타임 중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기 장면에서 생생히 드러나지요. 삶이란 차가운 술을 마시면서 구경하는 게 아니라 뜨거운 땀을 흘리면서 뛰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합니다. 비록 정해진 답을 이야기하고 있더라도 선수도 뛰고 관중도 뛰는 저 거대한 열기 앞에서는 아무리 경직된 마음도 녹을 수밖에 없지요. 태양의 열기는 외투를 벗기지만 사람의 열기는 마음의 문을 엽니다.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아도 너무 진지한 사람 앞에서는 도무지 비웃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법이지요.



2022년 9월 13일부터 2022년 9월 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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