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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13. 2022

영화 이야기 <마이클 클레이튼>

원칙은 그때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삶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사다리가 된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이동진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위의 한 마디였습니다. 이동진 평론가의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를 매일 한 편씩 읽습니다. 긴 글도 있지만 대부분 A4 한 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이어서 출근 전에 한 편씩 읽으면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이 단단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발목까지 빠지는 늪에서 탈출하기 위한 사다리는 원칙이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아침마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를 읽는 것도 제가 정한 하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지켜야 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늘어나 지금은 다섯 개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안 좋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고 저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납득할 만한 괴로운 일도, 납득할 수 없는 괴로운 일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이 다섯 개의 원칙을 하나씩 지키면서 제 자신이 괜찮은지 확인합니다. 마치 자동차의 엔진이 멀쩡한지 바퀴가 잘 굴러가는지 하나씩 점검해 보는 것과 같지요. 모든 작업이 끝나면 비록 감정의 여운이 생생히 남아 있더라도 스스로 되뇝니다. 괜찮아. 이상 없어.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감정의 여운이 말끔하게 날아가면 그때 다시 알게 됩니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요. 말하자면 원칙이라는 것은 그 어떤 추상적인 자기 자신보다 더욱 자기 자신에 가까운 것이지요.


<마이클 클레이튼>은 상류층의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주는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상류층의 비밀 업무를 수행하는 전문직이라고 하니 언뜻 안티 히어로 혹은 고급 빌런 같은 느낌도 듭니다. 가령 <베테랑>의 최상무(유해진)처럼요. 하지만 영화 속 마이클(조지 클루니)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남자라기보다는 맑은 날에도 비 맞은 남자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혼했고 당장 갚을 방법이 없는 빚이 있으며 심지어 도박 중독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 그를 부르는 세간의 별명은 ‘해결사’입니다. 말하자면 <마이클 클레이튼>은 자기 앞가림조차 하지 못하면서 남의 뒷가림을 해주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매우 간단합니다. 한 마디로 거대한 적에 맞서는 개인의 이야기지요. 그러나 이 영화에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장르적 쾌감은 거의 없습니다. 카메라가 좇아가는 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누르는 인생 역전의 궤적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자기반성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마이클 클레이튼>의 이야기는 꽤 무미건조하고 좀 심하게 말한다면 지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네이버 평점이 6점대입니다) 하지만 이 지루함은 긴장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친 긴장감의 연속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을 그대로 오래 잡고 있으면 늘어나 버리는 것처럼요.


채무에 관한 압박과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부터 방치한 육아에 대한 책임감과 거대한 적의 시선을 불러올지도 모를 비밀문서까지. 마이클의 신경은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습니다. 긴장감을 야기하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그 뿌리는 하나입니다. 바로 그가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이지요.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빚을 지고 아마 이로 인해 이혼을 하게 되었을 것이며 골치 아픈 사건에 연루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사업에 실패하게 된 원인이 아니라 사업을 하게 된 원인입니다. 사장과의 대화에서 마이클은 사업을 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 그만둘 거에 대비한 거였어요.”


잘 나가는 해결사인 그가 왜 무리한 사업을 추진하면서까지 실직에 대비하려고 했을까요. 이유는 명확합니다. 바로 그가 하는 일이 모두 부조리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단순히 나쁜 일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로펌은 법의 대변인이 아니라 법이라는 상품을 거래하는 상인처럼 묘사됩니다. 잘못을 저지른 고객에게 보수에 따라 이런 법은 어떠세요?라고 제안하는 식이지요. 로펌 사장의 말은 이런 현실을 한 마디로 압축해줍니다. “처음부터 추악한 사건이었어. 우린 수임료만 받으면 그만이야”


말하자면 마이클이 있는 사회는 돈만 있으면 법조차 거래할 수 있는, 이른바 정의가 없는 사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의가 없는 사회라는 것은 단순히 부도덕한 사회를 말하는 것일까요. 마이클 센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칸트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기에 자율로서의 자유와 칸트가 말하는 도덕 간의 관계가 있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


즉 마이클 센델이 해석한 칸트의 견해에서 정의란 대상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따르면 이익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거대 기업이나 잘못을 알면서도 법 해석을 매매하는 로펌은 인간도 법도 모두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정의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마이클은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신도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죽거나 혹은 이용당할 수 있다는 것을요. 그가 가진 실직의 불안이란 단지 고용의 문제가 아니라 부도덕한 사회의 희생양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어떻게 생각하면 공포에 가까운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된 것을 인지하는 위험 신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이클은 친구의 죽음 이후에도 그 일을 마무리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습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거대 기업의 부정이 기록된 문서는 폐기하지 않지요. 이것은 그 문서가 자신을 지켜줄 수단이거나 혹은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상품이라서가 아닙니다. 그 문서는 말하자면 마이클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있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위험 신호가 가시화된 형태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가서는 안 된다는 붉은 신호등인 동시에 마이클의 가슴속에서 아직 뛰고 있는 붉은 심장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마침내 마이클은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그만두고 문서를 경찰에 넘김으로써 올바른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영화의 말미에 마이클은 목적지를 묻는 택시 기사에게 50불을 주면서 요금만큼만 아무 데나 가달라고 말합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회에서 방금 나온 그는 이제 갈 곳이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방향을 잃은 마이클의 표정은 영화 내내 한 순간도 그를 놓아주지 않은 긴장에서 해방되어 있습니다. 꼭 올바른 길을 찾지 않아도 괜찮다. 때론 잘못된 길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마이클의 표정은 말합니다. 택시에서 내리면 마이클은 이제 걸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습니다. 걷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2022년 9월 8일부터 2022년 9월 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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