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Oct 29. 2022

영화 이야기 <우리들>

눈이 밝은 감독을 만나는 일은 즐겁습니다. 영화란 편집의 예술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현실의 어떤 부분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자연스러움은 분명 관찰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민하고 세심하게 보면서도 전체를 놓치지 않는 시야에는 지금뿐만이 아니라 어제와 내일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눈이 밝은 감독을 만나는 일은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카메라가 보여주는 그곳에는 지나간 줄만 알았던 나의 아프고 서러운 날들이 서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영화 <우리들>은 나를 부르지 않는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검은 화면 속에서 들리는 것은 온통 타인의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들이며 결국 빛이 들어오면 그 한가운데는 불리지 않는 이름의 아이만이 어쩔 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호명하는 자는 주체이며, 주체에 의해 호명된 아이들은 ‘우리’가 되지만 끝내 호명되지 못한 아이는 영원히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는 주변인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주체가 아닌 바로 주변인입니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쳐다보는 것은 선택하는 권력이 아닌 선택당하지 못한 약자입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중심에 들어오지 못한 것을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영화입니다. 외로운 것과 서러운 것, 나약한 것과 부족한 것, 당당하지 못한 것과 두려운 것 등 한 번도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이 영화의 한 복판을 차지할 때 언제나 ‘우리’의 자리를 거머쥐고 있던 권력은 ‘너희’가 되고, 그런 ‘너희’에게 한 번도 당당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비로소 ‘우리’가 됩니다. 권력을 쥐고 있던 우리가 가진 것이 다수와 위계의 힘이었다면, 권력의 바깥에 있던 우리가 가진 것은 위태롭고 불안한 동질감입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것도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가. 이 영화가 묻고 싶어 하는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이(최수인)는 따돌림당하는 아이입니다. 선이는 반 여자애들 중 가장 인기가 많은 보라(이서연)네 무리에 끼고 싶지만 보라네는 선이를 이용할 뿐 무리에 끼워주지 않습니다. 다행히 전학 온 지아(설혜인)와 만나 가까운 사이가 되지만 개학을 하고 지아가 보라네 무리와 어울리게 되면서 둘 사이는 다른 양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선이가 지아와 처음 만나는 곳은 교실이지만 둘의 관계가 시작되는 곳은 다리 위입니다. 청소를 대신 해주면 생일파티에 끼워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혼자 청소를 다 하지만 사실 보라가 알려준 것은 엉뚱한 집의 주소였지요. 속았다는 걸 알게 된 선이가 다리 위에서 속상해하고 있을 때 지아가 말을 겁니다. “너 뭐 보고 있었어?" 머리를 팔에 묻고 있었으니 사실 아무것도 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어둠을 보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선이가 보고 있었던 것은 막막함입니다. 원하는 무리에 들지 못하고 또다시 바깥으로 내버려진 자신의 처지가 말하자면 환한 낮에도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어둠과 같았겠지요. 빛은 방향입니다. 다리 위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선이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그 스스로의 처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반대로 지아의 부름에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다시 환한 빛 아래로 돌아온 선이는 이른바 방향을 찾은 것입니다. 늘 그렇듯이 사람은 장소이니까요.


영화 <우리들>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 중 하나는 바로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 영화에서 공간은 등장인물을 담는 배경이 아니라 등장인물이 하지 못하는 말 혹은 알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주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선이가 서 있는 다리를 보면 한쪽은 걸어온 곳이고 한쪽은 걸어갈 곳입니다. 걸어온 곳은 가고 싶었지만 거절당한 곳, 즉 보라가 있는 곳입니다. 반대로 걸어갈 곳은 다시 외톨이가 되어야 하는 곳, 즉 집이겠지요. 선이가 다리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이유는 보라가 있는 곳에는 갈 수 없고 혼자가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아를 만나게 되면서 이 다리의 출구가 바뀌게 됩니다. 조금 전까지 혼자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던 다리는 지아를 만나 새 친구를 사귀는 길로 바뀝니다. 말하자면 다리는 그대로지만 그 성격이 달라진 것이지요. 비슷한 예로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들 수 있습니다.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는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만난 후에 다른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습니다. 도착한 곳은 적어도 겉으로 보았을 때는 동일한 목적지였죠. 하지만 그곳은 사실 동일한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영화 <우리들>의 다리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다리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관계의 비유입니다. 관계란 사이이고, 사이라는 것은 다리와 같은 것이지요. 사이는 사람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이 말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자신이 달라진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보라를 (못)만나고 돌아오는 길과 지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의 선이가 달라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요. 바꿔 말하면 사람에게 사람은 똑같은 길이라도 전혀 다른 곳으로 인도해주는 다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이와 지아가 다리를 건너 도착한 곳은 골목길입니다. 골목은 다리는 아니지만 도착지도 아닙니다. 조덕배가 씨가 부른 <나의 옛날 이야기>라는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죠. “쓸쓸하던 그 골목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지금도 난 기억합니다.” 이 말은 나의 사랑은 ‘나의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그 사랑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즉 골목이란 시작과 끝의 중간이며 진행 중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이와 지아는 다리에서 만나 바로 친구가 된 게 아닙니다. 두 사람은 다리를 건너와 골목을 지나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고받습니다. 이른바 남이라는 출발지에서 친구라는 도착지로 향하는 여정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골목은 모두의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라 너와 나의 이야기를 하는 곳입니다. 나는 너의 이야기를 듣고 너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주고받은 이야기들은 마침내 다른 이야기와 분리된 우리만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 친구라는 건 어쩌면 수많은 관계가 오가는 교차로가 아닌 너와 나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골목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특히 따돌림당하는 아이와 갓 전학 온 아이의 입장에서 본다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들의 도착지, 즉 친구가 되는 곳이 공사가 진행 중인 재개발 구역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선아와 지아가 골목에서 급격히 가까워지는 걸 보고 사실 불안했거든요. 왜냐하면 선아와 지아가 가까워진 것은 다름 아닌 방학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이기 때문입니다. 지아는 선아가 따돌림당하는 아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개학을 하고 나서 지아에게 다른 친구가 생겨도 지아는 선아와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을까. 만약 선아와 멀어지거나 심지어 선아를 따돌림시키는 가해자 중 한 명으로 둔갑한다면 그것은 선아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 되지 않을까. 이것은 비단 저만 느낀 불안이 아닐 것입니다.


두 아이가 친구가 되는 곳이 완성된 지역이 아니라 공사 중인 지역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불안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둘의 관계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 이 관계는 자발적인 연대가 아니라 갈 곳 없는 서로의 처지가 만든 임시 동맹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재개발 구역입니다. 선이와 지아에게 있어 둘의 관계는 분명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스스로를 따돌림당하는 아이에서 따돌림당하지 않는 아이로 재개발하는 장소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성공적으로 끝날지 아니면 공사 중인 채로 멈춰버릴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불안은 터져 나오기 시작하지요.


선아와 지아가 서로를 상처 입히는 것은 각자가 가진 것이고 서로를 안아주는 것은 각자가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가령 엄마와 다정하게 지내는 선아의 모습은 엄마가 없는 지아에게 상처가 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에서 자라는 지아가 선아에게 학원비를 내주겠다는 제안은 선아에게 상처가 되지요. 반대로 둘 다 부모님과 바다에 가기로 약속하고도 바다에 가지 못한 일은 서로를 더욱 가까워지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말하자면 둘 사이의 유대는 가진 것이 아닌 가지지 못한 것, 즉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지요.


원하는 것을 쳐다보는 것은 눈을 멀게 만드는 일입니다. 선이가 보라와 어울리기 위해 대신 청소를 하는 것이나 지아가 보라네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선아와 거리를 두는 것, 그리고 보라가 자기보다 성적이 우수한 지아를 시샘해 따돌리기 시작하는 것이 그렇지요. 맹목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정직하게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감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는 원했던 대상마저도 보이지 않게 되지요. 청소를 해주고 얻는 우정을 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친구를 얻기 위해 친구를 따돌리는 것은 과연 친구를 얻는 방법일까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다고 대상을 괴롭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요. 영화 <고지전>에서 싸우는 이유를 묻는 은표(신하균)에게 정윤(류승룡)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레 확실히 알고 있었어. 긴데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같은 이야기를 이 아이들에게도 할 수 있습니다. 맹목은 캄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출구로 나왔을 때는 왜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잊은 채 오직 상처만이 남아 있지요.


반대로 없는 것을 쳐다보는 것은 눈을 뜨는 일입니다. 살 게 아니라면 내려놓으라는 말에 죄지은 것처럼 색연필을 내려놓는 선아의 모습에서 지아는 모욕당한 친구를 대신해 분노에 눈을 뜨고, 자기를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풍에서 혼자 앉아 있는 지아를 보고 선아는 저 아이 역시 나와 같은 외톨이라는 동질감에 눈을 뜹니다. 울고 있는 자신에게 손수건을 건넸다는 이유로 매니큐어를 선물한 보라 역시 잠깐이지만 자기가 따돌린 아이가 자기의 아픔에 공명해 주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지요. 세 아이가 느낀 이러한 감정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것이 일상적인 것이 아닌 일상의 언저리에 있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감정들은 훔치거나 소외되거나 자신의 약점을 들키는 이른바 부끄러운 일에서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부끄러운 일은 숨기고 싶은 법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일상이 아닌 일상의 주변에 서 있게 되지만 그 주변이야말로 어쩌면 생의 그 어떤 장소보다도 자기 자신의 중심에 가까운 것이지요.


하여 이 이야기는 결국 중심으로 가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아이들이 상처를 입은 후에 스스로의 자리를 중심으로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우리들>의 기저는 어떻게 중심으로 가는가 하는 정치학이 아닌 어떻게 이곳을 중심으로 만드는가 하는 윤리학인 셈이지요. 끝내 찾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죽은 병실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등에서, 친구가 때리면 너도 때리라는 선아의 말에 “그럼 언제 놀아?”라고 대답하는 윤이(강민준)의 말에서 분명 이 영화는 ‘화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싸우게 만들었던 것은 결국 중심으로 가고 싶었던 마음이라는 점에서 끝내 화해해야 할 대상은 서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해야겠지요.


영화 말미에 공을 맞고 주변으로 나온 선이와 지아는 서로를 쳐다봅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중심에서 피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 대신 주변에 서 있는 두 아이를 화면의 중심에 데려다 놓고 있지요. 중심은 네가 가고 싶었던 곳이 아니라 네가 있기로 한 곳이라고. 그리하여 결국 중심은 네가 되고 싶었던 무엇이 아니라 바로 너라는 것. 네가 있는 곳이 남들에게 주변일지라도 너와 나는 그 주변에서도 ‘우리’일 거라고.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너와 네가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이라고. 영화 <우리들>이 제게 해주었던 이야기입니다.



2022년 10월 14일부터 2022년 10월 21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블리드 포 디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