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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Nov 13. 2022

영화 이야기 <가려진 시간>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합니다. “이 책은 수린이와 함께 한 3개월의 상담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책이라는 것입니다. 영화와 책의 공통점은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표현 수단이 각각 영상과 문자라는 것입니다. 영상은 삶을 보여주고 문자는 삶을 정리합니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문구가 사라지면 그다음에 곧장 나오는 것은 카메라의 렌즈입니다. 카메라의 렌즈는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아이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즉 영상이 보여주는 것은 아이의 삶이며, 이 아이의 삶을 정리하는 것은 어른입니다. 이것을 조합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이것은 어른이 쓴 아이의 이야기다. 영화 <가려진 시간>이 관객에게 처음 건네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동화입니다.


영화로 보여주는 동화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몇몇의 감독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려진 시간>과 가장 닮은 것은 아무래도 길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 오필리어와 세 개의 열쇠>이겠지요. 주인공이 소녀라는 점과 양부와 함께 산다는 점 그리고 나무 밑동 아래에 있는 마법적인 공간과 비극적인 분위기까지. <판의 미로 : 오필리어와 세 개의 열쇠>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름다움은 끝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절망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영화에서 서사는 점층적으로 쌓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나아가는 대신 올라가고, 마침내 가장 높은 곳에 다다라서 추락합니다. 길예르모 델 토로의 동화에서 정점이 가까워질수록 느끼는 전율은 이상향의 도달이 아닌 낙하의 공포에서 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려진 시간>의 이야기는 나아갑니다. 이 영화는 결국 출구를 찾는 한 소녀가 어떻게 출구로 나가는지에 대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소녀는 망망대해 위에 있고 배가 도착할 곳은 아득하지만 그 방향이 나아가는 곳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판의 미로 : 오필리어와 세 개의 열쇠>가 겨냥한 과녁이 절망이라면 <가려진 시간>이 겨냥하는 것은 희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양부의 손에 이끌려 섬으로 들어온 도입부와 홀로 배를 타고 나가는 종반부의 대칭은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다름 아닌 ‘성장’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장은 희망이 될 수 있는가. 이 영화에서 읽어야 할 것은 성장의 결과가 아니라 성장의 정체입니다.


엄마를 잃고 양부와 섬으로 들어온 수린(신은수)은 생활에 흥미를 잃고 괴담이나 기이한 이야기에 탐닉하며 외톨이가 됩니다. 그러나 수린에게 한눈에 반한 성민(이효제)과 친해지면서 우연히 산속에 있는 나무 밑동 아래로 들어가게 되고, 그 속에서 기이한 빛을 내는 알을 발견합니다. 수린은 엄마가 준 핀을 찾으러 다시 밑동 아래로 들어가는데 나와보니 성민과 함께 온 아이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영화 <가려진 시간>의 서사를 작동시키는 관념은 이른바 안과 밖의 이분법적 세계관입니다. 수린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세계의 안에 있고, 언제나 세상의 밖을 쳐다보면서 이곳을 탈출할 꿈을 꾸고 있습니다. 괴담이나 기이한 이야기라는 것은 결국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밖의 흔적이니까요. 수린이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성민이 다녀온 이세계는 시간의 표면과 이면이며, 도시와 자연 역시 이 영화 속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세계가 안과 밖으로 나뉘면 세계에는 출구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출구는 곧 낙원의 입구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은 밖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도 그곳이 안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낙원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배에 실린 차 안에서 날아가는 갈매기의 사진을 찍는 것이나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어졌어요”라는 수린의 말은 거기가 어딜지는 몰라도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디’라는 것은 영어로 하면 Anywhere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곳이 아니라 여기가 아닌 곳을 말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수린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이동이라는 뜻입니다. 수린이 출구를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의 생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른(타인)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린은 엄마가 결혼했기 때문에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아저씨와 살아야 했고, 아저씨가 발령을 받았기 때문에 섬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즉 수린이 생각하는 안이라는 것은 어른에 의해 속박된 삶이며, 밖이라는 것은 어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곳입니다.


어른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어른이 없는 곳으로 가는 것과 다른 하나는 어른이 되는 것이지요. 전자는 장소의 이동이며, 후자는 시간의 이동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없는 곳에 가면 바로 자신이 어른이 됩니다. 말하자면 장소의 이동이든 시간의 이동이든 어른으로부터 속박받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른이 되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수린이가 상상하는 출구, 즉 이동의 자유라는 것은 바로 성장에 대한 욕망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는 유아기적 소망과는 다릅니다. 길 위에 서 있을 때 수린의 그림자는 실제 수린의 키를 훨씬 넘습니다. 여기서 그림자는 수린이 상상하는 스스로의 크기입니다. 즉 어른들이 보기에 아직 어린이일 뿐인 자신의 외모, 나이 등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하고 있다고 수린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수린이 가지고 있는 성장의 욕망이라는 것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보다 오히려 이미 어른이 된 자기 자신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반발에 가까운 것이지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입을 닫고 인터넷 블로그에서만 소통하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그림자의 공간, 즉 익명의 공간에서만이 진짜 자신을 사람들이 알아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진짜 자신이라는 것은 결국 내면이라는 것을 상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출구라는 것은 이 내면의 진짜 자신을 알아주는 곳입니다. 이 말은 안과 밖의 거리라는 것은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과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의 거리라는 말이 되겠지요. 이른바 외면과 내면의 괴리가 세계를 안과 밖으로 분절시키는 기저라는 뜻입니다. 이 영화의 화법을 빌린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내면의 시간과 외면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것이지요.


수린이 핀을 찾으러 밑동 아래로 들어간 사이 성민은 알을 깨뜨리고 세상의 시간은 멈추게 됩니다. 성민은 모두가 멈춘 시간 속에서 홀로 자라지만 결국 함께 있던 아이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삶의 의지를 잃은 나머지 바다에 몸을 던지게 되지요. 그런데 그 순간 시간이 다시 깨어나게 되고 어른이 된 성민(강동원)은 수린을 찾아가지만 유괴범으로 오인받고 쫓기게 됩니다.


<가려진 시간>이 보여주는 두 개의 시간은 현실과 비현실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외면과 내면의 시간입니다. 알을 깨뜨려서 성민이 들어온 것은 시간이 멈춘 세계입니다. 바로 수린이 그토록 가길 원했던 어른이 없는 세계인 것이지요. 동시에 이곳은 모든 것이 배경으로만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은 오직 나뿐인 곳입니다. 이곳은 굳이 영화에서 찾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이 매일 방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내면이지요.


내면이란 오로지 자신의 상상으로만 만드는 세상입니다. 이곳에서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나를 상상하기 위한 재료나 배경이 되고, 반대로 나는 이곳에서 전지해지고 전능해집니다. 모든 이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두고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는 바로 그 유토피아의 독재자라고 하기도 했지요. 말하자면 내면이라는 것은 유토피아인 것입니다. 그곳은 어디에도 없지만 내가 있는 모든 곳에 있고, 현실에서 아무리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사람이라도 스스로의 내면에서는 구원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내면이란 타인의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도 자신의 눈에는 분명히 보이는 ‘가려진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려진 시간은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것입니다. 수린은 자신의 내면 속에서 어른으로부터 구속받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 자기 자신이 현실이 되는 곳을 찾기를 원했지요. 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간 성민은 그저 몸만 큰 어린이가 되고 맙니다. 내면의 어른이라는 것, 즉 자기 자신만이 상상할 수 있는 진짜 자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자의식의 과잉일 뿐이라는 것.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내면에서 자라난 나는 내면의 바깥으로 나왔을 때 현실의 지배자가 아닌 도망자 혹은 이방인이 될 뿐이라는 것을 영화는 성민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수린이 아이의 몸에 어른을 품고 있다면 성민은 어른의 몸에 아이를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칭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선을 꼬아서 붙인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성민이 들어간 곳은 이곳과 전혀 다른 이세계가 아니라 그저 시간이 멈춘 이곳일 뿐이었지요. 말하자면 수린이 견뎌야 했던 것이 이 시간의 앞면이었다면 성민이 견뎌야 하는 것은 이 시간의 뒷면인 셈입니다. 시간의 앞면을 견디기 위해서 수린은 시간의 뒷면을 상상했고, 시간의 뒷면을 견디기 위해서 성민은 시간의 앞면을 상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종국에 이 아이들이 알게 된 것은 이면에 낙원은 없다는 것.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끝내 정면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 성민을 보호하기 위해 수린은 이세계를 상상하는 일을 멈추고 이 세계에서 싸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수린이 알게 됩니다. 정면을 쳐다보는 일이란 남몰래 자신을 세상과 싸워도 지지 않는 투사로 상상하는 일이 아닌 모두의 앞에서 소중한 것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요. 입을 다물고 인터넷으로만 말을 하던 아이는 이 과정에서 모두에게 거짓과 진실을 말하고, 자리에 앉아 떠나는 상상만을 하던 아이는 비로소 배표를 끊기 위해 터미널로 향하게 됩니다. 내면은 상상할 수는 있어도 움직일 수는 없지요. 걸음은 언제나 머리가 아닌 몸으로 걷는 것입니다.


성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면의 세계를 활보하던 어른은 현실의 세계에서 도망 다니는 아이가 됩니다. 성민이 도망을 다니게 된 이유는 바로 아이들을 유괴해서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얼핏 오해처럼 보이는 이 누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민을 쫓는 이유도, 성민이 그들에게 억울하다고 항변하지 않는 이유도 모두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기 때문이지요. 차이가 있다면 쫓는 쪽에서는 죄책감을 환기하고 쫓기는 쪽에서는 죄책감을 수용한다는 점뿐입니다.


그러나 성민의 마음이 몸을 따라잡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죄의식의 부담이지 휘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요구할 때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있다면 아이는 내면의 세계로 숨고 어른은 그 책임을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멈춘 세계를 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수린을 살리기 위해 다시 한번 알을 깨뜨리는 순간 성민이 도착하는 곳은 내면의 도피처가 아닌 소중한 이를 위해 참아야 하는 인내의 공간이 됩니다. 말하자면 첫 번째 알에서 나온 것이 내면이라는 괴물이었다면, 두 번째로 알에서 나온 것은 바로 어른인 것입니다.


성장이라는 것은 어쩌면 도시가 자연에 길을 내듯 비일상의 영역 안에 일상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일상을 깨뜨리는 다이너마이트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가려진 시간>은 삶이 막힌 자리에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후 그 너머에 대해 묻는 영화입니다. 폭발과 함께 아이들은 사라지지고, 연기가 걷힌 자리에 다시 보이는 것은 그때 그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자신을 쳐다보는 낯선 시선에 떨어야 하겠지만 언젠가 이 시간을 그리워하게 되겠지요. 연기와 여진 속에 가려져 있던 그 성장의 시간들을요.


이 영화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성장, 즉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두 주인공들뿐이라는 점입니다. 모두가 그대로인 와중에 주인공들만 성장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 영화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방식으로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장이라는 말은 꼭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성장은 주변 사람의 변화로도 이어지지요. 그 관계를 외면하고 렌즈의 중심에 있는 인물의 변화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주위의 모든 것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 위한 재료로 삼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성장은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중심을 이동시키는 이야기일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려진 시간>이 말하는 이면의 판타지에 대한 지적은 유념할 만한 것입니다. 미우라 켄타로의 만화 <베르세르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이 말은 아이든 어른이든 성장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하는 말입니다. 비록 무한의 뒤틀림 속을 걷는 것 같아도 사실은 항상 정면을 향해 걷고 있다는 것. 길은 앞으로만 뻗어 있다는 것을요.



2022년 10월 22일부터 2022년 10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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