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Nov 27. 2022

영화 이야기 <피아니스트의 전설>

영화의 화자인 맥스(테일러 프루스트 빈스)가 나인틴 헌드레드(팀 로스)와 처음 만나는 장면이 인상 깊습니다. 풍랑을 만나 배가 거칠게 흔들리고 있을 때 뱃멀미를 참다못해 방 밖으로 나온 맥스의 뒤에서 나인틴 헌드레드는 말합니다. “뱃멀미 약이 있어요.” 어리둥절한 맥스를 데리고 나인틴 헌드레드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연주홀입니다. 그는 피아노와 바닥을 고정시킨 고정 장치를 풀고 배의 흔들림에 따라 미끄러지는 피아노 위에서 연주를 시작합니다. 맥스는 황홀한 연주와 춤추듯 움직이는 피아노의 안무에 뱃멀미를 잊어버리게 되지요.


이 장면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존 오니어리가 쓴 <온 파이어>라는 책입니다. 존 오니어리는 어린 시절 심한 화상을 입어 죽을 뻔한 사고를 겪었음에도 사고로 인한 후유증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명사가 된 자신의 이야기를 썼죠. 그 책에 나오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진정한 인생이란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비 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삶은 때로는 배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나를 지탱해 줄 것 같았던 믿음들은 폭풍을 만나는 순간 평형을 잃어버리고 나를 닻도 없는 망망대해 속으로 떨어뜨리고 맙니다. 몸은 물속에서 무겁게 포박당하고 얼굴은 거친 물보라로 숨 한 번 제대로 쉬기 어려울 때 문득 드는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삶은 나의 의지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연이나 혹은 거대한 힘에 의해 휩쓸리고 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들면 어쩐지 내가 통제하고 있었던 것들조차도 이것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놓아버리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간 나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이 풍랑 속에서는 바닷속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짐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 짐들을 하나씩 풀어버리기 시작하면 나는 가벼워지고, 가벼워진 나는 방향도 기저도 잃은 채 운명이 부는 대로 표류하게 됩니다. 그러다 마침내 해변에 닿으면 그곳은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이도 없으며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섬입니다.


다시 살기 위해서 이 섬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 깨닫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바다 위에 있을 때가 더 헤엄치기 좋았다는 것. 방향이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어도 내가 맞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헤엄쳤더라면 어쩌면 지금쯤 집에 도착했을지도 모르는데. 중심을 잡아주던 모든 것을 놓아버린 나는 몸은 말랐지만 이제 다시 바다로 뛰어들 기운이 없습니다.


지면이 흔들리는 일은 많습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지면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흔들리지도 갈라지지도 않는 땅이란 없는 것입니다. 옛 우화에 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거대한 거북이 등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땅과 매번 흔들리는 거북이 등 사이에서 어쩌면 진실은 후자 인지도 모릅니다. 중간에 진동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 정도 진동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풍랑 속에서 맥스는 뱃멀미를 하지만 나인틴 헌드레드는 피아노를 칠 수 있었던 것처럼요.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영화 <어바웃 타임>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면인데 바로 팀(도널 글리슨)과 메리(레이첼 맥아담스)의 결혼식 씬입니다. 야외에서 진행된 결혼식은 갑작스럽게 몰아친 폭우로 난장판이 됩니다. 야외에서 결혼하시는 분이 많은지는 몰라도 결혼식 중간에 비가 오면 기분이 좋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하지만 이 비로 인해 두 사람의 결혼식은 전형적인 결혼식이 아니라 흥분과 떨림이 공존하는 축제가 됩니다. 그때 나오는 노래가 <Il Mondo>라는 곡인데 직역하면 ‘이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은 규격이 갖춰진 양산품 공장이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어떤 모양이 나올지 모르는 수제 공방이라는 것이겠지요. 다만 비가 오더라도 그것을 망쳐버린 결혼식으로 생각할지 아니면 축제로 생각할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유념해야 할 것은 흔들리는 땅과 거친 바다는 불행이 아니라 이 세상 그 자체라는 것.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날씨를 알아맞히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도 태양을 보는 것입니다.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돈(진 켈리)이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은 그냥 비가 와서가 아니라 빗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그의 태양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춤이 있지만 그 모든 춤들의 공통점은 어떤 동작에서도 무게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춤은 몸짓이지만 모든 몸짓이 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무엇이 춤이고 무엇이 휘청거림인지 알고 있지요. 나를 가볍게 만드는 것은 춤이 아닙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무게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몸짓이야말로 춤이지요. 이동진 평론가는 <밤은 책이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일을 해내는데 세월이 필요하다면, 그건 긴 시간이 그 일의 핵심이기 때문”이라고요. 무게 중심을 익히는 법은 아무리 돌려 말해도 결국 힘든 시간을 견디는 일입니다. 춤의 시간이란 넘어지지 않고 버틴 시간일 테니까요.


삶의 모양을 생각할 때 삶은 딱딱해집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은 기억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양이라는 것은 어디서 본 것들이라는 뜻이지요. 따라서 어디서 본 모양에 자신의 삶을 맞추려면 필연적으로 어딘가를 자르고 깎아내야 합니다. 모델을 따라 하는 몸짓은 대개 뻣뻣하기 마련입니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유연해야 합니다. 유연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따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든가 그 어떤 무엇과도 다른 나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하자면 용기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그 속에 담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용물이 달라지면 다른 것이 됩니다. 똑같은 캔에 들어 있어도 맥주와 콜라를 헷갈리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풍랑 속에서 피아노를 치던 주인공의 모습 때문에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볼게요.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배에서 태어나 배에서 자라고 배에서 사라진 피아니스트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배는 버지니아 호라는 이름의 거대 여객선입니다. 꼭 타이타닉처럼 보이더군요. 실제로 맡은 역할도 같습니다. 버지니아 호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유럽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아메리카로 데려갑니다. 길고 지친 항해가 계속되는 어느 날, 새벽의 안개가 잔상처럼 남아 있는 아침에 누군가 이렇게 외칩니다. “아메리카!” 모든 이야기가 중단되고 사람들의 시선은 목소리의 방향이 향한 곳으로 향하며, 그곳에서 다들 비로소 볼 수 있습니다. 새파랗게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그러면 갑판 위에서는 함성이 터져나오죠. 그 함성이란 곧 몸속 깊숙이 숨어 있던 희망의 정체입니다.


이곳이 너무 힘들 때,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버거울 때, 무거울 때, 괴로울 때 누구나 그곳을 생각해 보기 마련입니다. 초라한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아 든 학생에게는 서울대가, 귀하의 역량은 우수하지만…으로 시작되는 문자를 받은 취업준비생에게는 대기업이 그렇겠지요. 20세기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가 그랬을 것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무수한 말들 속에서 모두들 각자의 아메리카를 상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상상은 자기 반영적입니다. 말하자면 아메리카라는 물리적 지형은 단 한 곳이지만 아메리카를 상상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로 인해 하나의 아메리카는 수만 개의 아메리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처음에 존재했던 하나의 아메리카라는 곳은 사라지고 실제로 남는 것은 수만 명의 꿈과 희망이 중첩된 상상의 땅입니다. 누군가 “아메리카!”라고 외칠 때 사람들이 보는 것은 퍼렇게 변색된 건축물이 아니라 마침내 펼쳐질 파란 자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문을 열어놓고도 정작 이 영화는 단 한 번도 아메리카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영화의 주인공도 아메리카에 상륙한 사람이 아니라 배에서 한 번도 내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성취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여정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은 흔히 스티븐 잡스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여정이 아닙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 영화에서 말하는 여정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을 했을 때 미리 만나서 영화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에요. 순수한 재미로만 말한다면 저의 경우, 정말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을 때조차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함께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시간이 더 즐거울 때가 많았습니다. 이 영화의 대사를 빌린다면 이런 것이죠. “네겐 아직 희망이 있어. 네게 좋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가본 적은 없지만 아메리카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슴이 부푸는 것은 언제나 기다리는 시간이니까요.


20세기의 배는 물론 타이타닉이나 버지니아 같은 여객선도 있지만 그보다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침략선이 훨씬 많았습니다. 흔히 2차 제국주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때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간 것은 다름 아닌 배에서 내린 자들이었지요. 말하자면 배에서 내린다는 것은 환상의 끝이거나 고통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아메리카로 향하는 한 남자는 주인공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의 소리를 들었소. 바다는 이렇게 말하더군. 인생은 광대해! 그 순간 나는 인생을 바꾸기로 결심했소. 새 출발을 위해.”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만난 그의 딸은 그가 생선장수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생선장수가 초라한 직업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생선장수가 되기 위해 꼭 아메리카까지 올 필요는 없었겠지요.


제1차 제국주의 시대를 흔히 대항해시대라고 부릅니다.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 뒤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하고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넓어 보입니다. 대항해시대라는 말에는 분명 낭만이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그 시대에 낭만과 모험심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들이 배를 타고 떠났다는 그 항해 자체에 있는 것이지, 금에 눈이 뒤집혀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팔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1차 제국주의 시대나 2차 제국주의 시대나 배에서 내린다는 것은 결국 환상의 끝에서 다시 현실과 마주하거나 혹은 욕망으로 점철된 스스로의 광기를 확인하는 일이라는 거겠지요. 조셉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에서 원주민을 착취하고 상아를 모으는데 혈안이 되었던 정복자 커츠의 마지막 말은 다름 아닌 “끔찍하다, 끔찍해”였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나인틴 헌드레드라는 점.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폐선이 된 버지니아 호에서 맥스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으려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분명 이 영화는 20세기를 호명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호명하는 20세기란 말하자면 항해와 상륙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희망을 찾아 누구나 떠날 수 있었던 항해의 시대이자 폭력과 고통으로 점철된 상륙의 시대이며,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어디서 어디론가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던 항해의 역사이면서 결국 희망의 땅이 아닌 희망의 땅과 닮은 현실의 땅에 내려야만 했던 상륙의 역사이고, 생이 정형화되지 않고 물살에 따라 흘러가는 배의 모습을 닮았던 시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발지와 도착지가 정해져 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시간의 얼굴인 것이지요.


영화 내내 초점을 잡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황하는 맥스의 눈은 결국 이 두 세계를 동시에 쳐다봐야만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시선인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선이 뻗어나가서 마침내 만나는 지점을 일러 소실점이라고 합니다. 소실점이 없는 눈은 텅 비어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끝이 없기 때문이지요. 두 개의 세상을 보면서 사람들이 느껴야 했던 것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 이전에 뭘 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막막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버지니아 호에서 마침내 다시 만난 맥스에게 나인틴 헌드레드는 이렇게 말하죠.


“…그 거대한 도시에는 모든 게 다 있었어. 끝만 빼고. 내가 보지 못했던 건 이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이야…(중략)…피아노에는 88개의 건반이 있어. 모두에게 똑같이. 건반은 유한하지만 우리는 무한해. 하지마 건반이 무한하다면 그 건반으로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은 없어. 그건 신이 연주하는 피아노야.”


희망은, 여기가 아닌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줄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 생긴다고 나인틴 헌드레드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아메리카만큼 무한한 장소가 아니지만 이곳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은 무한합니다. 브런치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이 수만 명의 작가가 있는 꿈의 공간, 출판을 위한 플랫폼이라고 생각하면 막막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나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비로소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겠지요.


떠나는 맥스에게 나인틴 헌드레드는 말합니다. 만약 저승에 왼팔이 없다면 오른팔이라도 두 개 달 거라고. 왼팔이 있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피아노를 못치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중요한 것은 나에게 꼭 맞는 장소나 사람, 조건을 찾는 게 아니라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일기는 분명 잘쓴 글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소중한 글이지요. 삶은 잘된 것들을 모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는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정은 언제나 지금 있는 자리에서 출발하는 법이지요.



2022년 10월 29일부터 2022년 11월 13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가려진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