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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Nov 27. 2022

영화 이야기 <글래디에이터>

로마라는 고대의 역사와 콜로세움이라는 거대 원형 경기장까지. 이 영화의 배경은 온통 큰 것들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도 게르만족과의 전투 장면이었죠. 말하자면 <글래디에이터>의 소재는 거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원경을 잡는 경우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첫 전투 장면부터 콜로세움의 검투사 경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장면은 미디엄 쇼트 혹은 클로즈업으로 촬영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이야기는 근경에서 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강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수십 개의 작은 물줄기가 흐르는 강. 이것이 <글래디에이터>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가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관객이 대상에게 가까이 간다는 것과 같습니다. 카메라와 대상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는 관객과 대상 사이에는 심리적인 거리입니다. 즉 가까이 갈수록 관객은 대상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입하게 되고 바라게 되며 원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이 말인즉슨 어느 한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막시무스(러셀 크로우)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이 영화는 코모두스(호아킨 피닉스)를 위시한 숱한 인물의 개인사로 지탱됩니다. 서사의 머리는 막시무스일지 몰라도 다리는 막시무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영화를 이러한 형식으로 찍은 것은 아마도 이 영화의 핵심 가치가 바로 전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복수극입니다. 복수란 억울한 피해자가 정당한 가해자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이 복수극은 주인공 막시무스가 그가 직접 토벌하던 야만족의 일원이 되어 로마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그 밖에도 총사령관은 노예가 되었고 살인자는 왕이 되며 누이는 아내가 됩니다. 


단일한 정체성이 유지될 때, 이른바 캐릭터가 평면적일 때 이야기는 납작해집니다. 그리고 납작한 이야기는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잘 보입니다. 그러나 복수의 정체성이 중첩될 때, 심지어 그  정체성들이 충돌하여 내적 갈등을 일으킬 때 캐릭터는 입체가 됩니다. 입체를 보기 위해서는 가까이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캐릭터가 가진 다면성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리들리 스콧이 카메라를 가까이 가져간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아마 많은 분이 카타르시스를 느낀 장면이 있다면 바로 콜로세움에서 코모두스와 가면을 쓴 막시무스가 마주친 순간일 것입니다. 등을 돌리는 막시무스에게 코모두스가 노하자 고개를 돌린 막시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름은 막시무스 데시무스 마르디우스. 북부군 총사령관이자 펠릭군의 장군이었으며,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충복이었다. 불타죽은 아들의 아버지이자, 능욕당한 아내의 남편이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살아서 안 되면 죽어서라도."


이 대사가 말해주는 것은 결국 그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정체성의 나열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정체성이란 곧 각각의 권리와 책임을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이면서 남편이면서 아들이라면 나에게는 아버지로서의, 남편으로서의, 아들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이 있는 것이죠. 막시무스의 복수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가 자신의 정체성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훼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침해당한 권리를 보상받기 위해 싸우고, 책임지지 못한 것에 죽음으로 빚을 갚습니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얻고 싶어서 얻는 것도 있지만 의도와 상관없이 얻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의 다른 이름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여러 개라면 그 사람은 입체적인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입체적인 사람이 있으면 멀리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까이 오고 싶어하고 근처에서 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만큼 평면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지요. 막시무스가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수많은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있었던 동시에 그 모든 자기 자신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말했죠. 인격은 그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부담의 양이라고. 


우리가 때때로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는 것은 어쩌면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은 보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또 다른 자기 자신이지요. 사람들은 모두 하나 이상입니다. 만약 하나 이상이 아니라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주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늘 클로즈업 카메라가 곁에 있다고. 영화란 어떻게 보면 감독이 배우를 보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제가 배우라면 저는 좋은 감독이 저를 찍어주길 바랍니다. 반대로 제가 감독이라면 지금 찍는 배우가 좋은 배우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2022년 11월 13일부터 2022년 11월 26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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