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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an 01. 2023

영화 이야기 <시라노 : 연애조작단>

이 영화는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서 모티프를 가져왔습니다. 희곡에서 제목과 동명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괴상하게 생긴 코 때문에 엄청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인물입니다. 그 결과 좋아하는 여자를 두고도 연적의 편지를 대필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지요.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텅 빈 영혼뿐인 남자와 고결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나 추한 외모를 가진 남자. 이것은 얼핏 윤리적 답이 정해진 질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화 <시라노 : 연애조작단>에서는 이 관계를 비틀었습니다. 외면과 내면 대신 이 영화가 가져온 것은 바로 짝사랑과 옛사랑입니다.


극단을 운영하다 빚을 진 병훈(엄태웅)은 좋아하는 여자를 사귈 수 있게 도와주는 흥신소를 운영하다 우연히 자신의 옛 연인인 희중(이민정)과 조우하게 됩니다. 그는 희중을 사랑하는 상용(최다니엘)의 의뢰를 거절하지만 극단의 자금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용과 희중이 연결될 수 있도록 돕게 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점차 자라는 희중에 대한 마음으로 괴로워하게 되지요.


병훈이 옛사랑이라면 상용은 짝사랑입니다. 옛사랑과 짝사랑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혼자 하는 사랑이라는 점입니다. 누군가를 혼자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현실의 인물로부터 정보를 가져왔기 때문에 외면은 실재 인물과 같지만 행동이나 말투, 성격이나 심리 같은 건 완전히 다릅니다. 오히려 그러한 내면은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의 욕망의 반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길 바랍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표정을 보여주길 바라고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길 바랍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상대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건강한 사랑은 상대로 하여금 내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랑은 나와 상대가 모두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지향점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생텍쥐베리는 사랑이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쳐다보는 것이라고 했지요.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면서 사랑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더듬을 수 있을 때 두 사람은 그 형상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지 않지만 서로가 서로에게서 항상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혼자 하는 사랑은 상대가 나이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상상 속에서 혼자 사랑할 때 그 누군가는 외면만 다른 나와 다름없습니다. 상상 속에서 상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 혹은 그녀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하는 사랑이 커질수록 현실의 상대와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상상 속의 상대와 현실의 상대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상상 속의 상대는 결국 나 자신이므로 이 괴리감은 나와 상대의 괴리감에 다름 아닙니다. 말하자면 혼자 하는 사랑이 깊어질수록 깨달아가는 것은 상대와 나의 공통점이 아니라 차이점인 것입니다.


상대에게 직접 다가가 상대와 나의 공통된 지향점을 만드는 대신 상상 속의 상대를 그리면서 현실의 상대와의 차이를 점점 벌려가는 것은 어쩌면 병리적인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욕망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방법에 집착하면서 거기에 중독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칼에 찔린 상처에 약을 바르거나 붕대를 감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계속 칼로 찌르는 것입니다. 이른바 자해인 셈이지요. 이 정서적 자해의 이름은 바로 자기 연민입니다.


자기 연민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스스로를 불치병에 걸린 사람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불가능성은 내가 가진 치명적인 어떤 결함에서 연유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는 나와 사랑에 빠질 사람보다 사랑에 빠지지 않을 사람의 수가 훨씬 많습니다. 말하자면 사랑의 가능성보다 불가능성이 도처에 깔려 있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나의 결격 사유에 기인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불가능성에는 어떤 원인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원인을 바로 자신의 내부에서 찾는다는 것이지요. 가령 아름다운 여자에게 거절당한 남자는 그 원인을 자신의 잘생기지 않은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계속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잘생기지 못해서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른바 영원히 사랑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린 것처럼 행동하고 그 이유를 자신의 외모에서 찾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외모가 별로 특출나지 않은 사람들도 사랑을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특별하다고 말할 만한 외모는 거의 없습니다.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대개 사람들은 비슷합니다. 한 마디로 부활의 노래 제목처럼 누구나 사랑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 이유는 이 불치병의 세계야말로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상대와 마주할 때 나는 매번 내 안의 결격 사유와도 마주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현실의 상대란 나를 파괴하는 자입니다. 반대로 상상 속의 상대는 바로 지금 현재의 나 자신입니다. 상상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는 그 혹은 그녀의 모습을 한 나로부터 온전히 사랑받습니다. 말하자면 이곳은 현실과 모든 것이 똑같지만 현실이 아닌 연극적인 공간과도 같으며 그 속의 모든 등장인물은 제각기 다른 이름과 외모를 가지고 있어도 실질적으로는 모두가 나입니다.


영화 <시라노 : 연애조작단>이 보여주는 연극적인 설정들은 바로 이러한 자기 연민의 세계와 같습니다. 의뢰인은 병훈 일당이 알려주는 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의뢰인이 하는 모든 말은 대사이며 모든 행동은 연기이고 모든 감정은 연출입니다. 말하자면 의뢰인은 표면일뿐 내면의 자아는 병훈 일당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 연민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나에 의해 연출되듯이 의뢰인의 모든 것도 병훈 일당에 의해 연출됩니다. 영화 초반에 현곤(송새벽)이 보여주는 부자연스러운 태도는 연기의 어색함을 보여줌으로써 웃음을 자아내려는 의도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아가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상용이 병훈 일당에게 의뢰하는 이유는 물론 희중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자신이 직접 희중에게 다가가는 것보다 병훈 일당을 통하는 것이 성공률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요. 그 이유는 그가 병훈에게 말한 것과 같이 여자 앞에서 말을 잘 못한다는 결격사유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이것입니다. 상용이 희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것과 병훈 일당을 통해 다가가는 것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일까. 희중과 맺어지기만 한다면 직접 다가가든 남을 통해 다가가든 상관없는 것일까.


제 생각에는 둘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일단 상용이 희중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외모입니다. 말하자면 상용은 희중의 단면에 사로잡힌 것이지요.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단지 희중의 입체적인 모습들은 오히려 그가 아닌 병훈 일당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상용은 병훈 일당이 알려주는 정보를 토대로 희중에 대해 생각합니다. 병훈 일당이 알려주는 대사를 하고 병훈 일당이 알려주는 대로 움직이며 병훈 일당이 지시하는 대로 일정을 잡습니다. 말하자면 상용은 병훈 일당에 의해 상상된 희중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상상을 합니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 하루 종일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모두에게 똑같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똑같다면 내가 반한 상대는 모두가 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지요. 나에게 아름다운 사람이 누군가에게 추하지 않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를 좋게 상상하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일반적인 경우에 사람은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상상에 끊임없는 수정을 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상대는 계속해서 변하고 누군가에게는 한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천 개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 되어 마침내는 나를 둘러싼 세상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연민은 상대의 모습을 고정시킵니다. 상대를 직접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한 번의 이미지만이 오직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됩니다. 병훈 일당에 의해 상상된 희중을 만난다는 것은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희중을 만나고 있지만 상용의 머릿속에서 희중은 처음 반한 그 모습에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스로 상대에 대한 상상을 수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정보는 병훈 일당으로부터 나오고 병훈 일당이 알려주는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상상을 수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당연히 나타나는 반응, 즉 스스로의 변화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실제로 머리부터 말투까지 상용을 변화시키는 것은 상용 자신이 아니라 바로 병훈 일당이지요.


병훈 일당의 사업, 영화의 제목을 빌리자면 이 연애조단이라는 것은 그들의 본업인 연극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은 바로 자기 연민에 빠진 스스로의 상상과도 같지요. 연출부터 대사, 행동 그리고 결말까지 모든 것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완전한 것입니다. 혼자만의 상상만큼 자신과 주변 상황이 완전해지는 곳도 없습니다. 어쩌면 자기 연민이란 이러한 완전성에 대한 동경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완전성은 말하자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정지된 것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연극은 반드시 막을 내리게 되어 있고 막이 내리면 모두들 현실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계속 막을 올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무대에는 반드시 불이 꺼지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지요.


병훈의 경우를 본다면 그는 애초부터 희중을 잊지 못하고 있던 게 아닙니다. 그가 다시 희중에게 마음이 생기는 시점은 상용이 그녀의 사진을 보여준 순간부터입니다. 말하자면 감정은 원래부터 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때 깨어난 것입니다. 물론 오랜만에 만난 옛 연인에게 사랑의 감정이 다시 찾아오는 일 자체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이것은 모든 연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적용되는 것은 과거의 관계에 아쉬운 점을 가진 연인들에 한해서입니다.


병훈과 희중이 헤어진 것은 둘 사이의 신뢰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아니라고 말하고 오해라고 말했지만 사실 병훈은 자기 방으로 데려간 여자와 동침했고 그 죄책감을 돌리기 위해 아무 일 없었던 희중에게 이별의 책임을 돌렸지요. 말하자면 병훈에게 희중은 그의 탓으로 망가뜨려 버린 과거인 셈입니다. 따라서 병훈이 희중에게 사랑을 느끼는 건 엄밀하게 말해 사랑이 아니라 향수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후회라고 할 수 있지요. 상용의 입을 통해 전하는 희중에 대한 고백은 사랑의 고백이기보다 오히려 고해성사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짝사랑이 시작되지 않은 사랑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자기 연민이라면 옛사랑은 이미 끝나버린 사랑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자기 연민이라고. 그러니 진행방향은 달라도 상용과 병훈은 결국 같은 사람입니다. 배우도 관객도 모두 나인 극장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죠. 희중과 상용의 껌 사건 다음에 희중과 병훈의 껌 사건이 나오고 희중과 상용이 키스할 때 병훈과 상용의 키스 장면이 나오는 등 두 사람의 현재와 과거가 끊임없이 오버랩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용과 희중이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극장 안에서 했던 연극 때문이 아니라 극장 밖에서 했던 행동들 덕분입니다. 아플까봐 걱정되어 찾아가고, 차 안에서 어제 누구랑 있었느냐고 힐난하며, 병훈 일당이 써준 대사가 아닌 자신의 말로 했던 행동들. 말하자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희중의 모습을 새롭게 상상하게 하는 동시에 그 자신도 처음 보는 자신의 변화들이 그를 사랑으로 이끈 것입니다. 연극이 대사로 이루어져 있다면 사랑은 애드립으로 하는 것이니까요.


영화의 말미에 병훈은 자신이 좋아하는 공연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무대에 올립니다. 텅 빈 무대를 쳐다보고 있는 병훈의 모습은 마치 자기 연민이라는 연극이 끝나고 이제 더 이상 상상할 것을 갖지 못한 텅 빈 남자의 모습처럼 쓸쓸해 보입니다. 상용과 달리 그는 구원받지 못했지요. 짝사랑은 사랑으로 시작될 수 있어도 옛사랑은 그걸로 끝이니까요. 그러나 누군가가 말을 거는 건 언제나 연극이 끝난 뒤입니다. 연극이 한창일 때는 누구도 말을 걸 수가 없지요. 이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한 번 시작하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연극은 또 한 번 시작될 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삶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대사보다 더 좋은 애드립을 꼭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2022년 12월 10일부터 2022년 12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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